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by 함문평

대방 지하차도를 지나 여의도 가는 중간에 샛강이 흐른다. 한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중간에 조그만 실개천 샛강이다. 나의 집은 대문을 열면 샛강이 보이고 뒤로는 대방역이 있어서 지나가는 열차 소리로 시끄러웠다. 오히려 그런 소음이 남녀가 데이트하기에는 좋았다.

지나는 열차소리에 둘이 키스를 해도 주변을 돌아볼 필요가 없었다.

큰길 건너에 성애병원이 있다. 지금은 종합병원이지만 그가 태어나던 70년대는 성애산부인과였다. 우리 형제자매는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


나는 대학시절 4명의 여자와 연애를 하고 채였다. 1번 여자는 학보사 기자 김미숙, 2번 유아교육과 차유경, 3번 가정교육과 고영숙, 4번이 같은 국어교육과 최송현이다.


내가 차였지만 먼저 연애 공작을 걸어온 것은 여자였다. 1번 학보사 김미숙은 유신헌법 반대하는 교내시위든 명동거리나 종로, 신촌 시내에 데모가 있으면 메모지에


―수신 : 하진호

―발신 : 김미자 기자

―내용 : 독수리 상 앞으로 코닥 필름 2통 보내주기 바람.


기자가 보내오면 나는 필름을 구해 약속장소에 전달을 했다. 연일 계속되는 데모에 학교는 위수령이 내려졌다,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생략하고 리포트로 학점을 부여한다고 했다. 교양 헌법개론, 문화사, 교양한문까지 모든 리포트를 2개 작성했다. 한부는 자신의 것이고 다른 한 부는 그녀에게 주면 표지만 만들어 제출했다.


그녀는 늘 학보사 기사를 쓰거나 필름 중에서 ‘이 한 장의 사진’을 고르기 위해 수업시간 이외는 학보사에서 살았다. 졸업한 선배들이 학보사에 찾아와서 후배들에게 회식을 시켜주는 경우도 있어서 영어교육과 김미자 기자와 국어교육과 하진호가 사귄다는 소문만 무성했지 정작 데이트다운 데이트는 못했다.


그해 5월 14일 커피전문점 ‘전설의 언덕’에서 6시 30분에 만나자고 했다. 그는 6시 20분에 도착해 기다리는데 그녀는 6시 40분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 수신 : 영어교육과 1학년 김미자

― 발신 : 국어교육과 1학년 하진호

― 내용 : 6시 20분에 와서 40분까지 기다리다 안 와서 간다라고 알림판에 부착하고 나왔다.


그 사건으로 국어교육과 선배들은 ‘하진호 멋진 놈이야!’ 했고 영어교육과 선배들은 ‘남자가 인내심이 30분 한 시간은 되어야지 너무하네?’ 했다.


국어학개론 전공 강의실에 그녀가 찾아와서 수업 마치면 노천강당에서 만나자고 했다. 노천극장은 잔디를 경사지게 심어서 아무 곳에나 신문지 한 장만 깔면 좋은 데이트 장소가 되었다. 그녀는 무슨 남자가 그렇게 인내심이 없냐? 그는 10분이면 전투기가 수원 비행장에서 출격해 평양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대꾸했다. 거기까지가 학보사 김미자하고 인연이었다.


2번은 유아교육과 차유경이다.

그녀는 교양한문 수업을 함께 수강했다. 교양한문 이 경우 교수가 출석을 부른 후에 교재를 무작위로 읽게 했다.


교양한문(敎養漢文) 교재에 연필로 음을 달아달라고 했다. 연필로 한문에 음을 달아서 다음 수업시간에 전달했다.

그녀는 털실로 조끼를 짜서 주었다. 줄자로 가슴둘레를 잰 것도 아닌데 딱 맞았다.

그녀와의 데이트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춘천이나 청평으로 데이트하러 교외로 나갔다가 그녀가 눈길 가는 것을 이것저것 사다 보면 돌아올 시간에는 수중에 돈이 덜어졌다.

