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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 강민철

10. 오누이

by 함문평

강미정 씨, 북한을 탈출한 이유와 어떤 경로로 왔습니까?

1994 년부터 이어진 ‘고난의 행군’ 시기에 식량을 구하려고 통천에서 청진으로 갔습니다. 청진은 통천보다 먹을 것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청진에 갔는데, 국경 연선에 나가 밀무역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사람 말을 듣고 선봉까지 따라갔습니다. 밀무역 심부름을 해주고 돈을 좀 벌어 통천으로 왔지요. 번 돈 다 쓰고 다시 밀무역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 이번에는 혜산으로 가서, 압록강을 도강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 분을 만나 그분 도움으로 한국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북에 계신 부모님이 고초를 겪지 않겠습니까?

일 없습니다. 북에서는 지금도 돈벌이 나가 밀무역하는 줄로만 알지, 남조선까지 온 것은 모릅니다. 선생님, 저의 이름과 신상이 신문이나 방송에는 절대로 나가지 않게 해 주세요.

그렇게 하지요.

우리는 탈북주민에게 북에 남은 가족을 염려하는 분은 절대로 신분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어 함영세 서기관은 나에게 질문했다.

강영수 씨, 스위스 유학만 마치고 북으로 돌아가면 핵물리학자로 상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편히 지낼 수 있는데, 왜 탈출하였습니까?

예, 스위스에 유학하고 있는데, 2007 년 5월 31일 날 어머니가 국제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버지가 해외로 나가 전투임무를 수행하다 잡혔는데, 동료 전투원은 묵비권으로 사형을 당했고, 아버지는 사실대로 자백을 한 것이 뒤늦게 당에서 비판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가 여자 혼자의 몸으로 나를 키우는 것을 가엾게 여긴 고급 당 간부가 어머니를 돌봐주고 어머니는 가끔 그 고급 당원의 애인 노릇을 했다고 하시며 우시더군요.

영수 너에게 미안하고, 민철 씨에게 더욱 미안하다고......

그러면서 어머니는 스위스에서 탈출해 미국으로 가든 한국으로 가든 네가 연구하기 좋은 곳으로 탈출하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 후 어머니는 전화가 도청되니 너는 더 이상 나에게 전화해서는 안 된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어머니와 통화 후 저는 신문 기사에서 전 세계의 테러 사건은 다 읽었습니다.

그러다가 1983 년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에 대한 영문 기사와 흑백 사진의 강민철, 진영관 소좌의 사진을 보고 저는 머리가 짜릿함을 느꼈습니다.

희미한 흑백 사진 속의 강민철은 ‘나의 아버지 강영철’ 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바로 버마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현실은 쉽게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유학에 나와 다른 유학생을 감시하는 당 세포 동무에게 일일 행동을 다 보고해야 했습니다.

하늘이 도와 나를 감시하던 당 세포 동무가 스위스에서 줄리아 김이라는 한국 이미 2 세와 부화 사건이 발생해 2007년 12월 23 일 평양으로 소환되고, 새로운 당 세포 동무는 12월 31일에 온다고 했습니다. 당에서는 임시로 유학생 중에 가장 출신 성분이 좋은 ‘ 손성원 박사’를 유학생 책임자로 지명했습니다. 같은 유학생끼리의 감시라 당 세포 동무에게 보고하는 것보다 편했고, 여행도 편리를 잘 봐줬습니다. 그래서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3일간 독일과 프랑스를 여행하고 오겠다고 손성원에게 보고하고 독일로 갔습니다.

거기서 독일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남한으로 망명을 신청했습니다.

스위스 유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망명은 약간의 외교문제가 될 것을 우려했으나 스위스 정부에서 개인의 망명의사를 존중해 준다며 독일에서 국제법에 따라 난민 신청을 하고 한국으로의 망명을 허락했습니다.

함영세 서기관은 더 이상 고모와 나에 대한 신문을 계속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냉장고로 가서 캔 음료수 3 개를 꺼냈다.

고모와 나에게 하나씩 주고 자신도 한 캔 마셨다.

창밖을 보았다.

새털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갔다.

왜, 하필이면 이때 고모 강미정과 내가 한국으로 왔을까?

참으로 하늘도 하느님이 계신 것인지 없는 것인지.

