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이들이 프리터족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하는 노랫말이 생각난다.
학생시절에 바로 아래 두 살 차이 나는 여동생에게 오빠는 왜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유는 결석, 지각, 조퇴 한번 못해본 것에 대해 오빠는 학생시절 추억 하나 없는 재미 빵점 오빠라고 했다.
다음은 정말로 좋아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와 나의 궁합이 나쁘다는 이유로 결별해다. 그리고 궁합 좋다는 여자와 중매결혼을 했다.
웃기는 일은 궁합이 좋다고 아버지가 승낙해서 결혼했는데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한 기억이 없다.
오죽하면 딸이나 아들은 자기들 어린 시절 기억은 거의 엄마의 일방적인 팩트 폭격에 쩔쩔매는 아빠 측은한 기억뿐이라고 한다.
젊은 시절 아내는 책을 사거나 원고지나 대학노트에 글을 쓰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신혼생활을 통일전망대 중대장을 했는데 군인아파트 좁아빠진데 무슨 책이냐고 야단을 쳐서 책을 중대장실 교범 옆에 문학 이론과 시집 소설집을 보관하다 불시 방문한 연대장이 군인이 교범만 탐독해야지 시나 소설 읽을 시간이 있냐?는 한마디에 교범 이외의 책은 병사들 휴게실 책장에 비치했다.
병사들 중에도 문학을 좋아하는 병사들은 9중 대원은 좋아했고 10,11,12중대와 본부중대 병사들도 자기네 중대 없는 책은 우리 인사병이 별도 대출 장부를 만들어 관리했다.
1 차 중대장 18개월 보직이 종료되자 지금 해운대 송정 신시가지가 탄약창 시절 제3경비중대장이 명령이 났다.
통일전망대 중대에 300권 도서를 기증하고 떠났다. 왜냐하면 그 책을 이사화물 대한통운에 실었다가는 나의 용돈만 그 책값 나누기 18로 줄일 것이라는 아내의 성품을 알기에 그렇게 했다.
3 경비중대장도 18개월 하는 동안 300권의 책을 병사들 휴게실에 주고 떠났다.
결과론이지만 나이 60에 등단한 것도 책을 사지 마 사지 마 해도 몰래 책을 샀고 글을 쓰지 마 쓰지 마 해도 장교수첩 뒷장이나 부대 행정문서 파지 이면지에 습작을 한 것이 늦게나마 등단에 도움이 되었다고 자평한다.
이 글을 읽고 예비작가들이 조금은 도움이 되길 바란다. 작가는 인디언 기우제처럼 그들이 비 올 때까지 기우제 지내듯이 등단하는 그날까지 쓰면 등단한다.
은퇴한 회사에서 시니어 직원으로 오라고 하고 동기 중에는 시니어밀리터리 뽑으면 응모하자고 하는데 안 한다. 왜? 난 이미 작가로 프리터족의 행복을 알고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