몇 번 그런 데이트를 하더니

―너는 말이야, 연애상대로는 98 점인데 결혼상대로는 58 점이야―하고 떠났다.


3번 여자는 가정교육과 고영숙이다.

집이 제주도였다. 초등학교시절부터 웅변을 했다. 매년 6,25만 되면 전국 웅변대회가 있어 상도 여러 번 탔다고 했다.

대학생부 웅변 원고를 써달라고 해서 5분 웅변 분량을 써주었다.


―6,25가 발발하기 전 전쟁이 나면 평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신의주에 가서 저녁을 먹겠다고 국방부 장관은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정작 6.25가 발발하자 국민 여러분! 국군이 북한군을 물리치고 북진을 하고 있다고 거짓 방송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 각부 장관 국회의원들은 수원 천안 대전으로 피난을 먼저 갔습니다.


순진하게 방송을 믿었던 서울 시민만 한강 다리가 폭파되어 한강물에 수장되거니 공산 치하에 몇 달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대학부에 출전 1등 트로피를 받아왔다. 그녀 자취방에 모여 막걸리를 마셨다.

그녀도 몇 달 지나자 연애상대로는 98 점인데 결혼상대로 58 점이라고 헤어졌다.


4번 최성현은 국어교육과를 4년 동안 다니면서 좋아하는 마음만 있었지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였다. 졸업여행으로 지리산을 종주했다. 이경우 지도교수가 등산에 일가견이 있어서 준비물을 알려주었으나 침낭을 제대로 준비해 온 사람은 하진호뿐이었다.


세석산장에서 첫 밤을 보냈다.

침낭을 최성현에게 주었다. 산장지기가 남학생들은 산장 2층으로 올라가고 여학생들은 1층에서 자도록 했다.

진호의 코 고는 소리가 너무 커서 산장지기가 그를 산장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둘이 산장 옆 평상에서 밤을 보냈다.


3년 동안 4명의 여자에게 차이고 군복무를 마치고 4학년에 복학을 하니 졸업하고 무엇을 하여 먹고살지가 걱정이 되었다.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를 하는 중학 동창 배장호를 만났다.


그가 행정고시 준비를 한다고 했다. 친구를 따라 강남에 간다고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 연수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첫 발령지가 국무총리실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모르나 국가홍보는 문화공보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백서(行政白書) 발간업무는 총리실에서 하고 있었다. 그가 국어교육과 출신이라 한자를 많이 안다고 행정백서 담당자로 국무총리실 함 부이사관이 업무지시를 했다.


78년 행정백서는 어떻게 발간했는데 79년에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2·12 하극상 군사반란이 일어나고 하나회가 군권을 장악하더니 1980년 광주사태가 발발하고 평정되자 5월 31일 신군부는 삼청동 총리실 근처에 국가보위 비상대책상임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줄여서 ‘국보위’로 부르는 여기에 대통령이 있지만 대통령보다는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이 뉴스의 초점이 되었다.


수해현장도 대통령보다 상임위원장이 가는 곳에 수행하는 인원이 더 많았고, 기자들도 더 많은 인원이 취재를 했다. 9시 TV뉴스는 땡과 동시에 전두환 동정이 첫 뉴스였다. 공무원들이나 기자들이나 알아서 기는 것인지 대통령은 꾸어온 보리자루 대접이었다.


말로는 사회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공무원이나 신문기자나 다 알아서 국보위에 기었다. 요즘말로 ‘스타탄생’ 만들기에 들어갔다.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는 8월 4일 우리 사회 저변에서 선량한 국민을 괴롭혀온 폭력 사기 밀수 및 마약사범 등 각종 사회적 독소를 뿌리 뽑기 위해 이들 사범에 대한 일제소탕을 시작했다고 발표하고, 사회정화를 위한 정부의 이 같은 조치가 범국민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시민 모두가 협조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하생략)


헌법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많은 민원이 행정관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삼청동 국보위로 날아들었다. 무력으로 국회를 해산했다.


작년 12·12부터 정권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시간에 쫓긴 신군부는 대통령을 하야시키고 집권하는 과정에서 정통성이 약한 것을 희석시키기 위해 대국민 홍보가 필요했다. 정통성이 약한 정권의 특성이 국민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선심성 행정을 하였다.


