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1994년 5월 4일 영변의 5 MWe 원자로에서 사용 후 연료봉 인을 했다. IAEA와 사전협의 없이 수천 개의 폐연료봉을 6월 15일까지 모두 꺼냈다. 폐연료봉 인출사태로 대화로 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없던 일이 되었다. 미국은 유엔안보리에서 제제와 군사적 대응 태세를 병행하였다. 영변 핵 시설에 대한 타격을 가하기 위한 작전계획 502X을 만들었다. 이 작전계획은 F-117 스텔스 전투기나 B-2 스텔스 폭격기를 투입해 2∼3일 단기간에 재처리 시설을 포함한 영변의 핵 단지를 폭격하는 것이었다.
주한미군 사령관 게리 럭(Gally Luck)은 미군을 포함한 수만 명의 인명피해와 1,000억 달러 예상되는 전쟁 비용을 보고하여 작전계획 5026의 실행을 막았다. 6월 초부터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결의안을 준비했다. 6월 15일에는 3단계로 구성된 대북 결의안 초안을 제시했다. 북한은 유엔안보리가 제재결의안을 채택하면 이것을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천명했다. 고도로 긴장된 분위기에서 결의안 초안을 제시했다. 전쟁 직전의 위기 상황에서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났다. 풍전등화 위기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카터 일행은 6월 15일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6월 16일 김일성과 카터의 회담에서 카터는 미국과 북한의 제3차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기 전까지 핵 개발 계획을 동결할 것과 IAEA 사찰단을 추방하지 말고 그대로 영변에 체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일성은 카터에게 미국이 경수로 지원에 협력할 것을 요청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전 한마디도 없이 김일성과 카터의 회담 성과는 전 세계 톱뉴스로 타전되었다. 김일성이 조건 없이 김영삼 대통령을 7월 25일 평양에서 만나겠다고 약속했다. 분단 이후 첫 정상회담이 예정되었다. 김일성은 김영삼 대통령과 평양에서의 역사적인 만남에 선물을 고심했다. 고심 끝에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에서 순도 높게 제련된 철강 5만 톤을 방북선물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줄 생각이었다. 묘향산 특각으로 김정일과 천리마 제강연합 기업소 책임자 이강선을 불렀다. 김일성이 철강 5만 톤을 남조선 김영삼 대통령이 평양에 오기 전에 해주항에 선적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빨치산 시절부터 거짓말을 모르고 직언을 하던 이강선이고 천리마제강 연합 기업소 명칭이 이강선의 이름을 넣어 <강선 제련소>로 불렸다.
“수령님, 불가능하옵니다.”
“아니, 조선에 철광석이 조사된 매장량이 얼마인데 5만 톤을 준비 못하나?”
다그치자 철광석은 산더미처럼 많으나 전기가 없어서 공장 가동을 못 한다고 보고했다.
그 말에 김일성이 충격을 받아 심근경색을 일으켰다. 헬기로 봉화진료소로 갔더라면 살렸을지 모른다. 그날 묘향산에 억수로 비가 내려 헬기를 이륙할 수가 없었다. 영생불멸할 것 같던 수령은 8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수령의 시신을 부패하지 않게 처리하여 금수산의사당에 영구 보존했다. 영생불멸의 수령을 그렇게라도 만들어야 김정일의 면이 섰던 것일까? 사망하기 2주 전에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회담이 있었다. 카터는 협상을 마친 후 워싱턴에 전화했다.
그 시간 백악관에서는 클린턴 대통령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당면 의제는 유엔안보리 제재 승인 문제와 한반도 주변에 미군 병력 증강 배치 문제였다.
카터의 전화가 오기 전에 클린턴은 유엔안보리 제재를 최종 승인했다. 병력 증강 배치 문제를 토론하던 중 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카터는 전화를 받은 갈루치(Gallucci. Robert)에게 김일성이 핵 개발 동결 조치에 동의했으며, IAEA 사찰단의 영변 체류도 허락했다는 것을 전달했다. 3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곧 재개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견해를 밝히며, 북한 측에 이에 대해 대응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다.
