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계절. 197
요즘도 학생들이 문과 이과 나누어 공부하지만 30년 전에 문과 이과 구분 없이 생물은 공통과목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신 분이 있다.
(고) 이복원 생물 선생님이다. 한 번도 고교 3년 동안 담임으로 만난 적이 없기에 2학년 때 이과반 대부분 머리 한 머리 있다는 친구는 물리와 화학을 선택했는데, 나는 물리와 생물을 선택했다.
반 친구 대부분은 7반 교실서 화학 공부할 때 생물은 인원이 몇 안 되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테니스장을 지나고, 음악실 지나 과학실에서 생물 공부를 했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걸어보고 싶어도 학교 자체가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이 되어 모교를 걸어도 내 모교 아니고 타인의 모교 수준이다. 과학실서 생물 수업을 마치고 수학 수업을 들으러 7반 교실로 오는데, 선생님이 물었다. 함문평 부모님 중에 선생님 하는 분 있냐? 물으셨다. 아니요, 아버지 어머니는 강원도 횡성 촌에서 농사지으시고, 저는 흑석동 연못시장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방 한 칸 전세 얻어 공부합니다라고 했다.
그럼, 할아버지는 젊어서 무얼 하셨어?
20대는 만주에서 아편장사 하셨고, 광복 후는 농사짓다가 서당 훈장하시고, 박정희 정권 잡고 한글전용으로 서당 학동이 안 와 다시 농사짓다 지금은 장손 뒷바라지 하십니다. 했다.
어쩐지, 너희 600명 학생 중에 가방을 들어도 몸이 한쪽으로 휘지 않고 반듯하게 걸어서 1학년 때부터 유심히 봤다고 하시면서, 생물 시험공부는 너무 부담 가지지 말고 공부하거라. 생물은 어디 가나 천적과 공생이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고 하셨다.
학교 졸업 후 선생님 근황을 몰랐는데, 군대서 중령 진급에 3회 떨어지고, 만 45세가 된 다음 달 말일에 전역했다. 소령 전역자 99%가 예비군 지휘관 시험 준비할 때 나의 전공이 국어교육이라고 강원도 중등 교사 5명 뽑던 해에 강원도교육청에 원서를 냈다. 첨부서류가 중고등학교 6년 생활기록부였다. 대방동 가서 중학교 생활기록부 떼고, 흑석동 고등학교를 갔더니 학교는 사라지고 중앙대의대 부속병원이었다. 물어 도곡동 모교에 가서 생활기록부 사본을 떼고 행정실 직원에게 교장 선생님 성함을 물으니 이복원 교장이라고 했다.
그 행정실 직원에게 80 졸업생 함 ㅇㅇ이 생활기록부 떼러 왔는데, 잠시 교장 선생님 뵈어도 될까요? 대신 여쭙는다고 하니 오라고 하셨다.
졸업한 지 몇 십 년 지난 제자를 보더니, 오~한문 훈장님 장손? 하셨다. 그 옛날 흑석동 과학실에서 수업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본관으로 걸어으면서 대화한 것을 기억하셨다.
선생님은 제자에게 흑석동에서 도곡동으로 학교 이전한 역사 스토리를 들려주셨다. 그때 교장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 중에 아직도 해결 못한 것이 있다.
아무리 돈이 중요하고 서울 땅값이 나날이 치솟아도 학교부지로 장난치는 놈은 법을 새로 만들어 총살시키는 것이 국가의 앞날을 위해 좋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김희수라고 재일교포가 이사장 시절에 학교이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야구 두산베어스의 두산중공업이 중앙대학교 학교재단을 인수했다. 미친놈들이지 어차피 재단이 중대부고, 부속유치원, 부속중학교,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안성캠퍼스까지 주식회사 중앙대 재단이면 고등학교부지 매입하는 것이 정상 아니야?
땅 주인이 작가와 같은 강릉 함 씨라고 하는데, 수소문해서 종씨가 나와 항렬 비교해서 내가 높으면 혼줄을 낼 것이다. 시조 함 혁이 그렇게 가르쳤느냐, 광복 후 초창기 함태영 부통령과 박정희 유신독재와 싸운 함석헌 어른 종씨 강릉 함 씨에 먹칠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