3S 전책이라고 스포츠, 스크린, 섹스 정책을 펴서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을 유발하고 눈을 3S로 돌렸다. 한편, 대국민 홍보수단으로 개혁백서를 펴낼 예정이라고 했다. 통상적인 행정실적과 박대통령 시기부터 해오던 것들도 개혁의 성과로 둔갑시켰다. 지금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지만 그 당시는 좌익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짓는 것이 국보위의 의도였다.


삼청동 국보위로부터 전화가 왔다. 국보위로 와달라고 해서 실장님에게 보고를 하고 국보위 문공위원회 사무실에 갔다. 사복을 입었으나 옆머리가 짧고 사복이 북에서 귀순한 사람 같은 중령 대령들과 공무원이 한 사무실에 있었다. 허 중령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아는 체를 했다.

―하 사무관님이 행정백서 발간을 담당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국보위 발족 이후 연말까지 개혁성과를 정리해서 백서를 만들 계획입니다. 광주사태의 진상도 좌익 사주를 받아 일으킨 폭동이라는 것을 기록으로 확실하게 남길 것입니다.

―광주의 일은 아직 정리도 안 된 것을 어떻게 기록으로 남기나요?

―이 양반이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사건의 발단 원인부터 사건 종료에 대한 조사가 나온 것이 없지 않습니까?

―광주사태는 좌익이 사주한 민란으로 기록해야 됩니다.

―민란으로 정부에서 공식 발표했나요? 그럼 국사편찬위원회에 그렇게 기록하면 되는 것이지 저를 부른 이유가 뭔가요?

―국보위 발족 이후의 국정전반에 대한 백서 작업을 해야 하기에 우사무관을 불러 의견을 들어보려는 것이오.

―저는 국사편찬위원도 아니고 그냥 국무총리실의 사무관입니다. 앞으로 저를 부르거나 백서업무를 하게 하려면 공문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당신 말이야 현실을 직시하라고 따끔한 맛을 봐야 알겠어?

―따끔한 맛이라니? 당신이 내 상관이라도 된다는 거요? 국보위가 국무총리실에 지시하는 기관이요? 여기 중령, 대령들이 많은 모양인데 우리 6촌 형도 육사 공사 해사 나와서 다 중령 대령으로 있는데 그들에게 당신들이 말한 것처럼 백서를 쓰라면 쓸까요?


군인으로 상관이 명령하면 그대로 따르는 습성으로 행정도 지시하면 그대로 될 줄 알았는데 그의 당돌한 말에 그들도 어절 수 없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기세의 국보위사무실에 와서 서슬이 퍼런 쿠데타 주역들에게 무모한 말을 한 것 같아 슬며시 겁이 났다.

국무총리실로 돌아오면서 어쩔 수 없으니 한발 물러서자 이 상황에서 백서작업을 피하는 방법은 국정홍보에 대한 일이니 문화공보부에서 책임지고 만들도록 건의하기로 했다.


오자마자 함 부이사관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자초지종 말을 듣고만 있던 부이사관이 맞는 말이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연설비서관도 있는데 시정연설을 국무총리실 사무관에게 맡기고 백서 업무도 문화공보부가 있는데 총리실에서 하게 한 이유는 모르지만 이제 대통령도 서거했고, 총리로 백서발간 초안이 종합되면 한 자 한 자 영어 단어 스펠링 하나까지 검토해서 최 주사라는 별명이 붙었던 분이 대통령인데, 이거 대통령보다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더 판치는 세상이니 백서 업무는 문화공보부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무조정실장님께 보고해서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회는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하극상을 저지른 후에 국보위에 중령, 대령들은 사복을 입었지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머리는 짧아 꼭 귀순한 탈북자 기자회견을 보는 듯했다. 주먹구구식으로 일처리 하고서 뭐 그리 당당한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면서 그는 봄에서 여름을 보냈다.


