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50주년에서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초등학교를 5학년 다니고 서울로 전학했다.
그 시절은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인구가 너무 많다고 서울 인구 억제 정책을 폈다.
강림은 초등학교만 있고, 중학생이 되면 안흥중학을 자전거를 구입 통학을 하거나 안흥에 자취를 해야 했다.
안흥에 외가가 있어서 거기에 쌀을 월 한 가마니 보내주고 하숙을 할 수도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사돈댁에 아쉬운 소리 할 분이 아니었다. 왕년에 김 구 선생도 김일성 88여 단장도 할아버지가 아편 팔아 남긴 이문을 균등하게 1/3씩 보내고 1/3로 차후 아편 매입과 할아버지 풍찬노숙보다 약간 고급 생활을 하였기에 직책은 없지만 조선팔도에 누구도 무시 못할 분이었다.
망아지는 제주로 보내고, 손자는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서울로 위장전학을 했다.
처음 전학은 주민등록 등본 상 아버지, 어머니, 나로 세대구성해 전학을 하고, 담임 가정방문이 끝나면 아버지, 어머니 강림으로 할아버지, 할머니, 나 3인 세대 구성을 했다.
시골은 우리 반 58명이 전부인데, 서울은 15반까지 있었다. 8반까지 남자반 9반부터 15반은 여자였다.
나는 전학 와서 8반 77번인데, 여자반 9반부터 15반 여자 77번은 엄청 키가 컸다. 점심시간에 운동장여 음악이 나오면 포크댄스를 췄다. 돌아가면서 파트너가 되었다. 9반부터 15반 77번이 짝인데, 어쩌다 앞 번호 결석이 생기면 78번이 파트너가 되었다.
내 얼굴이 그녀 젖가슴에 파묻혔다. 정말 엄마 냄새로 눈물이 났다. 눈물이 글썽거리면 그녀는 왜 울어? 물었다. 우는 것은 아니고, 너랑 마주하니 고향 엄마 생각이 난다고 했다.
어느 토요일 공군사관학교에 송충이 잡는 행사가 있었다. 개인이 송충이 10마리를 잡아 담임에게 검사받고 집에 가는 것이었다.
시골에서 지렁이, 송충이 만지던 실력으로 10분도 안되어 검사를 끝냈다. 남학생은 알아서 하는데, 여햑생들읕 자기가 1,2, 3학년 시절 친했던 남학생에게 부탁을 하서 제출했다. 슬며시 경쟁심이 생겼다.
6학년 때 전학 와 아는 여자는 9반부터 15반 77번이다. 빵 비닐봉지에 송충이를 70마리를 잡았다. 소리를 질렀다. 9반부터 15반 77번 집합!
바로 들은 77번 전해 들은 77번이 줄을 섰다. 소련 패망 직전 긴 식량배급 줄처럼 77번 줄에 송충이 10마리씩 분배했다. 세월이 50년이 흘렀다. 초등학교 졸업 50주년 행사에 갔다.
60 중반 할머니 몇 명이 나를 보더니 송충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