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로 인해 최 주사는 연구소 내 핵 추적에 대한 집념이 강한 군무원의 인상을 확실하게 남겼다. 아울러 정보사령부의 과거 자료를 수집했던 서부전선 땅굴 시추부대나 동부 전선 땅굴 시추부대나 공병감으로부터 거의 해체 일정만 기다리던 애물단지 부대라는 것을 언급하자 국방과학연구소장과 각부장 들은 바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여 시추부대 해체를 막고 오히려 예산 배정을 더 많이 하여 과거 그가 현역 시절 수집하던 ‘인프라 사운드’를 확대하도록 건의했다.
국방과학연구소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정보사령부와 국가정보원에 북한 핵 탐지 및 지진파 탐지업무가 활성화되었다. 정보사령부에 협조공문을 국방과학연구소장 명의로 동부전선, 서부전선 땅굴시추부대에 지하 저음 수집 장비 ‘인프라 사운드’ 집음 시스템을 갖추도록 했다. 그 자료는 정보사령부와 국방과학연구소 한국 지질자원연구소 3개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이 공유하도록 했다.
하나원에 입소했던 오득남과 박은경, 오혜령은 소정의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발행하는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었다. 은행거래를 위한 통장도 개설했다. 휴대폰도 국정원서 임시로 대여해 준 전화를 반납하고 자기 명의로 후불 요금제 휴대폰을 준비했다.
오득남, 박은경은 각기 남녀 하나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원의 선생님들에게 배운 것도 많지만 탈북자끼리의 다른 사람들의 경험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오득남 박은경은 북한에서 고생 많이 했지만 자신들보다 더 고생을 많이 하고 두만강을 건너 한국에 오기까지 험난한 과정의 이야기는 말하는 이는 물론 듣는 사람까지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본인은 설움에 복받쳐 울고. 듣는 사람은 자신의 과거 힘든 기억이 떠올라 울게 만들었다.
오득남, 박은경, 오혜령 3 명은 일가족이 탈북을 하여 통일부에서 새터민 정착을 위해 임대아파트 배정하는 것에 서울 금천구 벽산 아파트 단지 6단지 602 동 1602 호를 배정받았다. 16 층이라 멀리 안양천이 보였다.
하나원에서 가르치는 국가정보원 소속의 선생님들도 먼저 탈북을 하여 한국에 정착한 선배 탈북자들도 똑같이 하는 말이 빨리 북한 억양 어투를 버리고 억양이 별로 없는 서울말을 익히라고 했다. 북한 억양이 살아 있으면 학교나 회사에서 차별당하고 따돌림받을 수 있으니까 서울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북한에서 40 년 이상을 살아온 사람이 북한 억양을 버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원의 교육 한 두 달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승 득남과 아내 박 은경은 집에서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보면서 서울말을 익혔다. 오혜령은 나이가 12 살이라 고민이 되었다. 북한에서 남한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를 마쳤기 때문에 중학교에 입학시켜야 했지만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혜령, 너 학교에 편입학할래? 아니면 학원 공부해서 검정고시 볼래?”
“학교.”
“학교면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 6 학년.”
“왜?”
“하나원 있을 때 우리 청소년 담당 선생님이 남조선은 출신학교, 출신 집안, 아는 인맥 없으면 살 수 없는 나라래.”
“중학교 바로 들어가면 출신 초등학교 없어서 왕따 당하니, 일단 초등학교 6 학년에 가서 공부하고 중학교 올라가면 중학교서 왕따 당할 일이 없어.”
“초등 6학년에서 왕따 당하면?”
“선생님이 그러는데, 나이가 어릴수록 왕따가 덜하고 학년이 높아질수록 왕따가 심하다고 했어. 제일 심한 것이 대학이고, 그다음 고등학교, 중학교 순이고 초등학교가 그래도 왕따가 덜하다고 했어.”
오혜령이 하나원에서 있을 때, 어린 학생 17세 이하 청소년을 지도한 선생이 황 가영 선생이다. 황 선생은 올해 나이 28세로 그녀는 20세에 북한 두만강을 건너 중개인을 통해 남한에 왔다고 했다. 북한에서 그녀는 여군 군악대 악대 지휘자였다. 어려서 피아노와 25현 가야금을 배웠으나 군대서는 주로 타악기와 금관악기 위주로 악대가 편성되어 특별히 그녀에게 맡길 악기가 없어 고민하던 군악대장이 167cm의 훤칠한 키에 상체보다 하체가 긴 조선족 후손이라기보다 서구적으로 생긴 황가영이 군악대 고적대 지휘자를 시키면 키 작고 통통한 자신보다 멋있겠다고 생각해 커다란 군악대 지휘봉을 황가영에게 맡겼다고 한다. 거리를 행진하고 방향을 바꿀 때 호각을 불어 전체 대원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주지시켰다.
황가영은 아버지 황철성과 어머니 이미정이 이혼했다. 아버지는 요업공장의 작업반장이었다. 요업 기업소에서 한 여인과 눈이 맞아 어머니와 이혼을 했다. 부모가 이혼을 하면 자식들은 어머니나 아버지 재판소에서 정해주는 곳을 따라가야 했다. 황가연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따라가지 않고 군대를 지원했다. 참대 밭에 숙이 나도 참대같이 곧게 자란다는 말이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반듯하게 각지게 행동했다. 군대는 사회보다는 식량 사정이 좋았지만, 그녀가 군대를 제대할 무렵에는 군대도 배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황해도 역시 홍수로 인해 살기 힘들어졌다. 공장 기계들과 사무 비품이 물에 잠겨버려 공업도시였던 탄광 주변이 흉물이 되었다. 홍수가 공장을 할퀴고 지나간 뒤 전염병이 돌았다. 인근 농촌에 소출이 제대로 나지 않아 식량 사정도 최악이 되었다. 보름에 한 번 식량권을 배급주던 것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변경되었다. 그래도 배급에 쌀과 잡곡이 3 대 7의 비율로 나왔다. 그도 얼마못가서 식량 배급표를 받아도 나누어 줄 양곡이 없어 식량표가 휴지 조각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거리가 없어서 죽을 겨우 끓여 먹으면 다음 먹을 것이 없어서 암담했다. 살과 옥수수를 주던 배급도 몇 달 후 콩으로 변경되었다. 하루 세끼를 콩죽으로 먹는 것도 감지덕지했다. 한 뙈기 당이라도 일궈 먹을거리를 만들어야 했다. 물, 전기, 비누, 기타 생활용품 모든 것이 부족했다. 동네 공용 수돗물을 길어오는 것도 전쟁이었다. 온 동네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 의존했다. 겨울 영하 20 도까지 내려가고, 칼바람 부는 날은 온몸을 중무장하고 물을 길어야 했다. 물통을 머리에 이고 다른 물통이나 빨랫감을 다른 통에 담아 들고 나섰다. 전기가 없으니 등잔불을 사용했다. 산과 들에 꽃이 피는 봄이 인민들에게는 아름다운 계절이 아니고, 먹을 것이 없어 잔인한 계절이었다. 보릿고개, 조선 인민 전체에게 배고픈 시기였다. 배급에만 의존하며 살던 인민들은 손 놓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겨우 소금만 넣은 다 풀어진 수제비를 한 그릇이라도 먹이고 뒤돌아서면 다음 끼니를 걱정해야 했다. 굶어 죽었다는 동네 사람들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일가족이 배고픔을 못 이겨 집단 자살을 결행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처음에는 소문으로 긴가 민가 했으나 죽음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자 불안에 떨게 되었다.