10·26은 김재규가 숨 막히는 유신체제를 벗어나려고 선의의 일인거사로 좋게 평가한다 해도 12·12와 광주사태가 평정되자 국보위설치 등은 점진적인 쿠데타에 불과했다.


신군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폐기했다. 그들이 집권하는데 방해가 되는 인사 김대중을 내란음모 주동자로 검거하고 김종필 등 정관계 고위직들은 부정축재자로 체포했다. 이런 것들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사회개혁이라고 했다.


전두환의 하수인들은 공직자 숙청, 삼청교육대 설치 언론통폐합 언론인 해직 정리를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모든 관공서에 정의사회구현이라는 입체 간판을 설치했다. 공무원과 학교 교사들도 정의사회구현 궐기대회라는 것을 출석부를 만들어 점검했다.


국무 총리실에서도 평생 부정과는 담을 쌓고 지내온 선배가 그 정의사회구현 궐기대회에 휴가를 갔다고 사직서를 냈다.


흑석고등학교 남궁 태환 선생도 교사들 정의사회실천 궐기대회에 불참했다고 학교에서 퇴직을 당해 노량진 D학원 강사가 되었다.


권력에 눈이 먼 군인들이 정의와 개혁의 나팔을 불어대는 모습을 그는 허무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공무원에 되고 나서도 국어교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인간이 국보위 지시라고 엉터리 기록을 만들고 신군부 집권음모에 조력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해 여름은 뒤늦은 후회와 번민의 나날이었다.


백서 발간 작업을 하는 척만 하고 탈출할 길을 모색했다. 백서의 목차와 골격은 구상해 놓았지만 세부 내용의 집필은 빈종이로 채웠다. 각 부처에서 개혁실적이라고 넘겨온 것들이 박정희 대통령 시기부터 해오던 것들을 개혁성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는 함 부이사관에게 갔다.


―백서 작업을 문화공보부로 넘긴다고 약속하신 거 어느 정도 진전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말이야 문화공보부로 넘기기는 하는데 하사무관을 백서발간 동안에 문화공보부로 파견을 보낼 수 있냐? 묻더군, 그래서 본인에게 그걸 물어보고 결정하려고 해.

―부이사관님 제가 공무원 사표를 써야지 백서에 가담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국보위와 신군부는 진드기처럼 그를 괴롭혔다. 군사독재는 박정희 정권 18년이면 충분하지 또 장군 계급장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대통령을 한다? 그런 나라에서 공무원을 한다는 것이 너무너무 싫어졌다.


8월 16일에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를 하고 전두환이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는 공무원을 그만두기로 했다. 9월 말일에 공무원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내 조경희는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가 함경희를 처음 만난 곳이 대방역 근처 도로였다. 그녀는 집이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서 신촌 Y대학교 행정학과를 나왔다. 행정고시 공부를 위해 대방역 건너편 대방고시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머리를 식힐 때는 대방지하차도를 빠져나와 샛강 둔치를 걸었다.


어느 날 강림에 부모님이 다녀가라고 해서 청량리 중앙선으로 도착해서 지하철 1호선으로 대방역에 내려 계단을 다 내려와 횡단보도를 향하는데 그만 하이힐 굽이 도로 배수로 망에 걸려 부러졌다. 한쪽은 굽이 높고 한쪽은 낮아서 걸을 수가 없었다. 뒤에서 그것을 본 그가 아가씨 구두 벗어보세요 해서 받아 들고 도로 견치석에 굽을 내리쳐서 양쪽 높이를 같게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백서 만들기 싫어서 사직서를 내자 처음에는 놀라더니 하 사무관이 여름 내내 고민한 이야기를 들어보더니 이내 사직서 내는 것에 동의를 했다. 사무실에서 함 부이사관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사직을 만류했으나 남편 결심은 확고했다.


그가 떠나고 백서 작업은 중단되었다. 그 후임으로 백서를 담당할지 정해지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전두환 대통령 취임 후 10월 23일에 개정헌법이 확정되자 국보위는 국가보위 입법회의로 개편되고 11대 국회 개원과 함께 해산했다. 국보위 사람들은 대부분 군복을 벗고 신군부 5 공의 핵심 자리를 꿰찼다.