카터는 CNN 생방송으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겠다고 말했다. 갈루치(Gallucci. Robert) 보고를 받자, 클린턴 대통령과 회의 참석자들은 큰 충격과 혼란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CNN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진 카터의 메시지는 상황을 완전히 삼켜버렸다. 백악관 회의에서 불만이 나왔어도 카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논의 끝에 백악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개발 계획 동결에 대해 영변 5 MWe 원자로에 새로운 연료봉을 장입 해서는 안 되며, 이미 인출된 폐연료봉은 재처리하지 않을 것을 카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요구했다. 카터는 난색을 표명했어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이 제안을 즉시 수락했다. 17일 카터는 김일성을 다시 만났다.
한국전쟁 중 전사한 미군 유해 발굴 사업을 허용하는 것과 남·북 정상회담을 전제조건 없이 하겠다는 김일성 주석의 답변을 들었다.
남북은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을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김일성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7월 7일 밤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7월 8일 새벽 2시에 사망했다.
조선중앙 TV 이춘희 아나운서의 비장한 목소리가 김일성 서거 소식을 알렸다.
― 1994년 7월 8일 2시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급변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
이춘희 아나운서는 김일성 수령 살아생전 보통 남자 아나운서 열 명과도 바꿀 수 없다고 칭찬받던 그녀라 이날의 서거 소식을 알리는 방송은 더 침통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생할 것이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이신,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동지 질병과 사망 원인에 대한 의학적 결론서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 동지께서는 심장 혈관의 동맥경화 증으로 치료했었다. 겹 쌓이는 정신적 과로로 하여 1994년 7월 7일 심한 심근경색에 이어 심장쇼크가 합병되었다. 즉시, 모든 치료를 했으나 심장쇼크가 지속되어 1994년 7월 8일 2시에 사망하시었다. 1994년 7월 9일에 진행한 병리 해부 검사에서는 질병의 진단이 완전히 확정되었다. 1994년 7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동지의 국가장의위원회를 다음과 같이 구성한다.
장례위원 1번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직책은 생략하고 모두 동지로 호칭했다.
김정일 동지, 오진우 동지, 강성산 동지, 리종욱 동지, 최 광 동지, 계응태 동지, 전병호 동지, 한성룡 동지, 서윤석 동지, 김철만 동지, 최태복 동지, 최영림 동지, 홍성남 동지, 강희원 동지, 양형섭 동지, 홍석형 동지, 연형묵 동지, 리선실 동지, 김철수 동지, 김기남 동지, 김국태 동지, 황장엽 동지. 노동당서열 1번부터 200번까지 당, 정, 군의 고위 일군들의 호칭을 슬픔을 꾹꾹 눌러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모든 해외의 조문은 정중히 사양한다.
(이 하 생 략)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에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가 있었다. 군대 은어로 ‘개나리’ 부대라고 했다. 정식명칭 제3 야전 공병여단 예하 서부전선 땅굴 시추 부대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개나리 부대로 불렸다. 이유는 시추공을 굴착하는 작업을 땅이 얼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추부대는 김장철이라고 하는 11월 말이 되면 모든 야외 굴착을 금지하고 부대로 굴착기를 끌고 들어와 영내 교육을 하였다. 부대 위병소와 탄약고 경계근무만 하고 강당에서 정신교육을 하거나, 연병장에서 전투체육을 했다.
땅굴 시추 장비가 고가의 공병 장비라서 부대장은 공병 대령 중에서 장군 진급 심사 대상이 지난 대령이 맡았다. 실질적인 임무는 땅굴 탐지는 정보 및 작전업무라 정작 과장은 정보나 보병 중령으로 보직했다.
정작 과장 중령 아래 정보장교 대위와 작전장교가 보직되었다.
