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도해가 할아버지 힘들게 돈 벌어 김일성에게 보냈어요라고 물으니 그 시절은 때려잡자 일본 놈이었지 민족끼리 원수가 되지는 안 핬다고 했다.
棹海라는 이름은 선우在石이 五행에 맞게 작명하자면 선우先鎬다음이 金生水라서 泳자 돌림으로 泳三, 泳國, 泳求를 고려했으나 워낙 사주가 신약사주라 연애도 맨날 차이기나 하고 직업도 변변한 승진도 못하고 험한 세상 살아가기에 뭘 해도 실패의 연속이 눈에 보이자 돌림자 무시하고 지었다.
선우棹海 험한 세상, 험한 바다 어디에 있더라도 노(棹)만 확실하게 잡으라는 조부의 희망사항이고 손자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름이 힘들면 반대로 인생이 편해진다는 만주지역 속설도 한몫했다.
1945년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 해방이 되더라도 김 구 선생에게 김일성에게 아편 팔아 번 돈을 보낸 것이 얼마인데 재석이 보낸 돈이 총으로 변해 조선에 진격 일본 놈 쳐 죽이는 것에 기여하기를 바라던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아편 외상값을 수금하러 한의사 왕 서방에게 갔는데 중국어로 재석에게 일본 천황이 항복방송을 했다고 알려주고 외상값을 주면서 남은 아편을 다 가져오라고 해서 떨이처리를 했다.
돈을 주더니 왕 서방은 중국돈으로 조선에 가면 쓸 수가 없으니 북경 금은방에 가서 금으로 다 사고 조선에 들어가면 금을 팔아 논밭을 사라고 귀띔해 주었다.
금을 가지고 해방된 조국에 왔다. 간도특설대 출신과 일본육사 출신들이 애국자로 둔갑해 군대고 경찰이고 간부들을 차지해 김포 지경리와 자이리 일대 땅을 샀다. 경력이 아편장사가 전부라 논밭을 사서 경작은 못하고 소작을 주었다.
선우도 해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샷 감을 찾았다. 대방역에서 여의도 건너가는 다리가 멋지고 조명도 좋고 사진 찍으면 인증숏이 보기 좋지만 1977년 2월 16일 박은경을 만나던 시절은 실개천에 돌다리만 있었다.
김포장기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이 되자 서울 대방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박은경과 1,2등을 다투다가 전학을 온 후로는 은경이 1등으로 졸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