먹을 것이 없다 보니 온몸이 울긋불긋한 독개구리를 잡아먹은 집도 생겼다. 생각보다 맛이 있어 보였던 독개구리를 먹은 일가족 4명은 얼굴이 부어오르더니,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온 식구는 사흘 후에 죽었다.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인민들은 얼굴이 늘 푸석푸석했다. 머리카락이 삼단처럼 많던 이들도 아침에 일어나면 베개에 머리카락이 시커멓게 빠져있었다. 소금 섭취도 부족해 눈동자가 뻣뻣했다. 좌우를 돌아볼 때면 고개까지 돌려야 했다. 물도 없고 비누도 없어서 더러워진 옷과 이불에 이가 득실거렸다. 게걸 병에 걸린 어린이들은 하루 종일 먹을 것을 더 올리며 배고프다고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며칠을 굶은 어린이는 다리가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었다.
인민들은 더 이상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믿을 수 없었다. 자력갱생,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나섰다. 자본주의, 천박한 자본주의 표상이라고 무시하던 시장을 장마당이라는 이름으로 묵인해야 했다. 배급으로 조달 못하는 물품을 미약하나마 장마당이 최악의 상태를 면하는 도구가 되었다.
자존심만 세우고 무능해서 돈을 못 벌고, 동냥도 못 하는 남편을 대신해 여자들이 장마당에 스스로 나가 생계를 책임지는 집이 늘었다. 네 가족 먹을 식량이 없어 집단 농장의 송아지를 훔쳐 산에 가서 일부는 바로 먹고, 일부는 각을 떠서 장마당에 나가 팔다가 발각되어 교화소로 잡혀가기도 했다. 교화소에 끌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한 상태에서 노동 단련을 하다 보니 처지게 마련이었다. 계호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개패 듯이 때렸다. 그 자리에서 죽었다. 교화소 밖 공동묘지에 묻으면 그만이었다.
200X 년, 노동신문과 조선중앙 TV 뉴스를 통해 ‘고난의 행군’이 이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끝났다고 발표했지만 믿는 인민은 없었다.
황가영은 군대서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북한에서 남한으로 탈출을 도와주는 중개인에게 300만 원을 주고 탈북했다. 두만강 주변의 가장 큰 중개인 집단인 이민준이 속한 ‘벼락바위’에게 돈을 주고 두만강 건너 몽고를 지나고 동남아시아를 돌아 미얀마와 필리핀을 경유 대한민국에 왔다. 탈북만이 살길이라고 북한에 부모가 이혼한 마당에 정 붙일 곳이 없다고 이판사판으로 탈북하였다. 목숨 걸고 도망을 쳤다.
그런 그녀가 남한에서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는 중에 어린 시절을 심문 과정에서 털어놓았다.
황해도가 큰 물 피해로 흉년이 들던 해에 토대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굶어 죽기도 하고, 어린애들은 ‘꽃제비’가 되었다. 남루한 옷에 얼굴에는 땟국물이 줄줄 흐르고, 머리카락엔 이가 슬슬 기어 다니는 꽃제비들은 평양을 제외한 전 지역에 있었다. 열 살 내외의 아이들도 있고, 제법 예뻐 보이는 여자 아이들도 많았다. 여자 아이들은 장마당에 호객꾼을 하거나 몸을 팔거나 남의 물건을 훔쳐 되팔았다. 그렇게라도 지탱하지 못한 아이들은 추운 겨울에 거리에 쓰러져 죽었다. 그녀도 고향에서 시체를 여러 번 보았다.
하나원 마치고 사회에 나와 검정고시로 한국의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서울에 있는 K 대학교 부동산 학과에 진학해 공부하고 부동산 중개 자격증을 취득하고, 평택에 부동산 사무실도 마련했다.
평택에 사무실 낸 이유는 미군기지가 용산 있던 것을 평택으로 이사를 했다. 부대 이동은 했으나 군인 간부들 숙소가 일부는 완공되었어도 아직 상당수가 공사 중이라 전세나 월세 수요가 많아질 것을 예측하고 평택에 사무실을 차렸다.
미군을 상대하느라 영어 잘하는 직원을 한 명 채용했다. 황가영의 예측은 적중해 서울의 경기 침체로 월세 내기도 힘든 서울의 많은 부동산 중개소와 달리 황가연의 사무소는 문정성시였다. 하나원에서 탈북한 사람 중에 수소문 결과 젊은 나이에 한국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하나원 선배로 선정되었다. 처음에는 한 기수에 4시간 선배와의 대화에 초청되어 질문 답변만 했는데, 이제는 하나원 남자, 여자 모두 10 시간씩 정규 교육과정에 편성되었다.
탈북 한 청소년들이 바라보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10 세에서 17세 사이의 탈북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어떻게 학교를 선택하고 공부하고 사회에 적응할 것인가를 주제로 10시간 강의했다.
교육 후 하나원의 수료자 평가에도 황 선생의 과목 평가는 항상 1등에서 3 등 안에 드는 명강사가 되었다. 강의 마지막 시간에는 여기 하나원을 수료하고 전국 어디에 살 곳을 배정받아 살든지 살면서 판단하기 곤란한 일을 만나면 전화하라고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다. 전화번호 010-2385- XXX6을 칠판에 쓰고 그녀의 강의는 마쳤다. 오혜령은 황가영 선생의 그 마지막 수업을 기억하고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저 하나원 19X 기 오혜령이에요!”
“그래, 혜령이 잘 지내지?”
“예, 그런데, 선생님이 하나원 나가서 판단하기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해서 전화드렸어요.”
“그래, 전화 잘했어. 무슨 일이야?”
“제가 학교를 가야 하는데, 엄마는 바로 중학교 가라고 하고 아버지는 학교 가면 북한 출신이라고 왕따를 당한다고 학원 공부해 검정고시 보라고 하는데, 저는 초등학교 6학년에 편입하겠다고 말했거든요.”
