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편의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광주는 잊어라

by 함문평

지금까지 독자가 알고 있는 광주는 잊어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최초 광주백서를 글쟁이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어 돈벌이가 되니까 보고 베껴 가면서 새책을 만들었다. 교묘하고 영활한 하나회가 주축이 된 신군부 마수에 걸려든 글이 많이 나돌기 때문에 본질에서 벗어난 글이 많다.


1980년 5월에 발생한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이름만 번지르하지 그 속에 민주가 있는가 정의와 진실이 있는가 화가 나고 눈물이 난다.


가경취숙은 1911년 신해생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듬해에 태어났다. 강원도 횡성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차피 가난한 것 아무 곳에 가면 산입에 거미줄 칠까?라는 배짱으로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아편 장사 심부름을 하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직접 아편장사를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김 구 선생님과 김일성에게 1/3씩 주고 1/3을 자신이 쓰면서 횡성 본가에는 횡성보통 이하의 생활 수준이 될 만큼 돈을 보냈다.


너무 많은 돈을 보내도 탈 부족하게 보내도 탈인 것을 알기에 당신 짐작으로 적정하게 보냈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과 박정희 통치시기에는 김일성에게 할아버지 돈이 1원이라도 건너간 것을 들키기만 하면 간첩이 되던 시기라서 할아버지는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못하고 오직 장손에게 경험담과 목격담을 들려주셨다.


가경취숙 말씀에 의하면 김구선생이나 김일성이나 다 일본 놈 때려잡는다고 해서 할아버지가 목숨 걸고 아편 운반한 돈을 나누어준 것이지 민족주의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하신 행동이었다. 그걸 학자들이 연구 논문을 그렇게 쓰니 후세 사람들은 그리 알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고 한탄하셨다.


가경취숙에 의하면 1980년 광주사태 민주화 된 이후 명칭이 5.18 민주화운동이 되었지만 가경취숙 생존 시는 광주사태였다.


1980년 5월 26일에 홍남순 변화와 아내와 셋째 아들이 광주보안부대로 잡혀갔다. 광주보안부대장은 이재우 대령이었는데 보안사령관 전두환에게 마음에 쏙 들게 일을 못해서 최예섭 준장이 광주에 내려와 실질적인 광주보안 부대장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시절 전남지역 비상계엄 사령부 수사책임자는 서동남 중령이었다. 서 중령은 홍남순 변호사를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책임자로 지목했고 체포 후 수사도 그런 방향으로 진행했다.


홍남순 변호사 사무실의 정광진 사무장이 김대중에게 1억 원을 받아서 조선대와 전남대 총학생회장에게 나누어주고 학생 데모에 사용했다고 수사 방향을 정했다.


서 중령 부하 직원 허정환이 홍 변호사는 전라도 대학 출신도 아니고 홍 변호사는 광주의 혼란을 최대한 희생을 줄이려고 수습대책위원회를 하시는 분인데 이런 분을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위해 시위를 부추기는 사람으로 하면 안 된다고 것 의했다가 서의남은 권총으로 상관의 명령에 항명하는 놈은 쏴 죽인다고 했다.


허정환은 쏠 테면 쏴보라고 했다. 광주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43년이 흘렀다. 아직도 사법적 역사적 조사가 명확한 것이 없다. 왜일까 하는 궁금 증에서 아주 오래전 가경취숙이 구술하고 손자 가경문평이 기록한 빛바랜 노트를 찾았다.


가경취숙은 95세에 돌아가셨다. 노트 표지는

오늘 이전 광주는 잊어라라고 쓰여 있었다.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는 1979년에서 1982년 시기에 망원 37호였다. 망원은 사전적 의미로는 멀리 바라보는 것인데 이 시기 망원은 국가기관인 중앙정보부가 재야 민주화운동 단체 내부나 대학생들 데모를 주동하는 이념 동아리나 풍물패 내부를 접근하기 어려우니까 대학생 중 가난해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방학에 막노동을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접근해서 데모 주동자들의 동향을 수집해 간략한 망원 보고서를 작성하면 편지봉투에 돈을 가득 담아 주었다.


40년이 지난 요즘은 부끄러운 행위였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돈이 아쉬워 부끄러움을 모르고 지냈다.


