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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 시절의 추억. 63

아버지 유품 두 점

by 함문평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때 유품을 모두 태우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태우는 것은 내가 죽은 후에 해도 늦지 않다고 하여 미루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땅 2천 평 5남매가 분할상속해 봐야 각자 몫은 상속세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지금까지 고향을 지키는 막내에게 위임처리시켰다.

문자가 왔다. 아버지 쓰시던 약장과 작두도 태울까? 즉시 답장을 했다. 약장과 작두는 내가 장식으로 보관하다 관리 힘들 정도로 내가 나이 들면 어디 한방박물관 생기면 기증할게 보내라고 했다.

약장을 받으니 약재함 한 칸이 없었다. 동생이 집에서 방을 며칠을 뒤져도 못 찾았다고 했다. 원래부터 없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약장 마련할 돈이면 송아지를 한 마리 산다고 송아지를 사서 총 99마리를 이 집 저 집에 위탁 생육을 했다.

원주에서 한약방을 하던 분이 돌아가시고, 약장 쓸 일이 없다고 중고로 송아지 반값에 가져가라고 연락을 받고 사 오신 것이다. 동생이 몇 날을 찾아도 없다는 한 칸은 중고로 가져와 원래부터 없었다.

약장과 함께 가져온 작두는 나는 손잡이에 나의 손 때가 뭍은 것이고 막내 동생은 피가 묻은 것이다. 11살 차이 막내는 내가 6학년 서울로 전학 왔을 때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여름방학 때는 어머니 배를 보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태어나면 딸일 것이라고 했다.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아들이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작두 사용법을 익히고 큰 힘을 주지 않아도 썰 수 있는 약재를 썰었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5학년까지 사용했다. 전학 이후는 오직 공부하라고 작두 근처도 못 가게 했고, 가운데 동생이 했다. 막내는 작은 형이 하는 것을 보고, 몰래 자기도 한다고 하다 작두에 손을 다쳤다. 강림은 병원이 없어 안흥까지 아버지가 등에 업고 와서 꿰매고 약을 처방받아 내려갔다.

약장과 작두를 전해주며 형은 약장과 작두지만 나는 피의 작두라고 했다. 그래, 난 서울서 어머니에게 말로만 들었는데, 꼬맹이가 왜 작두를 만져?

아니, 작은 형이 약재 썰면서 향기 좋은 약재 입에 무는 것이 멋있어서 나도 한번 흉내 내려다 썰어보지도 못하고 손만 다쳤지 뭐! 했다.

약장

손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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