“그래, 엄마 말씀, 아빠 말씀 다 맞고, 난 검정고시 봐서 대학 갔거든, 혜령이는 왜 6학년 편입하려고 했어?”
“선생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남한은 출신학교 없으면 왕따라고.”
“그래, 잘 선택했어. 바로 중학 가면 1년 먼저 중학생이 되나 출신 초등학교 없어 왕따가 되든 6학년 편입해 졸업 후 중학교 가면 일 없어.”
“선생님, 그런데, 6학년 가서 탈북민 출신이라고 왕따 되면 학교 그만둬요?”
“아니야, 혜령이 수업 시간에 보니 계산 빠르던데, 북한에서도 수학 잘했지?”
“예.”
“그래, 남한 학생들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왕따를 시키는데, 수학 잘하면 왕따가 아니라 모셔가서 수학 좀 가르쳐달라고 대접받아.”
“정말로요?”
“그럼, 난 대학생 되어 처음 남한 학생들과 만났는데, 처음 북한 출신 탈북자라고 하니 왕따를 시켰는데, 내가 공부한 과가 부동산 학과거든 이거 아파트값, 평수를 제곱미터로 바꾸기 반대로 제곱미터를 평수로 바꾸기, 세금 아파트 금액이 6억 넘느냐 아니냐에 따라 세율 다르거든 그거 수학 못하는 사람 세금 계산하라면 머리 쥐 나겠지?”
“예.”
“내가 대학 1학년부터 4학년 졸업까지 계산 문제 시험은 교수 답안지가 필요 없는 거 황가영 답이 정답이다라고 소문났거든.”
“야, 최고다!”
“가연이 짱! 알아?”
“그럼요. 잘한다. 좋다. 최고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그래, 가연이도 초등 6학년에서 수학 짱! 되면 왕따 없어.”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가영이 북에서 인민학교 마치고 와서 여기 초등 수학은 수학도 아니야.”
“예,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래, 열심히 하고 또 전화해라.”
“예, 선생님 안녕히 계셔요.”
“응, 안녕!”
혜령이는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S 초등학교 6학년 2반에 편입되었다. 학기 초라 학급 반장 선거가 있었다. 5 학년 때 1반 출신이 12명으로 가장 많았고 3반 출신이 7명 1반 출신이 5명이고 편입한 혜령이까지 25명이었다. 선거 결과도 1 반 출신 오종우가 반장에 3반 출신 신혜민이 부반장에 당선되었다.
오득남은 하나원을 나와 여러 곳에 취직을 알아봤으나 탈북자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어렵게 취직한 곳이 ‘새로운 세포(New Cell)’라는 회사였다. 이름이 새로운 세포 일종의 건강 기능성 식품을 한 상자에 36만 8천 원에 팔았다. 처음은 그렇게 팔고 새로운 사람을 데리고 오면 후임자가 사가는 36만 8천 원 중에서 5만 원을 소개한 사람에게 추천수당이라고 지급했다. 그러다 보니 늘 새로운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것이 하나원 교육에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고 교육한 다단계 사업인 줄 승 득남은 ‘새로운 세포(New Cell)’ 회사대표가 검찰에 구속되고 뉴스에 나고서야 다단계인 줄 알았다.
오득남은 새로운 사람을 보충하기 위해 하나원 수료 일자만 되면 한 번은 양주 남자 하나원을 한 번은 안성 여자 하나원을 방문했다. ‘새로운 세포’ 회사대표가 구속되고 다단계 상층부 상당수도 같이 구속되었다. 오득남처럼 하급 조직원은 벌금 100만 원에 약식 기소되었다. 돈을 벌어 와도 시원치 않을 판에 벌금형 100만 원 고지서가 집으로 배달되자 박은경은 오득남을 구박했다. 은경은 금천구 새마을 식당에 아침 10시에 나가 밤 10시에 일을 마치는 주방 보조를 하면서 월 110만 원을 벌고 있었다. 정말 시급으로 치면 최저 임금도 못 미치는 급여지만 탈북자라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고 조선족도 수두룩한 데 써주는 사장이 고마울 뿐이다.
“아니, 하나원서 그렇게 다단계는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했는데, 갈 데가 없어 다단계를 갔소?”
“처음부터 다단계인 줄 알았으면 내가 갔겠어? 건강식품 판매회사라고 설명이나 들어보라고 해서 들었지?”
“그럼, 거기 갔다고 처음에 왜 나에게 말 안 했어요?”
오득남은 대답을 못했다.
“당신 북한에서 용접했었으니까 여기 남한에 용접하는 일꾼은 노임도 비싸게 준다고 해요. 가서 용접 일이나 해요.”
“노임 많이 받는 거는 용접 기능사 자격증 있는 사람이고 자격증 없으면 많이 못 번다.”
“그래도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나가요.”
“알았소.”
오득남은 아내 박은경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 알았다고 내일부터 시흥사거리 대우 인력에 나가 일한다고 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담배 한 개비 피우고 대우인력으로 나갔다. 안전화와 각반을 챙겨 작업복 가방에 넣고 터덜터덜 금빛공원을 지나 시흥사거리 대우인력 4 층 사무실에 도착했다.
이미 도착해서 대우인력 김채영 부장에게 신분증을 맡기고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김채영 부장이 오득남을 보더니 오늘 처음 왔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하니 신분증을 내라고 했다.
“오득남씨?”
“조선족입니까?”
“아니요, 탈북해 한국 국적 취득한 한국 사람입니다.”
“예, 새터민?”
“그렇소, 그럼 여기 한국 분들은 헌터민이요?”
오득남의 그 말에 대우인력 새벽에 나온 사람들이 다 웃었다.
“새터민은 있는데 헌터민이란 말은 없어요.”
“그냥 탈북자라고 하지 뭐 쓸데없이 ‘새터민’이라고 말을 만들어 듣는 사람 더 헷갈리게 만드는 게 남조선 정부요.”
“정부에서 한 것을 우리가 뭐 할 말이 있나요?”
“남이나 북이나 통일되면 말을 정부가 건드리는 것이 문제요. 그냥 인민 대중들이 쓰는 말 내버려 두어야 하는데 정부가 좋은 말이라고 만드는 것이 더 개악을 한단 말이오.”
“그런 말을 왜 여기서 해요? 국가정보원 신문받을 때나 하나원 교육받을 때 했어야지?”
“그러게 말입니다. 왜 그때는 그런 생각이 안 났는지.”
“그 때야 뭐 생각이 있었겠어요? 목숨 걸고 도망 와서 북송될까 그 걱정이지?”
“득남씨 북에서 어떤 일 해봤어요?”
“예, 용접해 봤습니다.”
“남한에 와서 용접 자격증 취득했어요?”
“아닙니다.”
