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 여행

총 맞은 그날 이후, 승-6

by 뷰리플기러기

누구에게나 떠올리는 것만으로 미소가 지어지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이가 초등학생이던 여름, 처음으로 내 차를 배에 실어 제주도로 향했던 기억이 그렇다. 물놀이 용품, 전동 킥보드와 보트를 차에 싣고 하루 두 번씩 물놀이를 즐기던 시간. 가족들이 잠든 새벽, 홀로 킥보드를 타고 시원한 제주 공기를 마셨다. 챙겨갔던 믹서기로 제주 감귤을 갈아 마셨다. 그 공기와 주스의 맛은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비행기를 탔을 때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입체적인 즐거움이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어느덧 4개월. 몸은 황폐해졌고 마음은 황량해졌다. 하지만 '말띠'인 내 안의 역마살은 이 혹독한 시간에도 꿈틀댔다. 3주 단위로 돌아오는 치료 주기 중, 그나마 컨디션이 회복되는 2~3주 차를 공략하기로 했다. 가족들의 걱정 어린 지지를 뒤로하고, 나는 다시 한번 차를 배에 싣기로 했다. 민머리를 가릴 벙거지 모자를 쓰고, 몸은 가볍게, 그러나 차는 무겁게 채웠다. 시간에 쫒기지 않고, 뭘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쫓기지 않고, 몸이 원하는 대로만 해주기로 했다. 피곤하면 쉬고, 배고프면 잘 먹고, 목적지 없이 제주 바다를 눈에 담고 오자는 요양이었다.


P(즉흥형) 타입의 여행에는 시간과 비용이 더 들기 마련이다. 완도에서 제주가는 쾌속선도 있지만, 출발 코앞에서 임박해 여행스케줄을 짜는 즉흥여행자를 위해 남은 티켓은 없었다. 여수에서 자정에 출발하는 밤 여객선 티켓을 끊었다. 제주 숙소는 출발해서 숙박 어플로 잡기로 했다. 그렇게 차를 가지고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시작했다. 여행의 동반자로 여자 아이돌을 호출했다. 신나는 여름 노래를 선곡했다. 시스타(SISTAR) 노래가 최고다. 우하향 곡선을 그리던 내 감정 수치가 비트와 함께 가파르게 솟구쳤다. 날씨도 하늘의 구름도 나에게 선물을 주며 응원한다. "그래, 떠나길 잘했어!"

여객선 캡슐 룸도 처음 경험해 본다. 슈퍼싱글 침대 사이즈의 공간에 TV 모니터까지 제공이다. 때마침 파리 올림픽 양궁 시합이 중계되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이 '10·10·10'을 쏠 때마다, 그 화살이 내 마음에 박힌 우울을 뚫어주는 기분이었다.


낯선 환경은 뇌의 신경가소성을 자극해 노화를 늦춘다고 했던가.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들, 계획을 세우고, 길을 찾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 기억과 집중력 향상에 도움을 주고 문제 해결 능력까지 높혀 준다고 한다. 스마트폰도 여행책도 없던 시절, 파리 지하철역에서 티켓 한 장 끊느라 한 시간을 헤매던 그 시절의 진땀 나는 카타르시스가 떠올랐다. 처음으로 홀로 떠난 배낭 여행의 기억이다. 예측 불가능해서 불편하면서도 짜릿한 여행의 맛을 알아 버린 그 '자유여행자'의 본능이 암 환자가 된 지금도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홀로 일주일동안 시원한 제주 바다를 보고 하얀 산호 모래를 맨발로 걷고, 한라산 기슭의 숲의 공기를 폐에 넣어주고 제주 카페들을 전전하며 '카페 죽순이'로 보낸 요양 여행. 돌아온 후 마음은 솜사탕처럼 가벼워졌으나, 과하게 신이 났던 탓인지 간 수치가 높아져 약을 한 움큼 먹어야 하는 '환자 신세'로 복귀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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