조금만 빨리 고모나 나 둘 중 한 명만 일찍 한국으로 왔다면, 그래서 버마 아웅산 테러리스트 강민철이 강민철이 아닌 ‘강영철’이라고 그 혈육이 남한으로 왔다면 톱뉴스가 되었고, 한국 정부도 강민철 아니 강영철을 외교적 노력을 다해서 강민철을 한국으로 이송요청 했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질 좋은 의료 서비스가 그의 간암도 초기에 발견했고, 치료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다. 나의 아버지 강민철은 남과 북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외로운 영혼이 되었다.

1983년 10월 9일의 테러가 아버지 강민철 자신은 조국통일을 위해 이 한 몸 바친다는 각오로 임했다.

한 가지 아버지 마음이 무거운 것은 사형집행 된 진영관처럼 묵비권을 행사하지 않고, 사건의 전모를 미주알고주알 다 까발린 것이 비판받을 일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여 사상 전향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강민철은 불꽃처럼 살다 간 청춘이다.

제12, 13 대 대통령 이 취임식

여의도 광장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단임제를 실천하고 떠나는 전두환 대통령과 1987년 역사적인 국민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사이좋게 식장을 들어서고 있었다.

두 분의 대통령 내외를 보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은 인산인해였다. 거리마다 ‘단임 실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두환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그런 류의 현수막과 피켓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의 시위로 청와대서 쫓겨 하와이로 망명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3 선 개헌을 하여 장기집권에 성공했으나 임기 말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갔다.

장면, 윤보선 대통령 시기는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지는 엉망의 난국에서 5.16 혁명인지 군사 쿠데타인지 불분명한 상황으로 하야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 일당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 대통령에서 하야했다.

주어진 임기를 꽉 채우고, 내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가는 최초의 대통령이 전두환 대통령이다.

시인 미당(未堂) 서정주는 전두환 대통령을 단군 이래 최고의 통치자라고 감탄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런 서정주 시인의 호 ‘미당(未堂)’을 이순자 여사가 ‘말당(末堂)’ 서정주로 읽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개그프로그램의 한 코너 ‘말당(末堂) 학교’가 인기 프로가 되었다.

우리나라 여의도 방송국이 한쪽은 ‘봉숭아 학당’으로 인기를 얻을 때, 다른 방송국에서는 ‘말당학교(末’堂學校)가 방송되었다. 봉숭아 학당보다 말당학교의 인기가 높았다.

전두환 대통령 각하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 未堂 서정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아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임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으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세계에 넓히어

코리아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시안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 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나 새것이나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렇게 두루두루 나타나는 힘이여

(이 하 생 략 )

1988년 2월 25일, 이날이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떠나고 취임하는 오천 년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의도에는 우리나라 KBS, MBC, SBS, 연합통신, 내외통신 등의 기자와 NHK, CNN, BBC, 신화통신, AP, UPI 등 세계적인 언론이 모두 모였다. 대통령 이·취임식을 생중계하거나 녹화하기 위해서다.

사회자의 사회에 따라 국민의례가 거행되고, 대통령 선서, 축하 노래, 이임사, 취임사로 이어졌다.

이임 대통령의 리무진이 행사장을 빠져나가 연희동을 경유하여 백담사로 향했다.

이임한 전두환 대통령 내외는 7년 동안의 단임 대통령 기간 정말로 휴식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퇴임하면 바로 백담사로 가기로 예약되었다.

백담사 주지였던 ‘일해(日海)’ 스님이 과거 전두환 대통령이 군인 시절 제1 사단장을 했는데, ‘일해(日海) 스님’이 그 1 사단 군내 사찰인 ‘일문사(一聞寺)’의 군종법사로 봉직했었다.

그 인연으로 전두환 장군은 머리가 복잡한 사단 내의 문제가 생기면 일해 스님을 찾아가 환담을 했다.

그때마다 일해 스님은 아주 샘물 같은 지혜를 주었다.

아니, 전두환 장군의 내면에 이미 들어있는 총명의 기운을 밖으로 내뿜게 한 것이다.

사단장을 마치고, 국군 보안사령관 시절에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10.26 사건이 터진다.

김재규와 계엄사령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친분 관계가 깊어 10.26 사건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조사해야 하나 대통령의 재가 없이 계엄사령관을 조사할 수 없어 머리가 복잡할 때,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백담사 일해 스님을 찾았다.

그때, 일해 스님이 전두환 보안 사령관에게 해준 말은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높으나 하늘 아래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나 바다 위에 있구나’라는 아주 묘한 말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의 내면의 총기(聰氣)를 밖으로 분출했다.