“그럼, 당분간은 잡부로 보낼 테니 잡부 일 하고 용접일 들어오면 그때 용접공으로 일하고 오늘은 정리로 보냅니다.”
“예, 알겠습니다.”
“시간 되면 서점에 가서 용접 기능사 준비서적 사서 공부해 용접 기능사 시험 일정에 맞게 원서 내고 시험 보기 바랍니다. 같은 용접 일을 해도 자격증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차이는 커요.”
“예, 알겠습니다.”
김채영 부장은 대우인력 정리팀장 중에 조건진 팀장을 소개했다. 조건진 팀장은 스타렉스 승합차에 인부 11명을 태우고 김포 한강 신도시 공사 현장 한신공영이 시행하는 아파트 공사장으로 갔다. 현장은 해체 기공들이 통으로 해체하여 슬라브 전체가 통으로 내려져 있었다. 정리 인부들은 합판은 합판끼리 나무는 나무끼리 철재는 철재끼리 분리하고 목수들이 다시 이용할 수 있게 다발로 쌓고 묶음까지 하는 일이었다. 조건진 팀장은 처음 나온 오득남을 차행선과 둘이 화목 쌓는 일을 시켰다. 쌓는 일은 베테랑 차 행선이 하고 득남은 리어카를 구해 다른 인부들이 정리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을 화목 다이에 보기 좋게 쌓는 일을 시켰다.
그야말로 태워 없애야 할 것을 리어카로 운반해 주었다. 점심 먹고 오후 일을 하자마자 득남이 못에 발이 찔렸다. 안전화를 명품은 아니지만 5만 원은 주고 사야 하는 것을 아내 박은경이 5만 원 준 것을 2만 원은 술을 마시고 3만 원짜리 싸구려를 샀더니 바로 후과가 나타난 것이다. 못이 안전화 옆구리를 뚫고 오득남 새끼발가락 위를 찔렀다.
“아야!”
“왜 그래?”
“발에 못이!”
“득남씨, 파상풍 주사 맞았어요?”
“아니요.”
조건진 팀장은 직영 반장에게 인부 한 명이 못에 찔려 파상풍 주사 맞으러 병원에 간다고 말하고 오득남을 데리고 김포 한강 의원에 갔다. 한강의원 원장이 승 득남 발을 살펴보고 발가락을 움직여 보라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신경 다치거나 뼈는 이상이 없다고 파상풍 주사만 맞으면 될 것이라고 했다. 오후 일은 병원 갔다 오니 오후 참을 먹은 후라 곧 끝이 났다.
김포 한강 신도시에서 일을 마치고 시흥사거리 대우인력에 오자 조건진 팀장이 일당 9만 원에서 10% 사무실서 공제하고 81,000원에서 차비 3,000원 제하고 78,000원을 일당으로 나누어 주었다. 승 득남은 일당으로 받은 78,000원을 아내에게 내밀었다.
“고생했어요.”
“말도 마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힘든 것도 힘들고 안 하던 일을 하다 보니 못에 발이 찔려 파상풍 주사까지 맞았다.”
“그거 비싸지요?”
“파상풍 주사, 비싸지 한 5 만 원 들었는데, 한신 공영에서 처리하였다.”
“다행이네요, 78,000원 받은 것에서 5만 원 파상풍 주사 비용 내면 당신 오늘 고생하고 28,000원 버는 건데.”
“정말 남조선 살기 힘들다.”
“그럼,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요?”
“아니, 그건 아닌데, 하나원서 선생님들이 한국서 적응하기 제대로 뿌리내려 정착하기 쉬운 일 아니라더니 정말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힘들어도 여기 온 이상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일해 딸 대학 보내고 시집보내고 잘 살아야지요.”
“잘못했어. 처음 탈북해서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중 한 곳으로 갔으면 여기보다 좋았을 것을.”
“이제 그런 말을 하면 뭘 해요? 다시 탈 남 해서 유럽으로 갈 것이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알았어요.”
“그런 잡생각 말고 용접 공부해서 용접 자격증이나 취득해요.”
“알았소.”
오득남은 이렇게 일당으로 정리일이나 하면서 어느 세월에 용접공 시험에 합격할까? 아찔했다. 그렇다고 지은 죄가 있으니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최재림 주사가 국방과학 연구소에서 공론화시킨 ‘인프라 사운드’는 국가정보원까지 보고가 되어 정보사령부 예산이 크게 증액되었다. 서부전선 6,000개 동부 전선 4,000개의 시추공 중에서 동부 전선에 200개 서부전선에 300개 시추공에 고감도 지하 저음파 청취 및 집음장 치를 부착했다. 그 센서에서 발생하는 신호는 동부전선 춘천 부근에 있는 동부전선 땅굴시추부대 상황실 대형 컴퓨터에 접속되었다. 서부전선은 철원에 위치한 서부전선 땅굴시추부대에 자료가 모아졌다.
동서의 시추부대 정보장교와 작전장교 대위는 교대로 주간 수집사항을 정보사령부 수집 3과에 제출했다. ‘인프라 사운드 사업’의 확대로 정보사령부와 국방과학연구소는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동경 129도 10 분 북위 41.28에 1 kt 이상의 폭발력으로 추정되는 지하 핵실험을 탐지했다. 규모는 3.9였다.
북한의 조선중앙 TV에서 공식 발표하기 전에 이미 정보사령부와 국방과학연구소는 국가정보원에 위 내용을 통보했다. 대 성공이었다. 시추공이야 이미 70, 80 년대에 뚫어 놓은 시추공이고 500여 개의 센서 부착으로 미국이 인공위성사진으로 무인항공기로 일본 오키나와 기지에서 출격하는 정보 수집 비행기로 청취하고 알아내려 해도 비밀에 싸여있던 핵실험의 증거를 포착한 것이다. 정보사령부의 수집 분석 장교들과 국방과학연구소의 해당 부서 직원들은 특진의 영광이 있었다.
최 주사는 6 급 주사에서 5급 사무관으로 특진되었다. 사무관이 된 만큼 직급에 맞게 보직 이동이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는 특진했어도 그냥 국방과학연구소에 남게 해달라고 했으나 국방부 인사처에서 형평성에 위반된다고 무조건 직급에 맞게 보직 명령을 냈다.
최 사무관은 국방부 합동참모부 민사심리전부의 심리전 계획과로 명령이 났다. 민사심리전부장 육군 소장 문상옥에게 전입신고를 했다.
“충성! 신고합니다. 사무관 최재림은 200X 년 1월 2일부로 민사심리전부로 전입 및 보직을 명 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충성!”
최 사무관은 과거 장교 시절 소위부터 대위까지 군복을 입고 신고하는 것이 지겨워 전역 후에는 정말 신고하는 일은 없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나이 35세의 노총각 사무관은 신고했다.