정보장교는 최재림 대위, 작전장교는 손석우 대위였다. 땅이 얼면 시추작업을 할 수 없기에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부대가 한가했다. 개나리가 노랗게 피는 봄이 되면 시추부대는 겨울잠에서 깨어나 활동했다.
1994년 7월 8일 개나리 부대에도 김일성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최재림 대위와 개나리 부대 수색 정찰조 20여 명은 작전지역 내 그날의 수색 정찰 시추공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날씨는 덥고 수색 정찰로는 한동안 다니지 않은 통로를 이용하라는 상급 부대 지침에 따라 이동하였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병사들도 많이 지쳤다. 서부전선 시추부대의 책임 구역은 좌측은 열쇠 전망대에서 우측은 산명호까지다. 개나리 부대가 수색 정찰하는 날은 협조 공문을 5사단과 6사단 양쪽 부대에 보냈다.
아침과 저녁은 개나리 부대에서 먹고 점심은 5사단이나 6사단 수색 정찰 중간 부대에서 먹어야 했다.
장병들 점심을 굶지 않게 하려면 급식명령서와 보급정지 서류를 해당 부대로 사전에 보내주어야 했다. 개나리 부대는 3개 소대로 편성되었다. 3개 소대가 돌아가면서 수색 정찰했다. 정보장교 최재림 대위와 작전장교 손석우 대위는 교대로 수색에 동행했다.
김일성이 사망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애도 기간을 정하고 조선중앙 TV를 통해 인민들이 통곡하는 모습을 매일 방영했다.
다른 나라서 봤을 때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하겠지만 스스로 북조선이라고 하듯이 조선시대 왕이 죽으면 붕어라고 온 백성이 땅을 치고 통곡하였듯 고종 붕어 시에 조선 백성들이 땅을 치고 통곡하듯 김일성 사망에 땅을 치고 통곡했다.
대한민국도 1979년 김재규 총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일부 노인들이 땅을 치고 통곡을 한 것을 보면 김일성 수령이나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자라고 욕을 먹어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개나리 부대 병사들이나 동반 수색 나가는 정보장교, 작전장교도 타성에 젖어 의무감으로 수색 정찰을 했다.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이 될 무렵 정보사령부에서 대외비로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에 공문이 왔다.
정보사령부 지하 벙커에서 비밀회의를 할 예정이니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장이 참석하라는 공문이었다. 참석 지시는 땅굴 시추부대장이었으나 공병 대령 이흥섭 시추부대장이 정보업무는 부대장보다 정작 과장 조성복 중령이 더 잘 안다고 대리 참석시켰다.
참석자는 정보 사령관 육군 소장 조필원, 정보처장 해군 대령 정율화, 정보 분석 과장 공군 중령 최영훈, 정보 분석 장교 육군 소령 안춘호,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 정작 과장 조성복 등이었다.
비밀 회의실에는 대형 태극기가 정면에 걸려있고, 태극기 우측으로 김영삼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었다. 태극기 좌측으로는 역대 정보 사령관 사진이 모서리를 지나 길게 걸렸다. 회의 참석자들이 모두 도착하자 오늘의 발표자 수집 처장 김홍기 대령이 앞에 나와 정보 사령관에게 회의 시작 보고를 했다.
“충성! 수집 처장입니다. 발표하겠습니다.”
김 대령의 발표는 전방 지역 동·서부전선에 6,000 여 개의 시추공을 이용하여 북한의 핵실험을 탐지하는 암호명 ‘인프라 사운드(Infra-Sound)'를 만들고 동부 전선은 제1 야전공병 여단 예하 제1땅굴 시추부대가 서부전선은 제3 야전 공병여단 예하 제3 땅굴 시추부대에 수집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이었다. 탐지는 주 2-3회 부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주간 정찰 보고는 매주 금요일 전령이 직접 정보사령부 수집처로 제출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충성!”