광주 1980년 5월 18일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고 있지만 망원 37호 활동할 때는 광주사태 또는 광주폭동으로 불렀다.


망원이 본 것은 민간인 복장을 했지만 웬만한 군인보다 날렵했다. 그 당시 날렵한 민간인이 광주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고 보고했는데 40년이 지나 확인하니 공수부대원 중에서 삐쩍 마른 자들을 뽑아 편의대로 활동시킨 것이었다.


사복을 입었지만 북한군처럼 보이는 이 편의대원을 보수꼴통들이 북한군 광수 1호 2호 번호를 붙여 국민들을 광주사태에 북한군이 잠입한 것으로 책도 만들었지만 기밀 해제된 미 정보부대 문서에서도 북한군 침투가 아니고 편의대를 운영한 것으로 명백해졌다.


편의대를 운영했다고 보안사령부 505 보안부대에 근무했던 허정환이 이미 10년 전에 기자회견을 했어도 광주사태를 유발한 측에서 교묘하게 기록을 조작 은폐하여 40년이 지나서도 진실에 접근을 어렵게 했다.


편의대는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군인을 사복차림으로 적 지역에 들어가 정보수집과 선무 선동 유언비어 생산 전파를 했다.


정식 명칭은 편의공작대인데 편의대로 줄여 부른 호칭이다.


광주에서 편의대를 운용한 기록은 전교사에서 발행한 광주소요사태분석 1980년 9월 기록물 100쪽에 나타나있다.


보안사령부에서 은밀하게 만들고 일반에 공개 못하는 책 한 권이 있는데 5 공화국전사라는 것이 있다. 그 책 1677쪽에 보면 2군 사령부에서는 5월 22일 봉쇄작전 실시와 더불어 사령관의 명에 의해 편의대를 투입 제파식 공격을 감행하고 사태주모자를 검거하고 주요 목표를 확보함으로써 광주사태를 근본적으로 평정했다고 썼다.


5 공화국전사는 1692쪽에 재진압작전 수립 시는 계엄군 측 편의대들이 시내 침투하여 파악 보고한 무장폭도 주동자급 검거에 매우 중요한 참고자료로 활용되었다고 기록되었다.


편의대는 정확한 첩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가발과 사복으로 시위대와 유사한 복장을 하고 시위 주동자의 인상착의 특이점을 알려주어 주동자급 검거에 기여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이름 짓기 전에는 광주사태로 불렸다. 광주 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의 보고가 맘에 안 들었는지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홍석철 대령을 사무실로 불렀다.


사령관님 부르셨습니까라고 인시를 하자 홍 전무가 광주로 가서 수고 좀 해야겠어. 이재우 혼자 광주 감당을 못해라고 했다. 여기서 전무는 회사의 전무가 아니고 군인이면서 민간인을 상대하는 정보사와 보안사 인원에 대한 가장 직급이었다.


홍 대령을 내려보내면서 보안사 기조실장 최예섭 준장과 최경조 합수부 수사국장 박정도 중앙정보부 과장까지 총 4명을 광주 보안부대로 보냈다. 이재우 대령은 차라리 보직해임을 시켜주거나 서울 보안사 한직이라도 먼저 명령을 내주고 4인방을 보냈으면 덜 서운할 텐데 이건 현직 부대장이 얼마나 못났으면 부대장실에 훈수꾼을 네 명이나 오게하나 부하들 보기가 부끄러웠다.


홍 대령은 그 시절 대공분야 자타가 공인하는 일인자였다. 출신도 육사에 몇 안 되는 광주일고 출신이라는 것이 안성맞춤이었다.


광주에 혈연 학연 지인이 많아서 광주시내 호텔방 안에서 전화만 돌리면 동서남북 천상 지하까지 정보수집이 다 되었다.


2007년도 발행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홍 대령 항목에 보면 홍 대령은 광주시내로 잠입 정보수집 및 특수활동을 벌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광주시 사동에 비밀아지트를 구축하고 5월 21일부터 광주사태가 완전히 진압되고도 후속처리가 있었는지 6월 8일까지 광주서 활약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 3월 13일. 조사내용 한용원 증언에 의하면 홍 대령이 보안사 17명 대원들과 함께 광주에 갔고 공작적 차원의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이재우 대령이 전두환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최경조가 파견되었다고 진술했다.


