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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성을 기다리며 Feb 13. 2021

독서의 이유 1

                                                                                                                                                                                                                                                                                                                                                                                                                                                                                                                         

지난 그믐날에 분리배출 쓰레기들을 현관에 잔뜩 꺼내놓았다. 각종 배달로 버려도 버려도 금방 쌓이는 플라스틱이며 비닐류다. 저녁 먹고 버려야지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보니 신랑은 어깨 통증으로 일찍 잠에 들고 밤은 더 깊어 혼자 버리러 나기기가 애매해졌다. 딸이 같이 나가줄께 했지만, 그냥 내일 아침에 일찍 버리자하고 현관에 그대로 둔채 잠에 들었다.


어릴 적 할머니가 계셨던 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이 되기 전부터 제수 장만에서 집안 청소까지 준비를 정성껏 하시면서 그믐날 밤이 넘기 전까지 이런 거, 저런 거 삼가해야 할 행동들은 못하게 했으며 한 해의 묵은 짐들은 버리거나 정리하게 하여 집안팎과 마음 안팎을 정갈하게 하셨다. 설전날 차례 음식을 준비하시는 동안은 그 노릿노릿 맛있게 지져낸 뜨끈한 전들을 바로 먹어 보는게 소원이었는데 택도 없었다. 그렇게 오직 '예(禮)'에 정성을 다하는 시절을 지나 내 바로 곁에 기준이 되는 '예(禮)'가 모양과 의미를  달리하게 되다 보니 나와 가족들의 몸은 편하면서도 한 번씩,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설날 아침, 신랑이랑 둘이 분주히 준비하여 차례상을 차려 놓고 가까이 사시는 어머님만 오시고, 청주사는 동서네는 ZOOM으로 초대하여 같이 차례를 지냈다. "할아버지 어안이 벙벙하시겠어요" 하면서도 언제나 그랬듯, 가족들 만나고 정을 나누는 일을 살뜰이 챙기는 아들의 끊임없는 제안이 있어 온라인 차례는 이렇게 잘 이루어졌다. 차례가 끝나고 어머니께 다 같이 세배를 드리고, 각자 오늘 하루 복 많이 받고 잘 지내자는 인사를 나누고 ZOOM을 껐다. 명절에 다 모이면 열 명, 이틀 간 방과 거실을 오가며 번잡하게 지내는 거 대신 각자 집에서 지내니 편하고 좋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으니, 우리 가족도 온라인으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한 것이다.    


1m의 거리를 두고 앉아야 된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는 한 공간에 있는 것이 축복이다. 눈빛을 바라보고 고르거나 바쁜 숨소리를 들으며 속내의 기쁨과 슬픔을 읽어내며, 1년에 몇 번 못보는 3촌과 4촌 사이의 정을 쌓고 아끼고 이해하며 응원해주던 삶이 온라인으로는 똑같을 수가 없었다. 온라인 넘어로는 그런 속내를 주저없이 꺼내기가 쉽지 않다. 형식이 내용을 충실히 담기에 아직은 모자란 그릇이다 싶다.


코로나19 전부터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며 인류는 어쩔 수 없이 비대면의 시대로 가야 하고 그것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지만, 그 '어쩔 수 없음'이라는 것에 대해서 나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다고 많은 사람들에게 간곡히 텔레파시 보내고 싶다. 왜 텔레파시냐면 이런 속내를 대놓고 말하면 "시대를 읽으세요"로 압축된, 변화되는 세상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셔야 합니다에 준하는 애정어린 충고들을 바로 보내줄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시대는 어떻게, 왜 변하며 어디로 향해가는가, 어디로 향해가야 하는가에 대해 자주 생각해본다. 누구나 생각해 보듯. 그 중에는 변화를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변화를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본다. ....., 그렇다면 변화를 이끄는 힘은 무엇인가, 변화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가...,소망하건데, 사랑과 혜가 가득하여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는 방향으로 용기있게 제안하고 이끄는 사람들의 생각과 구상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대열을 형성하고 변화를 이끌어 왔고 이끌어 갔으면 한다. 비대면 사회로의 변화가 어 수 없이 가야 하는 방향이라면 그 안에도 사람의 사랑이 '사과 하나 나눠 쪼개 가질 수 있는' 그런 사랑이 가득히 담길 수 있는 방법을 진짜 모색하면 좋겠다. 줌 수업의 백가지 천가지 장점을 열거한다 하더라도 우린 여전히 대면 수업을 더 그리워하듯이. 세상이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를 예측하지 말고 어떻게 변해 가길 바라는지 서로서로 더 많이 이야기 나누며 소망을 키워가는 시간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변화를 이끄는 대열에 그간 여리고 더뎠지만 착한 심성으로 성실히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힘들이 모였으면 참 좋겠다.