김 대령의 발표가 끝나고 자유토론을 하였다. 먼저 정보 사령관이 말문을 열었다.
“수집처장 발표 잘 들었습니다. 참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만 과연 함경북도 길주군 첩첩산중에 지하 갱도를 내려가 실험하는 것이 우리의 땅굴 발견을 위해 만든 시추공에 얼마나 탐지될지 의문이 듭니다.”
“예, 사령관님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입니다. 지진이 나기 전에 개미나 물고기들이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을 보고 과학자들이 연구 결과 사람은 20Hz 이하의 저주파를 들을 수 없어도 개미는 30Hz 아하 저주파에 반응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지진 같은 자연재해가 발생하면 굉음도 나지만 그전에 미세한 진동이 지진 전과 후에 상당한 기간 남아있다는 것이 지질학자들의 연구 결과입니다.
인프라 사운드는 자연 지진과 쓰나미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민간지질연구기관입니다만 미국 국방성이 세계 핵 개발이 의심은 되지만 물증이 없는 것을 탐지하고자 민간 연구 기관에 일정한 사용료를 내고 데이터만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핵 위협이 의심을 가지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발표가 얼마만큼 진실이고 얼마만큼 이 거짓인지를 알 수 없기에 이런 방법을 동원한 것입니다.
미군이 하늘에 정찰기와 인공위성으로 하루 10회 이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영공을 촬영합니다만 지하의 시설물과 장비는 촬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정보를 투입하자니 미군은 특수부대 요원을 투입하자니 외모부터 바로 주민에게 들킬 것이고, 대한민국 특수부대는 정치적으로 7.4 남북공동성명에 상호 간첩행위를 할 수 없게 되어 특수부대를 파견 못하고 있습니다.”
“정보처장 정일성 대령입니다. 그럼 동부 전선과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에서는 20Hz 이하의 저주파를 탐지할 수 있습니까?”
“탐지할 수 있다고 확정적인 말씀은 못 드리고, 일단 시추공에 저주파를 탐지할 수 있는 미국에서 공수해 온 신호 발생 장치를 부착하고 자연 지진이든 인공지진이든 탐지를 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정보 분석 장교 안춘호 소령입니다. 수집된 저주파 분석은 누가 합니까?”
누가 해? 질문한 안춘호 소령이 직책이 정보 분석 장교니까 당신이 해야지? 하는 사령관 말씀에 참석자 모두가 웃었다. 수집 처장이 답변했다.
“그 분석은 안춘호 소령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2개월 동안은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소에서 지진연구로 일본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신 강영수 박사가 정보 분석실의 육. 해. 공 정보 분석 장교들을 대상으로 지진과 저주파 저주파에 대한 특강을 할 예정입니다. 그때 사령관님과 오늘 이 회의에 참석하신 분들을 강 박사님 모시고 지진과 핵실험으로 탐지되는 원리에 대한 교육은 별도 시간을 마련하겠습니다.”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 정작 과장입니다. 인프라 사운드는 정보사령부가 종결입니까?”
“아닙니다. 미군은 미 501 정보여단의 한국 파견관이 주 1회 서부전선 시추부대와 동부 전선 시추부대를 격주로 방문할 것입니다. 정보사령부의 인프라 사운드 정보 분석 보고는 정보본부를 경유 한미연합사령부 정보융합실로 보고되고 정보사령부에서 국가정보원으로도 보고할 것입니다.
“기대되는군요.”
“예, 더 이상 질문이 없으면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충성!”
미국은 김일성 사망 이후 KH-9와 KH-11을 교대로 500킬로미터 상공에서 하루 2회 영공을 촬영하던 것을 4회로 늘려 총 8회 촬영했다. 오산 공군 기지에서 이륙한 U-2 전략 정찰기는 휴전선 북방 24킬로미터 상공을 동세서 서러 서에서 동으로 비행하면서 휴전선 근접 군사 시설물과 지상군 무기의 이동 여부를 촬영했다. 일본 오키나와 기지 격납고에서 미끄러지듯 나온 RC-135 정찰기는 대한해협을 건너 독도 상공을 우회하여 휴전선을 연하여 횡단 정찰을 하고, 중간 급유가 필요할 대만 오산 기지에 착륙해 연료 보충 후 다시 이륙했다.