민사심리전부는 과거에는 북한으로 보내는 전단도 만들고 대북 확성기 방송도 하고 전광판을 설치하여 전광판으로 알려주는 내용이 내일 눈 온다고 하면 눈이 오고, 비 온다고 하면 비가 오고, 정말 북한에서 조선중앙 TV 방송으로 알려주는 일기예보보다 남한의 전광판이 더 정확하던 시기에는 인기가 높았다.
태풍을 예고하면 어김없이 태풍이 쓰고 지나갔다.
대북 확성기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가요는 북한군 병사들의 가슴을 뛰게 했었다.
그러던 것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대중 대통령이 6.15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서로 비방하지 말고, 비방을 위해 설치했던 선전수단을 모두 철거하기로 해서 지금은 다 철거했다. 그러다 보니 민사심리전 자체가 필요 없어 장군자리 민사심리전부장이 없어질 위기에 몰렸다. 그때 최 사무관의 전임인 박상민 사무관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통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일을 민사심리전부에서 해보면 어떻겠느냐? 제안했다. 이 제안을 민사심리전부장 문상옥 소장이 합참의장에게 보고하고 국방부 장관까지 보고를 해서 민사심리전부가 국가정보원 심리전처와 통일부의 탈북주민 담당부서와 하나원, 정보사령부의 대성공사로 불리는 합동신문부서 등과 연계하여 탈북주민에 대한 정착과정을 점검하고 통일에 대비한 연구 과제를 선정하게 했다.
그 사업의 일환으로 매년 민사심리전부에서 전·후반기 새터민(탈북주민) 정착 세미나를 실시했다. 이 사업에 세미나 발표자는 K 대학교 통일 인문학 연구단의 김인석 교수, 국가정보원의 탈북자 담당 오현득 서기관, 민사심리전부의 홍우덕 서기관, 박상도 사무관, 하나원에서 여자 황가영 선생, 남자는 허원제 선생이 발표자로 선정되었다.
20년 동안 간첩 및 탈북자 신문을 담당하였던 신문 담당 서기관 김용태는 대성공 사는 자료를 외부에 발표할 수 없다고 해서 자료 없이 경험담 이야기만 30 분 배정했다. 발표 자료는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40 컷 이내로 했다.
최 사무관은 이 세미나의 총괄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전입 오기 전에 박상도 사무관이 하던 일을 박상도 사무관은 발표자가 되고 총괄업무를 후임에게 인계하였다. 정말 바쁜 날의 연속이었다. 각 기관과 부서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발표자 선정된 제목의 발표 자료를 먼저 받아서 발표 순서에 맞게 출력해 참석자 인원수에 맞게 제본해야 했다.
세미나 시간은 3시간으로 90분의 발표와 10분 휴식 80분의 토의가 진행되었다.
200X 년 4월 15일에 전반기 새터민 정착 관련 세미나를 하게 되었다. 발표 자료는 4월 10 일 이전에 보내달라고 공문을 보냈다. 제일 먼저 발표 자료를 제출한 사람은 여자 하나원의 황가영 선생이었다.
제목이 탈북 청소년의 한국 정착 실태와 문제점이었다. 황 선생을 본 순간 최 사무관은 심장이 터질 듯했다.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흰색 하이힐을 신고 서 있는 모습이 영화배우보다 더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최 사무관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제가 최재림입니다.”
“처음 뵙겠어요. 전반기 새터민 세미나 여자 하나원 발표자 황하나입니다. 발표자료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일찍 제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차피 제출할 거 빨리 제출해야 저도 다른 일 할 수 있고 맘도 편하지요.”
“황 선생님, 차는 커피와 녹차 두 가지 있는데 무슨 차로 드시겠습니까?‘
“커피, 블랙 있나요?”
“그럼요, 블랙 있지요.”
“사무실이 참 넓고 좋습니다.”
“예, 국방부 건물 신축하고 구관에서 신관으로 작년 12 월에 이사를 왔습니다.”
“민사심리전부가 과거 북한으로 전단 보내고 대북 확성기 방송하던 부서지요?”
“예, 전단도 보내고 물품 살포 작전이라고 라면, 쌀 1 kg 소형포장, 여자 화장품, 팬티, 스타킹등도 넣어서 바람에 띄워 보냈습니다.”
“제가 청진 근처에서 군대생활 할 때 우리 부대 안에 그 고무풍선이 통째로 떨어진 것입니다. 부대가 완전 난리난 적 있어요. 그 물건 만지면 독약이 들었다고 해서 쌀을 닭에게 먹이니 닭이 안 죽어요. 그래서 쌀 가져다가 밥 몰래 해 먹었어요.”
“아니, 황가영 선생 탈북자였어요?”
“예, 20세에 넘어와 지금 28세니 8년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원 선생이 되셨어요?”
“하나원 수료하고 사회에서 공인중개사 자격 따서 돈 열심히 벌고 있는데, 통일원 도우미 선생님이 면담을 하자 그러더군요. 갔더니 공문을 하나 보여주는 것입니다. 탈북자 새터민 중에서 한국 사회에 모범적으로 적응 잘한 사례를 찾아보고 하라고 각 지역별 한 명씩 하라는데, 천안 평택 지역에서는 제 이름 올린다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하나원 탈북자들 교육 마치기 직 전주에 선배와의 대화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모범사례로 선정되어 처음에는 2시간, 4시간 질의응답만 참석했는데, 다음 연도부터는 아예 8시간 반영하고 4시간은 강의 4 시간은 질의응답으로 진행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올해부터는 10시간으로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정말 황 선생이 입소한 탈북자들의 눈에 잘 적응한 선배로 보인 모양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에 감사하고, 국정원이나 대성공사 다 고마운 분들이고 제가 졸업한 K 대학교 부동산학과에도 감사할 뿐입니다.”
“발표할 자료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공문대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 39판으로 하고 표지까지 딱 40 장 만들었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자료 이상 없지요?”
“예, 정말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하게 잘 되었습니다. 4월 15 일 발표만 20 분 안에 끝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예,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민사심리전부 심리전계획과 사무실을 나서서 국방부 민원실 쪽으로 나가는 황 가연을 최 사무관은 넋을 놓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봄이라 초록빛 싱싱한 새싹처럼 연두색 바탕에 하얀색 물방울 물방울무늬 무늬가 사선으로 떨어지듯 한 원피스에 하얀색 하이힐을 신은 황가영의 모습은 완전히 영화배우 김하늘이 걸어가는 듯 경쾌하고 힘이 있었다.
전임자 박상민 사무관이 최 사무관을 불렀다.
“최 사무관?”
“예?”
“뭘 그리 넋 놓고 있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 아- 아닙니다.”