1980년 11월 30일 사무실 짐을 정리하고 총리실을 떠났다. 떠나는 날 백서발간 업무가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다. 문화공보부에서 만든 백서에는 전두환 집권의 정당성을 옹호 날조를 넘어서 단군 이래 최고의 지도자라는 칭송의 말까지 나왔다.


그 무렵 미국에 있는 중학교 동창생 노 로버트 호식 박사로부터 초청장이 왔다.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춥고 배고픈 학문이라고 부모님이 반대하여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진학한 것을 알고 있는 친구였다.


아내를 동반하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유학비용은 대학원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일부는 노 로버트 호식이 마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을 해주고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받았다.

미국에 온 지 한 달이 지나자 지도교수가 찾는다기에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대머리에 턱수염이 산적같이 난 교수가 질문을 했다.

―Mr. Ha, 한국에서 한국어교육과를 졸업했는데 왜 관련도 없는 고고학을 하려 하는지 혹시 정치적 이유로 도피성 유학은 아니냐? 물었다.

―한국어교육학이 전공은 맞지만 그건 부모님이 고고학이라는 건 공부하기만 힘들고 돈벌이가 안 된다고 해서 접었던 꿈을 늦었지만 이루고자 왔습니다.

등록절차를 마친 뒤 지도교수 Peter. Park을 다시 찾아갔다.

한국 정치 상황이 미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런 소릴 들어도 불쾌한 대응을 하면 안 된다고 조언해 주었다.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하더니 슬라이드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지난해 일어난 광주사태 슬라이드였다. 한국에서는 보도통제로 보도가 전혀 되지 못한 15분 분량의 활동사진이었다. 외국 기자들이 광주사태 현장에서 계엄군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찍은 것이었다. 사람을 짐작처럼 차량에 집어던지고 대검을 착검한 총으로 시민을 구타하는 장면을 보고 눈물이 나고 부끄럽고 치가 떨렸다.

Peter. Park 교수는 상영 중간에 혼잣말로

―전두환?

―신군부?

―깡패 새끼들 엿이나 먹어라. 어디서 배웠는지 한국말로 욕을 하였다.

그 무렵 미국 한인사회는 반 전두환 팬클럽 수준이었다. 노 로버트 호식이 운영하는 마트에도 한국인 교포가 직원으로 여러 명 있었는데 가끔 일하면서 한국 관련 뉴스가 나오면 욕부터 하였다. 화면에 전두환이 나오기만 하면 다른 곳으로 돌렸다.

―9시 OOO뉴스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제12대 대통령에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당선되었습니다. 25일 상오 8시부터 전국 77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된 대통령 선거는 5,271명의 선거인이 투표에 참가, 전두환 후보가 유효투표수의 90.23%인 4,755 표를 얻어 당선권인 선거인 재적과반수 2539 표를 훨씬 넘는 압도적 득표로 당선되었습니다. 중앙선관위는 이에 따라 이날 밤 9시 각 시도 선관위에서 집계 보고해 온 선거록 작성을 마친 후 주앙위원 전체회의를 열고, 전두환 후보의 당선을 확정 공표했습니다.(이하생략)

이곳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당을 어머니라고 했고, 뱃속에 있는 아이의 얼굴이라고도 했다. 조상이 묻힌 곳이며 그들의 어머니이며 뱃속의 아이의 얼굴을 밟는 동안 인류가 저지른 죄에 대하여 한 번쯤은 묵념을 해야 하지 않을까? 백인의 점령에 의해 인디언 선조들이 학살당하고 쫓겨난 곳에서도 그 아픔을 기록했다. 어떤 비극이 일어나건 해가 지고 다음 날 해가 떠오른다. 오늘의 광주사태가 여기 오리건주 미국 인디언들이 백인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과 교차되었다. 의 고통스러운 삶의 자취와 슬픈 전설이 오리건 주 숲 속에 구전되었다. 서부개척 시대에 황금을 찾아 서족으로 향하던 백인들이 강변에서 마주친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수천 년간 살아온 삶의 터전을 불태웠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산과 강의 정령들에게 기도드리고 사람이 꾸는 꿈을 정령들이 만들어 내는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였다. 태양의 신에게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과 가엾은 영혼들이 지혜로운 안내자를 발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자신들의 천막이나 마을을 찾아온 손님에게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좋은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인디언들에게 대지 위의 모든 것은 존중과 경외의 대상이었다. 작지만 신기한 오리건 주의 마을에 숨겨졌을 이야기와 바람에 스쳐가는 풀잎 요정의 피리소리가 들렸다.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는 라일락과 이름 모를 야생 꽃나무들 속에서 샛강변의 오솔길이 연상이 되었다.