RC-135는 영상 촬영뿐만 아니라 북한의 다양한 종류의 통신장비 신호정보를 수집해 한미합동으로 암호해독을 해서 그날그날 훈련정보를 수집했다.
서쪽 백령도에서 휴전선 남방으로 주요 고지마다 설치된 고성능 안테나에 수신된 감청 정보는 777(쓰리세븐) 부대의 전문 판독분석관에 의해 정보보고서로 전환되었다.
최재림 대위는 퇴근하여 장교 숙소에 군복도 벗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동기들은 2년 전에 전역해 사회로 나갔는데 대학 시절 육군 장학금을 받은 것 때문에 5년 차 복무 중이라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서 벽지 무늬를 보다가 눈을 감았다. 대학 3, 4학년 시절 군사훈련부터 소위 중위 시절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장교 숙소 관리병이 방문을 노크했다.
“충성! 관리병 일병 이흔정입니다!”
“무슨 일이야?”
“개나리부대장 당번병 전화를 받았습니다. 최 대위님을 부대장님이 찾으신다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위병소로 오시랍니다.”
“알았다.”
최 대위는 신속히 사복을 입고 위병소로 향했다. 빠른 걸음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 시간에 부대장님이 찾는 것은 저녁 식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위병소 옆에 서서 기다리자 개나리 부대 3727부대 1호 지프가 그 앞에 정차했다. 경례하고 차량 뒷좌석에 탔다.
“최 대위 많이 기다렸나?”
“아닙니다.”
“사실 아침에 말하려다가 다들 퇴근한 후에 부른 것은 부대 내 육사, 3사, 학사, 간부후보생 출신 장교들이 있는 상태서 최 대위만 지명해서 식사한다고 하면 R. O. T. C만 편애한다는 소리 할까 봐 지금 연락했는데 다른 선약을 깬 건 아니지?”
“네.”
차량은 신탄리역을 지나 백마고지 근처의 백마 순두부로 향했다. 이 집은 철원에서 소문난 집으로 예약 없이 갔다가는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이 대령이 예약했기에 안방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운전병은 식사를 마치고 부대에 들어가 있다가 연락하면 나오라고 했다. 이 대령과 최 대위 단둘이 순두부 전골을 사이에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최 대위, 동기와 후배들이 전역하고 혼자 남은 기분이 어때?”
“출근하기 싫었는데, 내 월급 받는 만큼만 한다고 생각하니 편합니다.”
“월급만큼 일해서 되겠어? 최소한 3배는 해야지 조직이 유지되지?”
“단장님은 어디서 동기생들 전역하고 장기로 남으셨습니까?”
“양구에 있는 공병 대대였는데, 대대장이 나를 소대장 10개월만 시키고 바로 군수장교로 보직을 부여해서 동기생들 전역 날도 야근했다.”
“단장님 위관 장교 시절에는 장기 복무나 복무 연장이 몇 명이나 되었습니까?”
“장기 복무는 20명 복무 연장이 150명 총 170명이었지.”
“예, 그러셨군요. 저희는 복무 연장과 장기복무자 합하면 600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남은 인원에 비해 진급이 안 되니 문제야?”
“예, 육사가 워낙 많은 인원 진급하고 남은 자리를 3사 학사 학군 경쟁하고 있으니 큰 문제입니다.”
“최 대위 장기 안 하길 잘했다. 그 머리 그 성실함이면 사회에서 성공한다.”
“예, 전역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하니, 좋은 아이디어 내서 사업을 하거라.”
“예.”
