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반 은사님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1974년에 중학생이 되었다. 입학식날 운동장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부터 마지막 교장선생님 환영사와 입학생 중에 무엇으로 지명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 초등학교 성적이 수가 많았고, 아버지 직업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내 짝이 선서를 했다. 각반으로 가서 키 순서대로 번호를 정했다. 일반 번호를 정하고 좌석배치가 끝나고 다시 담임이 내게 다가왔다.
함문평, 교복서 담배 냄새난다. 담배 피우지?
아니요, 할아버지 2갑 할머니 1갑, 장손이라고 5세부터 한방을 써서 그래요.
담임은 슬리퍼로 내 얼굴을 팼다. 거짓말한다고 너 같은 놈은 수업들을 자격도 없다고 교무실에 가서 끓어앉아 있으라고 했다. 그 시절 중학교는 특활이 있는 금요일은 7교시, 토요일은 반공일이라 4교시 나머지는 6교시 시절 6교시 마치고, 교무실에서 담임은 검도부에서 망가진 죽도 대나무 한쪽으로 종아리를 때렸다. 멍이 들었다. 그러니 학교 갈 맛이 없어졌는데 유일하게 금요일 특별활동 시간 문예반이 유일한 숨통이었다.
금요일 마지막에 잡힌 문예반 시간에 원칙적으로는 1시간 마치고 각자 원래 반으로 가서 담임이 하는 종례를 마치고 집으로 갔다. 문예반 선생은 미리 각반 담임에게 양해를 구하고 종례 시간 할 말을 대신해 줄 테니, 문예반 학생은 찾지 마라고 하고는 우리를 데리고 관악산으로 갔다. 지금은 서울대학교와 연주암 이외는 불법 가건물이 다 철거되어 깨끗하지만 그 시절은 온 천지 가건물에 굿을 하는 굿당이 많았다. 아마도 김건희가 작가보다 아래 나이니 이 정도지 작가 나이였다면 더 심한 무속에 빠졌을 것이다. 작두에 올라탄 무당의 굿을 보고 그것이 문예반 수업 끝이었다. 다음 주 문예반 올 때까지 오늘 본 굿에 대한 소감문을 원고지 10매 이내로 써오게 했다. 그렇게 원고지 발표가 끝나면 선생님 총평이 있었고, 다음 주는 광릉 수목원을 보고 소감 쓰고, 발표하고 총평을 듣고, 그다음은 세검정을 돌아보고 세검정 유래를 듣고 소감문 쓰고, 서오릉, 헌인릉, 동구릉 등등 문화재청장 지낸 유홍준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나오기 훨씬 이전 작가는 그런 경험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쩌다 성남중학교, 성남고등학교가 4강에 오르면 동대문야구장, 지금 동대문 역사공원 자리서 응원을 하고, 야구 관전평이 다음 주 문예반 과제였다. 세월이 흘러 박병호가 성남고 3학년 시절 연타석 홈런으로 우승을 했다. 작가는 성남중 마치고 중대부고로 가서 김석원이 청소년 대표를 했고, 고3시절 1979년 효창구장에서 우승해 설립자 임영신 할머니와 함께 효창구장서 흑석동까지 동기생 신재수가 밴드부 악장으로 선두서 악기를 불고 인솔하면 우승컵을 든 선수가 가고, 응원에 동원된 재학생이 그 뒤를 따랐다. 한강까지는 용산 경찰서가 한강이남은 노량진 경찰서가 교통통제와 컨보이를 해주었다.
그 시절 문예반 선생님 말씀이 우리나라 문학에 노벨문학상이 없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첫째는 우리 문학 작품을 실감 나게 영어, 독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러시아로 번역을 못했다. 둘째는 우리나라 국력이 노벨상을 주는 나라에서 볼 때 우습기 때문에 못 받은 것이지 절대로 한국문학이 수준 이하 문학이 아니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