“어쭈구리 이제는 말까지 더듬어라?”
“아이 정말 왜 그러십니까?”
“내가 처음 그 황가영인가 하는 하나원 탈북자 선생 사무실 들어올 때부터 봤거든 최 사무관 완전 입이 귀에 걸리더라? 그 여자 완전 영화배우 같더군. 몸매가?”
“김하늘 보다 더 예쁘지요?”
“거봐 처음 본 여자 김하늘보다 예쁘다고 하는 거 보니 완전 눈이 멀었다.”
“예, 제가 보기에 확실히 김하늘 보다 예쁜 것 같습니다.”
“거봐, 완전히 노총각 사무관 탈북자 하나원 황 선생에 혼이 비정상 되었다. 야, 최재림 사무관 가을에 국방회관에서 국수 한 그릇 대접하는 거야?”
“에이 탈북 여자가 온 지 8년 되었는데, 결혼했거나 약속한 남자 있겠지요?”
“4월 15일 세미나 오면 물어봐.”
“에이 어떻게 실례되게 그런 걸 물어봐요?”
“그렇게 용기 없으면 너 정말 나이 40까지 노총각 신세 못 면한다.”
“악담을 하세요?”
“악담이 아니라 남자고 여자고 결혼 잘하려면 용기를 내야 해.”
“알았습니다. 그런데, 박 사무관님 우리 방에 왜 오신 겁니까?”
“원래, 전입 1개월에 업무보고 부장님께 드려야 하는데, 언제 보고 하라는 지시 없었지?”
“예.”
“다른 공문 결재받을 때 부장님께 여쭈어 봐.”
“예, 알겠습니다.”
5급 사무관에서 4급 서기관으로 승진할 자리를 알아보는 박상민 사무관이었다. 원래는 법과대학을 졸업해 사법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법시험에 1 차는 합격했으나 2 차 가서 3번 떨어지자 사법시험은 나의 길이 아니구나? 단념하고 7 급 군무원 공채가 있어 공고 보고 시험 응시해 한 번에 합격한 수재다.
7급에서 6급 6급에서 5급 사무관까지 한 번의 누락 없이 승진해 온 박 사무관이다. 이곳 민사심리전부는 4급 자리가 1개밖에 없는 부서라 정흥재 서기관이 서기관 된 지 얼마 안 되어 서기관 공석이 생기려면 몇 년 걸려야 했다.
정흥재 서기관이 3급 부이사관으로 승진해야 민사심리전 부에 4급 공석이 생긴다. 아니면 정보참모부나 작전참모부처럼 3,4급이 많은 부서에 가서 근무해야 4급 승진하기가 좋은데 민사심리전부장 문상옥 소장이 박상민 사무관을 자기 임기 끝나기 전에는 타 부서 전출에 동의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공직사회는 어디 가나 부서장의 욕심이 하급자의 승진을 막는다.
4월 15일이 되었다. 200X 년 민사심리전부의 연간사업 중에서 전반기 사업 중에서 주요 사업의 하나인 <2007년 전반기 새터민 정착 세미나>를 개최했다.
참석자는 국방회관 로비에서 참석자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자기 명찰과 회의록을 받았다. 세미나실은 붐볐다. 민사심리전부장 육군 소장 문상옥은 인사말을 했다.
전국 각지에서 바쁘신 가운데 200X 년 전반기 새터민 정착 세미나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린다고 했다. 순서에 따라 발표했다.
하나원 발표 차례가 되었다. 황가영 선생은 또박또박 하이힐 소리를 내며 단상으로 갔다.
“안녕하십니까? 하나원에서 청소년 교육 담당하는 황가영입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는 별 판만 보면 함성을 지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대를 방문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환호했는데, 여기 민사심리전부장 문상옥 소장님의 별 판 앞에서도 제가 떨지 않는 것을 보면 제가 탈북해서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물을 많이 먹은 모양입니다.
저는 하나원에서 탈북 청소년의 자아 찾기 프로그램 <나는 누구인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진행해 온 프로그램서 만난 청소년의 반응을 이 자리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청소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왕따입니다. 솔직히 왕따 현상은 우리 대한민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도 흑백 인종의 차별이 있고, 이미 초기 우리 한국인도 미국에서 흑인보다 더 못한 대우를 즉 차별을 극복하고 오늘의 이민자 집단을 만들고 한류 열풍을 발산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집단 따돌림 현상으로 왕따의 원격이지요? 집단 따돌림 왕따는 왕따를 시키는 주변의 청소년과 왕따를 당하는 ‘왕따 청소년’의 거리감이 문제입니다. 사실 다를 것이 별로 없는데, 태어나고 자란 장소의 다름을 우리와 틀렸다고 인식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만나 본 탈북 청소년 중에는 먹을 것이 없어도 북한에서는 그래도 다 같이 어렵지만 왕따 같은 일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탈북 학생 한 명을 남한 학교에서 잘 받아주지 못하는 나라가 무슨 통일을 말하고 통일 대박이라는 천박한 말을 유행시키나 하더군요.
탈북해 대학 진학 하자마자 왕따를 당할 뻔했는데, 제 자랑이지만 남한의 대학 신입생을 제가 수학 실력으로 눌러버렸습니다.
0 세에 탈북 국정원 조사 마치고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니 참 막막하더군요. 일단 마트에 가서 단순 노동 계산원을 하면서 시급 5 천 원 정도 받으며 일했습니다. 숙소 와서는 대학 가기 위한 공부를 했습니다.
북한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했지만 여기 내용과 다른 것이 많아서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 신입생 전형에 새터민 특별전형으로 수시에 응시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서강대 사회복지학과 건국대 부동산학과 3 곳 모두 합격통지서가 온 것입니다.
한 곳을 정해야 하는데 참 고민되더군요. 한국 사람들에게 물으면 한국은 무조건 학벌사회라고 서강 대학교를 추천했고, 국가정보원 선생님에게 물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중요한데, 노후 준비 잘하려면 부동산학과 가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직 결혼도 못한 처녀지만 언젠가 결혼하고 자식 낳아 살고 늙어 노후 준비에 부동산학과가 사회복지학과보다는 좋겠다고 생각해 부동산학과로 결정했습니다. 입학 오리엔테이션, 입학식, 과 야유회를 청평 유원지로 갔습니다.
자기소개를 하는데, 나는 탈북자다. 북한군 고사포부대에서 고사포 대신 여군 군악대 악대장 노릇하다 2000 년에 탈북했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더군요. 탈북자라고 밝히기 전에는 말도 걸고 농담도 했는데, 제가 탈북자를 밝히고 나니 말 걸어오는 학생이 없는 겁니다.