전두환 보안 사령관은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12.12 거사 암호명 ‘백일집 잔치’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체포하였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박정희 대통령 시해에 방조자 혐의로 체포했다. 이어 1980 년 광주에 5.18 광주 민주 항쟁에 도화선이 되는 공수 특전단을 광주에 파견하여 광주 민심을 자극했다.

1983 년 8월, 선양과 연변

서초동 정보사령부 지하실 벽면에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다.

태극기 아래 단상이 하나 있다.

특수임무 수행요원 파견신고가 있었다.

정보 사령관 김영철 소장은 3 명의 특수임무 수행자 신고를 받고 있다.

군번이 제일 늦은 함영국 소령이 맨 좌측에 서고 가운데 안광수 소령, 군번이 제일 빠른 조하영 소령이 제일 우측에 위치했다.

왜냐하면 사령관이 단상에서 걸어 나와 좌에서 우로 친서 임무수행 사령장을 수여하였기에 서는 건은 군번의 역순으로 섰다.

사령관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바로! 지금부터 해외 파견 특수임무 수행자에 대한 사령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임명장)

소 속 : 제7777 부대

계 급 : 소령 군번 : 7977310 성명 : 조하영

위 사람을 선양 해외 공작임무에 명함

1983년 8월 16 일

국군 정보사령관 육군 소장 김 영 철

(다음) 안광수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다음) 함영국 이하 내용은 같습니다.

사령장과 함께 부상으로 사령관님 친필 서명이 들어있는 금장시계 남녀 부부용이 수여되겠습니다.

3 명의 소령 급 장교는 해외공작 임무 사령장을 받고 출국을 하였다.

임무 사령장을 받을 때만 군인 정복을 입었지 출국부터는 정말 새로운 신분이었다.

아니, 자기의 성과 이름을 숨기고 제3의 가공인물로 살아야 했다.

출국 여권을 받았다.

여권의 이름은 함영국은 함영국이 아닌 ‘천금성’으로, 안광수는 안광수가 아닌 ‘장백산’으로, 조하영은 조하영이 아닌 ‘백세주’로 살았다.

이것은 만약에 공작이 탈로 나도 한국에 이런 사람 없다고 가짜 여권 위조여권이라고 발뺌할 도구를 미리 위조 여권으로 만든 것이다. 천금성, 장백산, 백세주가 그렇게 탄생된 것이다. 북한도 해외 공작 임무 수행 전투원에게 가명으로 여권을 만들어 주고 혹시 실패하면 그런 사람 없다고 발뺌하듯이 한국 정보 장교들도 해외에서는 가명을 썼다. 한 마디로 실패하면 남의 이름으로 죽어야 했다. 천금성, 장백산, 백세주는 중국행 비행기도 따로 탔다.

서초동 정보사령부 정문을 나온 후로는 서로 알 필요도 없고 아는 척할 수도 없었다.

만약에 실패해도 혼자만 처단되고, 성공해도 혼자의 성공이었다.

각자의 방법으로 첩보수집 임무만 잘하면 되는 것이다.

천금성은 김포 공항 행 리무진 버스를 탔다. 집이 대방동 군인아파트라 영등포역에서 출발하는 공항 리무진을 탔다. 출국 수속을 밟는데, 누가 어깨를 치면서

어머, 함 소령님 아니세요? 했다. 이 많은 출국 인원 중에서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도 여권상의 이름이 아니라 본명 함영국을 부르다니?

천금성이 옆을 봤다.

여군 신윤희 중사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예비역 육군 중사 신윤희였다.

어, 신 중사 웬일이야?

에이, 숙녀에게 신중사가 뭐예요? 제가 제대한 지 2 년이 넘었는데요.

신윤희 양, 여기 웬일이야?

예, 그렇게 부르셔야지요.

역시 함 소령님은 센스 쟁이야! 하며 깔깔 웃었다.

이거, 정말 신윤희 양을 김포 공항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저도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전방 155 마일 철책을 지켜야 하는 함 소령님이 이 밝은 대낮에 김포공항 그것도 해외 출국장에 있다니.

내가 잘못 봤나 하고 자세히 봤어요.

비슷한 사람을 보고 인사했는데, 아닌 경우 참 민망하거든요.

자세히 보니 서류에 볼펜 들고 쓰는데 왼손으로 쓰는 것을 보고 함 소령님이다 확신했죠. 그리고 벗은 모자에서 특유의 대머리도 확인했고요.