“야, 어서 먹고 마시자 음식 앞에 두고 서론이 너무 길었다. 최 대위 건강과 사회 나가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단장과 술을 마시고 일어나기 전에 단장이 최 대위에게 휴가를 다녀오라고 했다.
단장 배려로 5일간의 특별휴가를 얻어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최 대위 고향 집을 방문했다. 도착하자 집안은 난리였다. 그는 3남 2녀의 장남이었다. 장남이라서 할아버지 아버지는 그가 군대 생활 5년을 한다는 것이 못마땅했으나, 시골에서 소를 팔아 자식들 대학 공부를 시켜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하는데, 소를 팔고 밭을 팔아 3남 2녀를 모두 대학까지 마쳤다.
그가 3수를 해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둘째 여동생도 대학생이라 한집에 대학생이 3명이 되었다. 횡성에서 부자라고 소문난 최 씨네지만 한꺼번에 대학생 3명의 등록금을 내는 것이 벅찼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육군 장학생이 되었다. 즉 남들은 2년 3개월에 전역하는 것을 5년 3개월 복무자가 되었다.
예고 없는 휴가에 할아버지 최재석 노인은 손자를 데리고 횡성에 유명한 한우 음식점과 막국수 집을 데리고 다니면서 손자가 휴가 나왔고 대위라는 것을 자랑했다.
부곡에서 중산서당(中山書堂)을 만들어 한문을 가르치는 나군식 훈장에게 연락했다. 나 훈장과 최재석은 어린 시절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먼 훗날 손자 손녀가 생가면 서로 가약을 맺어 사돈이 되자고 했던 일이 생각나서 손자가 휴가 왔을 때, 맞선을 본 것이다.
강림에서 최재석 노인과 최 대위는 횡성 읍내 ‘초우’ 다방에서 기다렸다. 잠시 후 나 훈장과 손녀 나미정(羅美貞)이 들어왔다. 다방 아가씨가 다가와 주문받았다. 두 노인은 쌍화차를 젊은 남녀는 커피를 주문했다. 차가 나오자 노인들을 뜨거운 쌍화차를 급하게 마시더니 횡성노인정에 바둑을 두러 간다고 하고 젊은 남녀에게 저녁때 강림, 부곡 들어가는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자고 했다. 노인들이 나가고 최재림과 미정은 대화했다.
“재림 오빠, 오빠는 저를 모르시겠지만 저는 오빠를 잘 알알요.”
“어떻게 알아요?”
“오빠 동생 수정이가 동창이에요, 그것도 강림중학교, 원주여자고등학교 6년 동창이거든요, 그래서 오빠가 서울로 전학을 갔고 공부도 잘했는데, 운이 없어 3수를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사관학교에 합격했는데, 큰 아버님이 의용군에 입대해 연좌로 3차 불합격처리 된 것도 알고요.”
“이거 너무 불공정한 만남 아니야? 난 미정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차차 알아 가면 되죠?”
“나는 군인이라 내일이라도 전쟁 터지면 못 볼 수도 있는데, 상관없어요?”
“우리 할아버지 자주 하시는 말이 인명재천(人名在天)이거든요.”
“미정 양, 우리 답답한 다방에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갑시다.”
“예.”
다방 밖으로 나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미정이 재림 팔에 팔짱을 끼었다. 수정이와 중학교 고등학교 6년 다니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종알종알 떠들었다. 그러다 미정이 앞니가 두 개 다른 이와 색깔이 다른 것을 보았다. 재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할아버지가 이미 손주며느리로 점찍은 여자를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절할 명분 앞니 두 개가 색이 다른 것을 이유로 거절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고 이야기도 술술 잘 나왔다.
“미정아, 수정이 친구니까 말 놓아도 되지?”
“그럼요, 오빠!”
“너 금붕어 아이큐가 얼마인지 알아?”
“글쎄요, 한 10?”