그런데, 중간고사 시험 문제에 계산 문제가 교수님이 작정하고 냈는지 정말 어려운 계산 문제가 나왔습니다. 시험에 전자계산기를 휴대하고 푸는 시험인데도 정말 시간 부족에 쩔쩔매는 시험 문제였어요. 수학하면 제가 함경북도 도 대표로 전국 수학경연대회 참석했거든요. 거기서 금, 은, 동에 들면 평양에 남아 수학 영재학교에서 공부하는데, 거기에 들지는 못했지만 수학은 정말 제가 잘했어요. 채점이 다 끝난 후 교수님이 수업 시간에 공개적으로 칭찬하시더군요.
내가 부동산학과 15 년 동안 교수하면서 계산 문제 이렇게 명쾌하게 답을 쓴 학생은 처음이라고 하면서 황 가연! 부르는 것입니다.
예! 하고 벌떡 일어났더니 모두 박수로 격려하라고 하셔서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로는 반에서 학생들이 계산 문제 모르는 것은 죄다 저에게 물어오는 겁니다. 왕따가 아니라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많이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제가 우리 학번 계산 문제 조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월 12 살 오혜령 학생이 상담할 일이 있다고 해서 약속 장소를 정하고 나가서 만났습니다. 혜령이 하는 말이 자기는 북한에서 인민학교를 마치고 왔는데, 여기서 아버지는 학교 가면 왕따 당하니 학원 공부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가라고 하시고, 어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하라고 하고, 저는 여기 6 학년에 편입해 초등학교 동창을 만들어놓고 중학교에 가면 초등 동창이 있으니 중학생 되어 왕따 당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했더니 부모님은 6 학년에 가서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할 거냐? 하시는데 조언 좀 해 달라 하는 것입니다.
혜령이 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생각을 했냐고 하고 나도 6 학년에 한 표! 했습니다. 팁으로 북에서 이미 인민학교를 마쳤으니 6 학년 편입하면 국어는 아무리 노력해도 여기 학생보다 잘할 수 없는데, 여기 학생들 어려워하는 수학을 네가 1 등 하면 왕따 사라지고 오히려 너와 친구 하려는 학생 많아진다고 저의 대학생 경험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금천구 시흥 초등학교에서 승 혜란이 수학 점수가 제일 높게 나왔고 선생님 말처럼 친구들이 수학 문제 풀다가 안 풀리면 모두 가지고 온다고 정말 왕따 없다고 자랑했습니다. 저와 혜란이는 아주 특별난 경우이고 그 반대의 왕따는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습니다.
국가에서 탈북자 대신 ‘새터민’ 단어까지 새롭게 만들어 국가적으로 탈북자에 대한 관심과 정책을 펴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국가적인 그런 지원도 옆에서 같이 살아가는 마을에서 학교에서 왕따를 해결하지 못하면 북한 이탈주민 정책은 공허한 정책이 될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으면 똑같은 국민이라는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 주는 것이 <새터민>이라는 단어 만드는 일 보다 더 앞서야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황하나 선생의 발표시간은 조는 사람 한 명 없이 진지하게 몰입되었다. 모두 큰 박수로 황 가연 선생의 발표에 호응했다. 참석자 중에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제1 부 주제 발표가 끝나자 10 분간의 휴식 시간이 부여되었다. 화장실 가는 사람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인사하는 사람 껐던 휴대폰 켜고 부재중 전화에 통화하는 사람 국방회관은 순식간 도깨비 시장이 되었다.
제2 부는 1 부 발표자들에 대한 일 대 일 지명 질문과 답변 사회자에 의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역시 가장 질문을 많이 받는 사람은 하나원의 허원제 선생과 황하나 선생이었다. 탈북 전 경험 가족 이야기 탈북 경로 등 거의 대성공사 신문관 수준의 질문이 있었지만 허 원제 선생과 황 선생은 싫은 내색 없이 답변했다. 한국에 왜 왔나? 내가 이러려고 한국에 왔나 그런 자괴감이 들은 적은 없었나? 등의 다양한 질문이 쏟아졌다.
사회자가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중간에서 제지하지 않았다면 질문 공세는 계속될 판이었다. 허 선생이나 황 선생이나 가장 힘든 것은 태어나고 자란 곳이 다르다는 이유로 한국인이면서 화성에서 온 사람 취급받는 것이 가장 힘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럼, 탈북자들의 남한 정책에 더 바라는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제 생각에는 탈북자 3만 명 시대에 탈북자 천 명 이천 명 시대의 탈북자 관련 국가조직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줄 수 있나요?”
“예, 탈북자 관련 정책 부서는 국가정보원, 통일부, 정보사령부, 민사심리전부, 대성공사, 경찰청 등 여러 개의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이 조금씩 물려있는데, UN의 난민청 같은 탈북주민관리청 뭐 그런 명칭으로 한 곳에서 다 처리하면 국가예산 중복도 방지되고 탈북자 입장에서도 여기저기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 헤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여기 통일원과 국가정보원 참석자도 계시니 돌아가시면 잘 반영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대로 탈북자들의 한국에서의 잘못은 없나요? 있다면 어떤 것인지와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
“예, 탈북자들은 자신들이 돈을 주고 중개인을 통해 들어왔든 혼자 고생하면 왔든 목숨 걸고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에서 통제되고 남을 의식하면서 내가 맘에 없는 말이라도 당성을 보이기 위해 하던 말을 이제 자유세계 왔다고 자유를 잘못 해석해서 방종을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로에 횡단보도 초록 불이면 건너가고 적색이면 대기해야 하는데, 적색인데도 건너요, 왜 그랬냐? 물으면 여기는 자유세계다고 엉뚱한 말을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절대로 건드리지 않아야 할 것이 3 개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용의 역린과 잠자는 사자의 코털, 아버지의 퇴직금인데, 북한에는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북한 체제 즉 백두혈통이고 자신들의 존엄이라고 지칭하는 김일성-김정일 가계에 대한 흠집을 내는 언행은 절대로 용서 못합니다.”
질의응답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민사심리전 부장 문상옥 소장이 끝인사를 하였다.
“오늘 <새터민>에 대한 정책을 담당하는 여러 기관이 모여 좋은 발표와 참석자의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여러분이 발표를 발표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정책에 반영할 것은 반영이 되게 각자의 자기 위치에서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부에서는 통일이 되면 통일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통일을 반대하고, 통일을 하면 당분간은 남이나 북이나 다 같이 못 살게 된다고 동서독 통일 시기의 물가 불안과 평균 소득의 감소를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이 세미나는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에서 통일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지금까지 탈북 한국에 정착한 북한 이탈주민에 대한 적응도 중간 평가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의 각자가 일하는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에서 ‘새터민’에 대한 차별을 완화시키는 것이 작은 통일이라는 마음으로 임해주시기 바라며 오늘 세미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수가 터져 나왔다.