정치학과 세미나인데 다른 과 학생들도 참여가 가능한 파슨스 교수의 정치학 강의실에서 역시 광주사태의 활동사진 상영이 있었다. 소총에 대검을 착검한 공수부대원이 광주 시민을 위협하고 두 손을 묶고 짐작처럼 트럭에 실었다.

파슨스 교수는 한국의 5공 정권을 군사정권으로 규정하고 정권의 실세는 군부 사조직의 핵심인 대령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정치를 ‘대령정치(Colonel Politics)'라고 정의하면서 미국이 전두환 장군과 그 부하 대령들의 집권 기도를 완전히 방치하였다고 워싱턴 백악관을 비판했다. 교수의 발표와 참석자들의 질문과 교수의 답변을 들으니 한국에서 공무원 시절 작년 여름에 국보위를 찾아갔을 때 짧은 머리 사복차림으로 로봇처럼 움직이던 사복차림의 장교들이 떠올랐다.

전두환과 하나회를 몰랐던 한국교포들은 떠나온 조국이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것에 부끄러웠다. 한국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한국은 언제쯤 문민통제가 되는 국가가 될까? 세미나에 참석한 우 사무관이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질문이 그에게 향했다.

―Mr. Ha는 파슨스 교수가 한국정치를 대령정치라고 하는 것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저는 여기 오기 전에 파슨스 교수님이 말하는 대령들을 실제 만나서 대화를 했으니까요?

―Mr. Ha는 정치인입니까?

―아닙니다. 국무조정실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그럼, 부당한 정부와 사워야 지 왜 미국에 왔습니까?

―거기 대령정치집단에 도움 주는 공무원이 되고 싶지 않아서 비겁하지만 대령정치가 끝나면 돌아갈 것입니다.

미국인 참석자들의 우를 보는 눈빛이 애정 어린 눈빛이었다. 세미나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교포들도 참석했기에 오리건 주립대학 밖으로 퍼져나갔다. 그날 세미나는 우와 한국 유학생 한국 교포들을 우울하게 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한국에서 아내로부터 편지가 와있었다.

―보고 싶은 당신에게

당신이 백서를 만드는 책임자가 되기 싫다고 사표를 내고 간 후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백서가 발간되어 정부 각처와 공공 도서관에 배포한다고 뉴스에 나오더군요.

천명은 해군에 입대했어요. 딸 미아는 치기공과를 졸업하고 서울 강남에 있는 강림치과병원에 취직을 했어요.

아버님은 당뇨병에 점점 체중이 불어나서 걱정이 됩니다. 여기 걱정은 마시고 공부 잘해서 고고학 박사가 되어 돌아오기 바랍니다. 19XX. X.25. 아내 경희―

백서는 미국 공공도서관에도 배포되었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면 전두환 사진과 하단에 한자로 全斗煥 大統領 閣下 주석이 달렸다. 다음 장을 넘기면 1980년 6월 5일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원회 현판식 사진이 나온다. 그 아래 대장으로 전역하는 사진이 있고, 1980년 8월 22일 새 역사 창조의 시대적 소명에 따라 상임위원장은 30여 년 봉직해 온 군을 떠나 예편하였다. 다음 장을 넘기면 발간사가 나온다.

