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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필은 붓을 안 가린다

할아버지 뎐. 80

by 함문평

할아버지는 일본강점기에 10년을 할아버지의 스승에게 10년을 한문을 배웠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한문 배운 서생이 선비로 에헴하고 살 형편이 아니라 만주로 떠났다. 만주서 처음은 농사일을 거들고 밥만 먹고 지냈는데, 농장주의 형이 아편장수라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하는데, 똑 부러짐이 보여 농사짓는 일꾼을 보내준다고 하고 형이 할아버지를 데리고 가서 아편장수 총무를 시켰다. 중국말은 몰라도 한문을 사서삼경을 익힌 상태라 필담으로 했다. 세월이 흐르자 말도 하게 되었다. 요즘도 버닝썬 사건이나 백해룡 경정 마약수사 중단을 보듯 그 시절도 아편장사는 중국 변방대 일본군관 순사 나부랭이에게 촌지를 주어야 할 사업이었다.

할아버지 지론이 명필은 붓을 안 가린다였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방초 큰길 건너 성남중학교에 배정받았다. 중학생이 도었으니 제대로 된 책상과 의자를 사주신다고 가구점이 아닌 중고상으로 갔다. 할아버지가 그중 상처가 적은 책상 하나와 목재의자를 지목하시고 계산하고 용달을 불러 집에 가지고 왔다.

할아버지는 나의 속마음을 읽으셨는지, 네 마음 다 안다. 책상 의자를 새것으로 살 수도 있다마는 어차피 책상은 책상 노릇 의자는 의자 노릇만 하면 된다. 새것을 사도 장손이 험하게 쓰면 금세 망가진다. 중요한 것은 그 책상 의자 임자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상장받는 학생이 되면 책상이 기뻐할 것이고, 임자가 아무리 좋은 금테 두른 책상이라도 주인이 공부 안 하면 그 책상과 의자는 별볼인 없는 책상과 의자가 된다. 그러니 장손은 이 중고책상과 의자가 책상 의자 모임서 우리 주인이 우등생이야 자랑할 수 있게 하라고 하셨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그렇게 쓰리쿠션으로 날렸다.

세월이 흘러 나도 딸이나 아들에게 공부해 소리를 한 번도 안 했다. 그냥 집안에 청소기 돌릴 곳 돌리고, 빨래 세탁기 돌리고, 책을 읽거나 습작노트에 습작만 했다.

딸이고 아들이고 공부 잘했고, 학교 졸업해 직장 잘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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