국가정보원 사이트에 보면 국가정보원의 10 가지 주요 업무가 나온다. <대공수사>, <대북정보>, <해외정보>, <방첩>, <산업보안>, <대테러>, <사이버안보>, <국제범죄>, <국가보안>, <북한이탈주민 보호>로 되어 있다.
하지만 여기에 북한이탈 주민 보호 항목은 탈북자가 3만 명이 넘는 시대에 과거 탈북자가 천 명 단위 시대의 마인드와 조직으로 일하고 있다면 문제다.
국가정보원이 숨기고 있는 사실 하나가 탈북자를 가장한 간첩을 잡아내는 일이다.
실제로 탈북자 속에서 간첩행위를 한 자를 잡은 사례도 있고, 간첩으로 몰린 사람이 법원에 소송을 걸어 승소한 사례도 있다.
국가 정보원은 북한 이탈 주민이 국내 들어오면 약 3 개월 동안 북한이탈 주민 보호 센터에 보호하면서 대한민국 법률 상식부터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초 소양교육을 실시한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 망명한 탈북자의 법률적 명칭은 북한 이탈 주민이다.
정부에서 ‘새터민’ 용어를 만들었는데, 그 말을 쓰는 사람은 군대서 정보사령부에서 근무했거나 국방부 민사심리전부나 통일부에 근무하는 사람 빼고는 ‘새터민’을 쓰는 사람이 없다. 말은 언중들이 쓰는 대로 맡겨야지 국가기관이 통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한 가지 본보기가 되었다. 북에서 온 사람이 ‘새터민’이면 남한에서 태어난 사람은 ‘헌터 민’ 이냐는 조롱까지 한다.
세미나가 성공적으로 끝이 났다. 이 세미나를 계획했던 박상민 사무관과 인수받아 진행한 간 복균 사무관이 참석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회의실에 남았다.
“세미나 끝나고 텅 빈 회의실 보니 무슨 생각이 들어, 간 사무관?”
“꼭, 어린 시절 가을 운동회 끝나고 텅 빈 운동장에 낙엽만 나뒹구는 모습?”
“그래, 준비가 어렵지 준비하고 난 세미나 당일은 가을 운동회처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지나간다.”
“박 사무관님은 이런 세미나 많이 했을 거 아닙니까?”
“많이 했지 7급부터 6급, 5 급 올라오면서 일 년에 서너 번 세미나 해야 일 년이 갔으니까. 그러다 보니 나이 40 넘기고 50을 바라본다.”
“10년 후의 제 모습이 오늘 박 사무관님 모습이겠지요?”
“무슨 소리야? 간 사무관은 군대 대위까지 지낸 사람이니 군무원 들어오기 힘들어 그렇지 군무원 온 이상 10년이면 서기관 지나서 부이사관까지는 가야지?”
“이거 세미나 후속조치 어떻게 하죠?”
“어려울 거 없어. 기안지에 부장님 전결로 ‘2007년도 전반기 <새터민> 정책 세미나 자료 존안을 건의’ 합니다. 하고 내가 만들었던 최초 기안문부터 중간 협조 공문 자료 수집, 발표자료, 오늘 종합자료 모두 망라해서 존안처리 하고 토의 및 질의응답에 나온 것 중에서 핵심 내용 정리해 추가하면 된다. 국가정보원이나 정보사령부, 경찰청 등 대외 기관에서 할 일은 협조 공문 보내고 그 협조 공문 처리하는 부서에 가끔 전화해 어느 정도 진행 했나 부장님께 중간 보고 드리고.”
“예, 박 사무관님 옆 사무실에 있으니 일하다 궁금한 거 물어보고 했는데, 후반기는 걱정입니다.”
“걱정을 말아요, 그대. 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내가 가더라도 어디 대전 부산 가는 것도 아니고 여기 국방부에서 다른 부처에서 일할 텐데, 뭔 걱정이야?”
“예, 일 하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연락드리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 발표할 때 보니, 하나원 황 가연 선생 정말 똑 소리 나더라.
너 맘에 있으면 한번 시도해 봐?”
“에이 그런 여자가 남자 있거나 결혼했겠지요?”
“너 그 여자 발표시간에 딴생각했어?”
“아뇨!”
“척, 하면 삼천리지? 그 여자가 자기 입으로 탈북 8년 차인데 처녀라고 말한 것은 남자 중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주거나 본인 스스로 나에게 찔러보라는 뜻이야.”
“에이, 무슨?”
“무슨 아니라 생각해 봐. 이런 딱딱한 공식회의에서 자기가 유부녀인지 처녀인지가 무슨 세미나와 관련이 있어. 그렇게 슬며시 자기를 노출시켜 총각의 귀에 울림을 주는 거야. 여자가 아주 고단수 공개 청혼을 한 거지? 여자가 먼저 말하기에는 그렇고 이 넓은 회의장 많은 참석자 여러분 중에 주변 좋은 총각 있으면 소개해주세요를 간접적으로 말한 거야.”
“정말 처음 황 선생이 자료 제출하러 왔을 때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세미나 진행에 온 정신을 쏟아서인지 처음 봤을 때처럼 눈부시진 않았어요.”
“여자고 남자고 모두 자기 짝을 잘 만나려면 약간의 용기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 황 선생 맘에 들었으면 흥분과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그 여자에게 연락해.”
“뭐라고 말을 하지요?”
“연락처는 있어?”
“예, 발표자들은 전화번호와 이 메일 주소 다 받았습니다.”
“그러면 일단 E-mail 편지를 보내고 다음 날 전화를 해.”
“무슨 말로 이 메일을 보내면 거부감 없이 읽어볼까요?”
“일단 민사심리전부 세미나에 좋은 발표 감사한다고 하고 언제 시간 되면 식사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해봐.”
“거절당하면 어쩌죠?”
“일단 시도해 보고 걱정은 그다음에 해. 시도도 안 하고 걱정하거나 맘에 있는데 표현도 못하고 그 여자 시집간 후에 후회하지 말고.”
“예, 오늘 퇴근하면 시도하겠습니다.”
최 사무관은 가영에게 이 메일을 썼다가 지우고 반복했다. 나이 34 세 노총각이 28 세 여자에게 이 메일 한통 쓰는 것이 대학 논술시험보다 더 어려웠다.
황하나 선생님 했다가 ‘님’자는 뺐다.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선생과 선생님의 차이를 확실히 수업시간에 설명해 주어 고등학교 졸업한 지 18 년이 지났어도 기억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나의 스승과 확실한 공적이 있어 존경의 대상이 되는 분에게만 선생님이고 순전한 호칭으로 선생 할 때는 절대로 ‘님’을 넣는 것이 잘못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