공작편의대인데 줄여서 편의대라고 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군인들이 사복차림으로 적지역에 들어가 몰래 활동하는 것이다


공작편의대 임무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들어 공수부대를 투입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는 지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의 질서 의식이 높다 보니 쉽게 폭도가 안되자 폭도를 유발한 것이 강경진압이다.


당시 광주에서는 전쟁 같은 일을 치렀지만 은행이 털리거나 금은방이 도둑맞아 신고된 것이 한 건도 없었다.


세계적으로 유사한 난리통에 도난 한건 없었다고 CNN도 감탄했다. 선진국이고 세계 경찰국가를 자처하는 미국도 폭동 후에는 꼭 도난 신고가 많았는데 5.18이 시작해서 평정되는 날까지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라 지구상에 가장 높은 도덕으로 무장된 민주시민이었다.


45년이 지나도록 진실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우리 국민이 비겁해서이다. 비겁의 원조는 친일파 청산 없이 친일 후손들은 3대 4대 떵떵거리며 실고 독립군 후손이나 독립군에 거 아편 장사로 번돈을 쪼개어 보낸 할아버지의 손자는 내 집 하나 없이 살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름만 민주지 거기 어디 민주가 들어있어라는 소리 듣는 이유도 유공자 명단이 친일행위자처럼 옥석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45년이 흘렀다. 양심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전우원처럼 광주에 가서 시죄하라. 우환이는 할아버지 잘못을 손자기 빌었는데 짱돌 맞을 각오로 찾은 우원이를 광주 시민은 같이 울고 주먹밥을 같이 먹었다.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하라 해도 일본이 무시하는 이유는 이광수가 말한 것처럼 조선 놈은 사색당파에 절어서가 아니라 역사의식이 없어서이다.


만약에 광주에서 그 시절 정말 본의든 타의든 광주사태에 사과를 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나라가 분열에서 통합으로 이어지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사과하라 소리 안 해도 사과한다는 것이 1995년 12월 14일 숨을 거두기 직전 가경취숙 어른의 말씀이었다.


특전사는 임무 중에 적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적을 교란하고 적의 주요 직위자를 납치하거나 납치가 불가시는 사살한다고 교육시켰다.


홍 대령은 특전사에서 고도로 편의공작교육을 받은 김광수외 16명을 지원받아 광주로 갔다. 그는 광주의 명문 광주일고 출신이었기에 광주 일원에는 지인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면 광주의 시내상황이 손금 보듯이 알 수 있었다. 전두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명은 호남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김대중 선생을 체포 구금함으로써 광주지역에 데모가 과격하게 일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저녁에 광주보안부대 서 휘남 중령은 보안 수사관들에게 세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오늘밤 24시에 전남대와 조선대에는 공수부대가 주둔할 것이다. 공수부대 동행하는 보안담당관을 찾아서 상황보고를 특전사 보안부대로 하지 말고 광주 보안부대로 하라. 이유는 이중으로 보고가 올라가면 서울 사령부에서 혼선이 생기니 처음부터 보고는 광주보안부대로 일원화한다.


다음은 부대 동정 파악 시 공수부대 지휘관 동향을 예의주시하라. 이유는 작년에 12.12사건 때 공수여단이 쌍방교전 상황이 될 뻔했다. 광주에서 특전사 상호 교전이 발생하면 안 된다.


마지막으로 공수부대가 주둔하는 사실을 내일 아침까지 외부에서 알면 안 된다. 공수부대 도착 시 학내 학생들과 교직원은 일정장소에 모아놓고 그들의 입을 봉하도록 하라였다. 이 지시사항으로 볼 때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는 정부 발표 이전에 특전사 이동 지시를 한 것이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하는 신군부는 45년 동안 국민들을 기만했다. 광주 5.18과 지휘계통상 책임이 없다고 하는데 없는 것이 아니다. 보안사령부가 세월이 흘러 문재인 정부 들어서 안보지원 사령부로 개명된 이후는 몰리도 명칭이 보안사령부 시절은 박정희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제일 겁나는 일이 새로운 쿠데타였기에 보안사령부 임무에 국가가 전시나 위급시 작전조언을 할 수 있고 작전 조언에 불응 시는 선조치하고 보고하라고 되어있다.


