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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선 Dec 20. 2021

[시:詩] 단야(短夜)의 옛말들

시집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수록 '산문 시'

단야(短夜) 옛말들


여름이면 곧잘 밤의 길녘을 걸어내곤 했다 여름밤 울리는 소리 너머로는 이따금 옛말들이 건너왔다 오래이지만 오래고 멀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몇 마디 새겨진 그것은 줄곧 그해의 계절에 머물렀다 계절의 모양처럼 거리의 숨들처럼 자연했다 연유라 알지 못하였으나 언젠가는 알 것도 같았다 말을 건네진 아니했다


옛말들은 모두 조금치 기울어져있었다 지난 계절의 바람에 날리우지도 빗물에 쓸려가지도 않은 채 다만 기울인 모양은 가끔 어디론가 시선을 두는 것만 같았다 그것의 기울기라 차마 밀어내지 못하니 여전히 그만한 각도로 서있을 뿐으로 간혹 어깨를 내어주기도 했다 기울인 시선에 신경이 쓰이곤 했다 문득 무어라 말을 건네 볼까 싶다가도 이내 입술을 모았다 언젠가는 옛 계절이 남긴 낙조의 잔상이라며 무딘 척 툭툭 털어내 보기도 하고 가슴을 탁탁 두드려보기도 했다


여름밤은 못내 길어서 고로 생각이 흐르는 거리도 멀다 옛말들은 떠날 생각이 없어 고개 기울인  발끝을 서성인다 이따금 눈이 마주치는 것도 같다 하나를 주워 입술에 닿아 본다  하나를 주워 입가에 담아도 본다 못내 길어 서글픈 단야엔 이내 새벽이 왔다






시집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개정증보판에 수록된 산문   편을 소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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