하며 까르르 웃었다.

함영국은 신윤희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신윤희 양, 부탁이 있어.

뭔데요?

저, 미안한데 나를 함 영국 소령으로 부르지 말고, 천금성, 천 씨 오라버니 아님 천 씨 오빠라고 불러주기 바라.

그럼, 호적이 바뀐 겁니까?

아니, 호적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해외 특수임무 수행자로 가게 되어.

알지 신윤희 양 예전에 신윤희 양이 대북 방송할 때, 탈북한 사람 대담에서 가명으로 방송하듯이 내가 그런 입장이거든.

예, 알았습니다. 무슨 뜻인지.

흑색 여권으로 일하러 가시는 군요, 하며 웃었다.

신윤희 양은 제대해서 뜻한 대로 유학을 갔나?

예, 이제 3학년 올라가요. 천금성 오빠 정말 고마웠어요.

제가 제대한다고 했을 때, 심리전 단장님이 방송요원 부족하니 신임 여군이 보충될 때까지 전역지원 보류하라고 해서 참 난감했는데, 천금성 오빠 덕분에 전역했잖아요.

그렇다.

신윤희 중사는 1975 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탄에 운명하신 해 겨울에 앵무새가 되었다. 대북 방송하는 여군을 주어진 원고를 보고 반복 방송을 한다고 여군 방송요원을 앵무새로 불렀다.

원래 신 윤희 중사는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은 여군이었다.

영월에서 여고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상경하여 모 방송국의 성우 지망생이 되었다.

층층시하 기라성 같은 성우들이 많이 있고, 방송국은 KBS, MBC 뿐이라 정말로 특이한 목소리 아니고는 제대로 된 수입을 올릴 수 없었다.

그러다가 국군 심리전단에서 방송 요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의무복무 기간 4년 8 개월을 복무하고 장기 신청을 한 상태서 전역을 하고자 했다.

함영국 소령은 그때, 국군심리전단에서 대위로 인사 장교였다.

전역지원서를 가져온 신윤희 중사에게 전역 사유를 물어봤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대학공부를 하고 싶어요.

제가 4 년 8 개월 동안 저축한 돈으로 중국에 유학 가면 2 년 정도는 그냥 공부할 수 있고, 그 후 중국말 유창하게 되면 한국 관광객 중국어 통역을 하거나 관광 가이드로 아르바이트가 가능해 도전하는 것이라 했다.

신 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를 가지고 국군심리전단장실에 결재를 받으러 갔다.

국군심리전 단장 서경원 준장은 결재 서류를 집어던졌다.

야, 인사장교 너 정신 있는 놈이야 없는 놈이야?

단장님, 신윤희 중사 본인 면담 한번 해보시고 결재하시든지 하지죠?

필요 없어. 당장 여군 방송요원 부족해서 여군들이 전방 G.P(General Post) 올라가면 교대를 1 주 단위 못하고 한 달에 2번 하는 거 알지?

예, 알고 있습니다.

아는 놈이 여군 방송요원 전역지원서 기안을 해?

단장님이 여군 신윤희 중사의 인생을 책임져주실 것 아니면, 결재하시는 것이 순리입니다. 만약에 단장님이 결재처리 안 해주시면 신 중사에게 개인적으로 대방동 여성법률 지원센터나 국민 고충처리 위원회에 가서 상담하라고 할 것입니다.

뭐야? 너 함 대위, 제정신이야?

이거 대위에서 소령 진급 취소시켜야지 안 되겠군!

진급을 단장님이 시켰습니까?

뭐야? 이놈이 정말 겁 없는 놈이네!

솔직히, 제가 이놈의 국군심리전단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진급은 이미 제가 전 부대 국군정보사령부에서 그동안의 첩보 수집 성과를 고려해 진급한 것이지 단장님 도움 하나도 없습니다.

신 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 결재를 놓고 국군심리전 단장 장군과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는 함영국 사이에 감정싸움으로 번졌다. 일주일 정도 대치하다 결국 국방부 민사심리전 부장 장영하 소장의 전화를 받고 전역지원서를 결재받고 육군본부로 보냈다.

인사장교 함영국과 국군심리전 단장 서경원 준장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국군심리전단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다.

부하의 남은 인생까지 다 책임질 자신 없으면 전역지원서 막을 단장은 이 세상에 없다. 전역 후 신윤희 중사는 북경 외국어 대학교 중어중문과에 유학을 떠났다.