할머니께 세배를 마치고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여느 해보다 준비를 많이 않했지만 그래도 생선과 문어와 전과 나물들로 즐거이 아침을 먹는다. 상을 치우고 각자 할 일을 한 뒤 오후엔 산에 갈 계획을 세우는데 아들이 급히 지나가다 말고 쓱, 나와 신랑에게 따로따로 세배를 한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뱃돈 주세요 한다. 옴마야, 세뱃돈이 목적이었군, "그렇게 급히 세배를 하면 어쩌냐"했다. 예(禮)를 생각하면 그건 아니지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잔소리와 세뱃돈 계획을 세우는 요즘 십대가 충돌하며 더 없이 좋은 우리 모자지간, 백만 년만에 전쟁을 시작하였다. 예전 할머니가 계셨을 때라면 새해 첫날부터 집에서 큰소리 나면 안된다 하셨을 터이므로 참았겠지만, 나는 오늘, 작정하고 '세뱃돈'으로 시작된 아들의 불통고집을 꺽을 결심으로 마음을 굳혔다. 한 마디도 안 진다. 어른이 자리에 앉으면 그 때 비로소 예를 갖춰 정성껏 세배를 해야지, 했더니 아니란다, 충분히 정성껏 했는데 왜 그러냐며, 아니면 지금 다시 하겠다며 앉으시라고 되려 큰소리다. 어라, 싫다. 내가 지금 네 세배를 못 받아 이러느냐, 아까도 정성껏 한 건데 정 그러시다면 다시 하면 될 것 아니야 한다. 부모에게 어디 말대꾸냐며 네 방에 가서 5분간 무릎꿇고 생각해봐, 싫어요, 우리의 칼날은 팽팽히 맞섰다. 나의 목표는 분명했다. 아들의 쓰잘데기 없는 고집은 꺽고, 아닌 것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하고 진심으로 반성하게 하는 것. 창공에서 쨍쨍 빛나던 칼날은 아들이 돌연 눈물과 함께 거두며, 알겠어요 방에 들어가 5분간 생각할께요, 생각하면 되잖아요, 와 함께 정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정확히 5분을 재었다.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아들이므로. 책장에서 아들이 전에 소리 내어 읽었던 [소학]을 들고 5분이 지날 무렵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효'에 대해 읽은 바를 상기시켜 줄 요량이었다. 아들도 나도 여전히 대치 상태였으나 차분해졌다.


 "사람은 어찌 살아야 한다고 했느냐." 아들은 여전히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는 듯 씩씩거렸다. "덕이 있게 살아야 하고, 참으면 덕이 있게 됩니다." 생각지도 못한 아들의 답변에 속으로 놀랐지만 다시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맞다. 그리고 사람은 그 '아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 문장도 말도 길면 힘이 없다고 했다. 여기까지만 하고 더 나오려는 나의 말들은 손으로 틀어막으며 방을 나왔다.


아들과 얼싸안고 안기어 죄송해요 아니다 나도 미안하다 그러는 아름다운 광경은 연출되지 않았고, 어정쩡하게 휴전이 되어 아들과 딸은 정중히 세배를 하고 신랑은 나 대신 가득 덕담을 주었다. 그리고 다함께 나선 식장산 나들이,  결국 나의 좁은 속내는 둘레길을 걷다가 아들의 이름을 나즉이 불러 옆에 걷게 하며 눈빛을 지그시 고정시켜 '엄마 마음 알지? 엄마가 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주고 받으며 풀 수 있었다. 열일곱살, 자존심이 얼마나 강해질 나이인가, 그럼에도 덕이 있고 사랑이 가득한 아들은 배꼽위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어머니 아깐 제가 잘못했어요." 꾸벅 인사하더니 후다닥 달아나며 앞서서 걷고 계시던 할머니 옆으로 간다. 참, 고맙고 사랑스러운 멋진 아들이다.


생각해 본다. 책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아들은 읽기 싫은데도 [소학]이니 [몽구]니 하는 고전을 왜 소리내어 읽는가. 산으로 오르는 걸음마다 생각이 인다.


내게 허락된 삶이 그저 흘러가길 바라지 않고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하길 바란다. 하지만 삶이란 걸음을 뗄때마다 '모퉁이'와 무수히 많은 갈래길을 만나게 될 것이니, 그럴 때마다 숙고하여 판단하고 최선의 선택을 어찌 이룰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읽는다. 책에는 나와 같이 무수히 흔들리는 삶의 길을 걸으면서  먼저 고민하고 경험하고 살아온 지혜들을 들려주고 있으므로. 앞에 놓인 길만 보지 말고, 아파도 견뎌내고 슬픔은 슬픔으로 위로 받고, 주변도 살피며 살아가라는 충고도 주고, 아들에게 말했듯, 아는 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아 가라고 따끔히 혼도 내 준다. 그래서 읽는다. 비대면의 시대가 되기 전부터 우리는 지성인들과 실천가들의 가득한 진심과 지혜를 책으로  만나왔으니, 이제 진짜 내가 할 일은 좀 더 눈을 아껴 오랫동안 책을 읽기에 불편해지지 않을 몸과 체력을 갖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일 것이다.


부지런히 살자, 마음은 굴뚝인데 요즘 잠이 늘었는지 오늘 아침도 겨우 일어났다. 일찍부터 '일일 일등산' 하고 있다는 유리의 글에 글로 응원을 보내며 나는 무엇에 도전할까 하다가 다시 '일일 일글'에 도전해 보겠다고 했다.


목표와 다짐이 있는 하루가 그렇지 않은 날들보다 분명하고 힘이 나고 부지런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아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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