―발간사

새 시대, 새 역사 창조의 기초를 닦는데 크게 공헌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그동안 업무 실적을 모아 백서로 출간하게 된 것을 매우 보람 있고 뜻있게 생각합니다. 지난 5월 학원 소요와 광주사태 등 국가가 위태로웠던 상황에서 발족된 국보위는 사회의 안정 회복과 정화조치등 당면한 중요정책을 신속히 집행함으로써 10·26 사태 이후 야기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 역사 비전을 여는 전환기를 마련하였습니다.

(이하 생략) ( 국보위 백서. 1980.12.20.)


아버지 당뇨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인명은 재천이라던 할아버지도 94세에 돌아가셨는데 90은 사시겠지? 생각했으나 그날이 너무나 빨리 왔다.


아내의 편지에 당뇨에 체중이 늘어 걱정이라는 편지를 받고 보름 후에 아버지 부음을 들었다. 트렁크 하나에 짐을 챙기고 웬만한 것은 다 버리고 귀국했다. 아버지는 벽제 화장터에서 화장으로 하고 아버지가 평생 사신 대방역 집 대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샛강 둔치 버드나무 아래 뿌렸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해서 태웠다. 그 옛날 국보위가 들어서고 백서 발간을 담당하라고 했을 때 고민이 되어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 아버지께 쓴 편지가 보였다. 뒤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답장도 있었다. 편지를 쓰기는 썼으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유품을 정리하며 읽었다.


―아버님 전 상서

삼청동에 매미가 울고 있습니다.

어머니 병세는 좀 나아졌나 궁금합니다. 저는 국무총리실에서 함 부이사관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작년 12·12 군사반란 이후 군권을 장악하더니 국보위라는 것을 만들어 대통령보다 더 큰 위세를 부라는 신군들의 등살에 이거 사무관 힘들게 행시 합격해서 하는 것이지만 그만둘까 합니다.

정승화를 체포한 것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고 대통령은 체포를 다음날새벽에 재가를 하고 시간을 기록하면 책임이 벗겨지는 것도 아닌데 한심한 짓을 하고 광주사태를 좌익분자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라고 백서에 기술하라고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총리실 어느 누구와도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없어서 아버님께 하소연합니다. 휴가를 내거나 사직서를 내고 강림 고향에 다녀오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0.7.27.

불초소자 근호 드림

―아들 보아라

보내온 편지는 잘 읽었다.

12·12는 분명 하극상이고 군사반란이다. 이 아비는 촌에 살지만 작년에 김재규 수사발표하면서 정승화에 대해 추가조사를 한다고 할 때, 전두환이 하극상을 저지를 줄 알았다.

비유하자면 단종을 영월로 귀양 보내고 왕권을 차지한 세조 같은 놈이라 생각한다.

이 편지를 쓰기는 한다만 부치지는 못할 것 같다. 혹여 이 편지가 문제 되면 아들이 불이익받거나 내가 삼청교육대 잡혀갈지도 모르는 일이고.......

원주고등학교 남궁 태환 선생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냐? 가난한 학생 재주가 아깝다고 선생 봉급 몇 푼 안 되는 것을 쪼개 제자들 학비를 보내주신 분인데 뭐 정의사회 구현 궐기 대회에 불참했다고 삼청교육대 입소시킨 놈들이니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백서 발간 담당은 절대 하지 마라. 사직서를 내도 며느리가 고생이 되겠지만 여기 강림 두 늙은이는 걱정 마라.

여기서 옥수수 매상을 하거나 고추를 팔면 작은 돈이나마 미아 어미에게 보내주겠다.

아무 걱정 말고 소신 것 해라.

1980.8 3. 강림 촌부 씀

아버지 유품과 편지 일체를 아버지 화장 후에 유해를 샛강 주변에 뿌렸다. 아버지는 촌에 살면서도 정치의식은 남다른 분이었다. 1971년 안흥면 투표인 수가 1800 명 일 때 1700 명 이상이 박정희를 찍었을 때 김대중을 찍은 100명 안에 들었다. 그런 분이니 1979년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고 이어지는 하나회의 12·12와 광주사태 국보위설치 최규하 대통령 하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얼마나 속으로 부화가 났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장작불에 유품을 하나하나 던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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