신윤희 양이 천금성을 선양까지 안내해 주고 안전한 숙소까지 알선해 주고 북경으로 떠났다. 사람 인연의 소중함을 천금성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때, 국군심리전단장의 야단에 주눅이 들어 신윤희 중사의 전역지원서를 보류했다면 오늘 김포공항에서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천금성은 선양에 장백산은 연변 백세주는 화룡에 각각 안착했다.

안착하자 공작금으로 가져간 100만 달러를 일부는 중국 화폐로 환전을 하고 일부는 달러로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조력자에게 중국화폐보다는 달러가 유용했기 때문이다.

3 명의 첩보장교들은 현지에서 조력자를 구했다.

중국말도 잘하고, 북한 말에도 능통한 조선족을 찾았다. 어차피 첩보 수집을 하더라도 북한 땅에 직접 들어가기에는 여러모로 제한 사항이 많았다. 중국과 북한의 무역을 하는 사람이라면 첩보 수집 장교의 조력자로 안성맞춤이었다.

천금성은 ‘제갈 정도’를 장백산은 ‘박기서’를 백세주는 ‘김진대’를 조력자로 구했다.

제갈 정도, 박기서, 김진대 모두 북한과 중국의 무역을 하는 조선족이었다.

제갈 정도 아버지 ‘제갈 정의’는 제갈량의 후손으로 중국 한족 출신이고, 어머니는 북한 여자였다.

어머니 쪽 친척들이 평양에 거주하면서 조선노동당의 고위층에 많이 있었다.

그 덕분에 국경연선에서의 검문에 크게 시달리지 않고 무역을 했다.

정보보고 제1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국화작전 행사에 대한 천금성의 보고

내용 : 천금성이 고용한 조력자 ‘제갈 정도’에게 득문한 사항임.

북한의 5천 톤 급 무역선 동건애국호가 9월 초 황해도 옹진항 출항 예정 목적지는 버마 랑군. 새로운 사항 득문 시 추가 보고. 이상. 끝.

1983년 9월 1일. 보고자 천금성

정보보고 제2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장백산 등산 준비에 대한 보고

내용 : 장백산이 고용한 조력자 ‘박기서’에게 득문한 사항임.

북한의 강창수 부대에서 해외 공작을 위한 인원 선발함.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 임. 추가 득문 시 보고함. 이상. 끝.

1983년 9월 2일. 보고자 장백산

정보보고 제3 호

수신 : 정보사령관

참조 : 정보처장

제목 : 국화꽃을 건조하는 방법에 대한 보고

내용 : 백세주가 고용한 조력자 ‘김진대’에게 득문한 사항임.

국화 재배 단지에서 국화를 대량으로 건조할 방법을 연구 중.

연구단지 버마 아웅산 묘역 일대임. 추가 득문 시 보고함. 이상. 끝.

1983년 9월 3일. 보고자 백세주

하루씩의 시간 차이는 있지만 3 명의 첩보 장교들은 자신들이 고용한 조력자로부터 나름의 충실한 보고서를 본부로 타전했다.

이 보고는 모두 난수표로 암호화되어 보고한 것을 서초동 정보사령부에서 다시 해역 해 옮긴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진다는 말이 있지만 각자 자기 나름의 보고를 정보사령부 정보처장 오현택 대령은 정보보고서를 만들었다. 그야말로 점을 찾아 선을 이어 통일 성업에 한 몸 바치는 심정으로 퍼즐 맞추듯 첩보 조각들을 모아 정보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보장교의 보람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한 장 정보보고서가 채택되었을 때 그 기분은 어떤 금전적 보상보다 큰 의미가 있다.

수신 : 정보본부장/국가 안전 기획부장

참조 : 정보 1 처장/ 해외공작단장

제목 : 정부 추진 국화작전에 대한 최초 보고

내용 : 정보사령부는 정부 추진 중인 국화작전의 성공을 위해 중국에 3 명의 영관

급 장교를 파견했다. 3 명의 첩보 보고를 종합 분석 결과

북한 동향은 다음과 같다.

1. 북한은 해외 테러리스트를 파견할 것으로 예견된다.

2. 장소는 버마 아웅산 묘소 일대

3. 이동 수단은 동건애국호라는 화물선으로 랑군항 근처까지 이동 후 수영이나

소형 보트 등의 수단으로 랑군 시내 진입 예상됨.

4. 건의사항

국화작전 대상국에서 버마를 제외바람.