“I.Q 1이 직진이거든, 아이큐 2가 후진이야? 만약에 물고기가 아이큐 2만 넘었으면 김영삼 대통령 아버지 김홍조 옹부터 사조참치, 동원참치 전 세계 바다에 나가 물고기 그물로 하는 사업자들은 전부 거지되었다.”
“왜요?”
“생각해 봐? 물고기들이 지능이 높으면 그물에 걸리더라도 유선형 몸이라 뒤로 후진하면 그물에서 빠져나가는데, 그물에 걸려도 계속 직진을 하니 물고기 몸이 그물에 꽉 껴서 잡히는 거야.”
“하하하”
미정은 허리가 구부러지게 웃었다. 오후에 강림, 부곡을 들어가는 버스가 오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노인과 두 젊은 남녀는 버스를 타고 강림, 부곡으로 들어왔다.
월동준비를 마친 개나리부대장 이 대령은 지휘통제실에 서부전선 시추부대 중사 이상의 간부를 소집 브레인스토밍을 했다.
먼저 부대장 이 대령이 말문을 열었다.
“오늘 이렇게 서부전선 시추부대 중사 이상 간부를 모이게 한 것은 월동준비만 하면 내년 봄 개나리가 필 때까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위병소와 탄약고 경계근무만 서고 세월을 보내는데, 좀 더 활기찬 병영생활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모으려 하니 허심탄회하게 생각나는 대로 토론하기를 바랍니다.”
부대장의 모두 발언이 끝나자 작전장교가 의견을 말했다.
“작전장교 손 대윕니다. 저는 부대에 전 장병을 대상으로 동계기간 독서 감상문을 모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인데. 책은 어떻게 확보해?”
“예, 철원군청과 연천군청에 협조하여 이동도서관을 부대에 운영해 달라고 하거나 부대원 신분증을 회수하여 희망 도서를 사전에 받아 대표로 간부가 차량 배차하여 도서관 출장업무를 다녀오면 가능하겠습니다.”
“그래, 좋은 생각이다. 다른 의견 있는 사람?”
“예, 정보장교 최 대윕니다. 부대가 겨울철에 새롭게 시추공을 뚫는 일은 할 수 없지만, 이미 천공한 시추공에 대하여 뭔가 지하 미상 음이나 미세한 지진파를 탐지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한다면 동계 부대 활동을 역동적으로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 역시 정보장교답다. 정작 과장은 공문 만들어 정보사령부에 보낼 준비 해봐. 서부전선 시추부대가 굴착된 시추공에 정부사령부가 예산이 있다면 지하 미세한 음파나 지진파를 탐지하거나 수집할 장치를 설치해 주면 우리가 부대정찰 보고를 올리겠다고 해봐. 정보사령부도 좋아할 거야”
“예, 알겠습니다.”
“1995년 11월 15일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장 이흥섭 대령의 명의로 공문 한 장이 정보 사령관 조 소장에게 전달되었다. 문서는 대외비 문건이었다.
(대외비)
수 신 : 정보사령관
참 조 : 정보처장/수집처장
제 목 : 서부전선 시추공을 이용한 지하 소리 청취 시스템 설치 건의
1. 개요(시추부대 동절기 부대 운영 실태)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는 땅굴 발견을 위한 시추를 하지만 11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는 땅이 동결된 관계로 영외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2. 개선 방안
굴착된 시추공에 지하의 미세한 음이나 지진 파동을 탐지하거나 수집이 가능한 장치를 한다면 주기적인 수색 정찰로 지하의 미세한 지진 파동이나 저주파 탐지로 북한의 지하 핵실험이나 자연적인 지진을 조기에 탐지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건의 사항
정보사령부 정보예산 중에 199X 회계연도 미사용 예산이 있다면 미상 지하 소리 지진파 청취 시스템(가칭)을 서부전선 시추부대에 시험적 설치 운영할 것을 건의합니다.
1995. 11. 15.
서부전선 시추부대장 공병 대령 이 흥 섭 (서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