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년 3월 4일 서울로 전학을 왔다. 시골은 58명 한 학급인데 서울은 15반까지 있었다.
곧 졸업을 하고 중학생이 되었다. 국어 선생님은 시인 전재수 선생님이라 좋았다. 국어시간에 비 오는 날이면 우리는 행복했다. 국어 수업이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은 선생이 말로 수업하는 것보다 교과서를 덮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그냥 잘 보는 것이 더 좋은 수업이라고 하시면서 창가로 갔다.
선생님 옆 친구 몇 명만 선생님과 대화를 주고받고 나머지는 그냥 창밖에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 선생님은 오늘 구경한 봄비를 시를 쓸 사람은 원고지 2매, 산문을 쓸 사람은 원고지 10매로 써오라고 하셨다.
수학 선생님은 여지 선생님이었다. 미인은 아니었는데 종아리가 예뻤다. 키가 별로 안 커서 내 자리가 둘째 줄인데, 수학 시간 내내 칠판은 안 보고 종이리만 관찰했다. 중간고사 시험문제가 21문제가 나왔는데 20문제는 객관식 마지막 1문제는 과정과 답을 다 쓰는 것이었다.
객관식은 아는 건 풀고 안 되는 것은 답을 하나하나 대입해서 풀면 풀렸다. 주관식 풀이 칸에 편지를 썼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안정자 선생님께
제가 수학 공부 안 한 것은 아닌데, 시험문제가 이렇게 만주벌판에 풀이를 쓰라고 나올 줄 몰랐습니다.
죄가 있다면 선생님 종아리가 너무 예뻐서 칠판은 안 보고 선생님 종아리만 봤는데 다음 시간부터는 칠판 잘 보겠습니다. 선생님 점수 절반만 주시면 다음 기말 시험은 실력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희망사항인데 제가 군대 마치고 사회에 나올 때까지 시집가지 마시고 기다려주세요라고 썼다.
중 1학년 수학 반평균 50점 시절에 나의 수학 점수는 우리 반 1등 김인환이 95점 내가 85점이었다.
그 후로 수학공부 정말 열심히 해서 선생님 제가 100점 안 나오게 어렵게 출제해즈 서요라고 농담을 했는데 거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라는 장승수의 재수 없는 말 보다 더 재수 없는 소리지만 사실이다. 중학교 90년 사에 깨지지 않는 기록이 나의 수학 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