만약, 제외가 어렵다면 실내 행사만 참석하고 옥외행사(참배, 관광 등)는 취소할

것을 건의함.


1983년 9월 4일. 보고자 국군정보사령관 육군 소장 김영철

(분석관 정보처장 대령 오현택)

정보사령관 김영철 소장은 정보본부장에게 부사령관 이진석 준장은 안기부장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노신영 안전기획부장은 청와대로 갔다. 경호실장 장세동이 배석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서남아시아 오세아니아 순방 국가에서 버마를 제외시킬 것을 건의했다.

만약에 국제 신의를 생각해서 취소가 어렵다면 실내 행사만 하고 옥외 행사 묘소 참배나 관광 등은 취소할 것을 건의했다.

보고하는 사람이나 보고 받는 사람이나 이런 경우는 침묵이 길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전두환 대통령이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솔’이었다. 한 모금 길게 빨았다. 보고하는 노신영 안기부장과 배석한 장세동 경호실장에게도 담배를 피우라고 건넸다.

전두환 대통령은 장세동 경호실장에게 물었다.

경호실장, 임자 생각은 어때?

저는 뭐,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국제관계 신의라는 것이 있으니 약속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만 옥외 행사는 줄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럼, 경호원 수를 늘리지 뭐. 어때? 경호실장이 테러를 겁내면 되겠어?

겁내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1980. 12.12 일에 죽음을 각오하고 백일집 잔치 거사를 했으니까 지금은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현지 공관에 지령을 내려 대사관의 경비를 철저히 하고 국가정보원 해외 각 근무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로 했다. 안전기획부 버마 랑군 주재 파견관 허남태 서기관은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랑군 경찰청과 군부 정보 실무자 정보 최고 책임자까지 만나고 다니면서 북한 선박, 비행기의 출입에 대해 철저한 검문검색을 요청했다.

1983년 9월 5일 버마 랑군항에 북한의 화물선 ‘동건애국호’가 입항을 했다.

입항 목적은 건설 자재 운반이다. 버마 경찰과 군인의 합동 검문 속에 동건애국호의 하역 작업이 진행되었다.

동건 애국호의 화물과 공식 선원은 신분증 대조 결과 본인들이 맞았다.

강창수 부대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3인의 테러리스트들은 이미 랑군 항에 도착 전에 공해상에서 소형 선박을 타고 랑군 항의 반대편 야산으로 은신하였다.

1983년 10월 7 일, 아웅산 묘소 동건 애국호를 타고 랑군항 근처에서 미리 소형 선박으로 침투한 3 명은 진영관 소좌, 신기철 대위, 강민철 대위였다. 3 명의 전투원은 폭발물을 가지고 아웅산 묘소에 잠입했다.

강민철과 신기철이 천장으로 올라가려는데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이들도 맨손으로 천장에 오를 수 없었다. 강민철이 아웅산 묘소 관리소장을 찾아갔다.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 경호원이라고 말하고 사다리를 빌렸다.

사다리 빌리는 대신 1만 차트를 주었다. 1983년 환율로 1만 차트는 한국 돈 1 백만 원 정도였다.

사다리 덕에 짧은 시간에 지붕에 폭발물 설치를 완료했다.

한편 아웅산 묘소 관리소장은 자신이 한국 경호원에게 사다리를 빌려주었고, 사다리 빌려준 대가로 1 만 차트를 받았다고 랑군 경찰에 신고를 했다.

사다리를 빌리는데 돈까지 주고 빌린 것이 수상히 여긴 랑군 경찰청 정보과장은 2 명의 형사를 대동하고 현지 순찰을 나왔다.

사다리를 다 사용한 후 강민철은 관리소장에게 사다리 잘 썼다고 영어로 ‘땡큐, 땡큐’ 하면서 사다리를 반납했다.

랑군 근처 야산에서 아버지 강민철은 군경 합동 추격조에 체포되었다.

체포되자 강민철은 처음 1 주 동안은 배운 대로 묵비권에 들어갔다.

버마 경찰은 묵비권 사용해도 좋다. 당신이 묵비권 행사하는 동안 우리도 물 이외의 음식제공을 거부한다고 했다.

일주일 굶고 나니 더 이상 묵비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한 톨의 음식이라도 먹으려면 말을 해야 했다.

아버지 강민철은 자백을 했다. 진영관 소좌는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다. 진영관 소좌는 사형이 구형되고 아버지 강민철은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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