행동을 한 것은 특전사 공수부대원이지만 윗대가리 싱크탱크는 광주보안부대로 파견 나간 홍성률 대령 최예섭 준장이었다.


광주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은 5.18 기간에 허수아비 부대장이었다. 보안사령부로 정보상황보고도 피견온 최예섭이 보고했다.


홍 대령은 시내에서 공작편의대원을 운용하여 사전에 시위 주동자급을 파악 인상착의 보고를 받아 특전부대원이나 지역 향토부대 계엄군이 체포가 용이하도록 정보제공을 했다. 이것은 가경취숙 어른이 한 말인데 그 당시는 믿을 수 없었는데 세월이 좋아져 검찰이 5.18과 12.12관련자를 수사한 기록을 보고 도대체 언론통제 시기에 가경취숙은 어떻게 누구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까 궁금하지만 어른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도 출처를 밝히지도 않고 당신 돌아가시고 만 30년이 되거든 장손 이름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발포 문제만 해도 그래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자위권 발동이고 계엄사령관에게 발포 명령자로 뒤집어 씌우는데 이주 영리한 너구리 같은 놈이라고 했다. 영리한 너구리는 북한 어린이 만화영화 제목이다. 만화영화를 보다 보면 너구리의 영리함에 감탄한다.


자위권이라는 것은 경계서는 초병에게 초병이 감당 못할 무력이 올 때 지휘계통 보고 없이 일단 쏘고 사실 이만저만해서 쏘았습니다 보고하는 것이 자위권이지 1980년 광주 도청 앞의 발포는 사전에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하고 애국가 연주소리에 사격을 한 것을 누가 자위권으로 보겠어. 이건 사살 명령이야. 더구나 앉아 쏴는 겁주는 하늘로 향하는 위협사격이 아니고 살인사격이라고 하시며 눈물을 흘리고 더 이상 말씀을 못하셨다.


나는 밖으로 나왔다. 할아버지가 울적할 때 특효약은 할머니가 강원도 횡성 옥수수로 만든 밀주였다. 국자로 여섯 번 반을 뜨면 넘치지 않게 가장 많이 담는 것이었다.


한 잔 드시죠.

음 역시 장손은 장손이야. 다른 녀석들은 할아비 울적하면 강냉이 밀주가 약이라는 것도 모를 거야 하셨다.

예.

강냉이 밀주 노랗게 익은 술을 한잔 드시고 말씀을 하셨다. 할아비 죽기 전에 알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하거라. 내년 이때쯤 내가 실아있을지 모르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오. 백세까지 사셔야죠.

내 나이 94세면 많이 살았다. 6형제 중에서 다들 60 내외에 가고 나 혼자 구순을 넘었구나.

광주에 독침 정말 북한군이 한 짓일까요.

북한군이 광주어 왔었으면 이미 이 니라가 김일성 수중에 들어갔지 전두환 노태우 둘이 대통령을 했겠어. 인생도 매 고비마다 선택이 중요하고 나라도 선택이 중요하다.


뉴스에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도청에서 일어난 독침은 보안부대 놈이 끄나풀을 심어 일으킨 자작극이다. 서 모 보안사 광주지사 근무하는 자가 한 계급 더 올라가려고 시민군 장계범을 포섭해 정항규를 시켜 입으로 빨아주게 시켰는데 그 둘을 전남대 부속병원에 입원시킨 것이지 북한군은 미군이 눈에 불을 켜고 항공정찰과 인공위성으로 감시해서 비행기 한대 배 한 척 못 움직였어라고 하셨다.


5.18 당시 광주보안부대 서휘남 중령은 홍남순 변호사를 광주사태 내란 수괴 수행자로 지목했다.


김대중으로부터 1억의 돈을 받아 전남대와 조선대 학생회장에게 나누어주고 시위를 유도한 것으로 시나리오를 짜고 수사관들에게 홍남순 변호사를 체포 심문조서를 그렇게 꾸미는데 서 중령의 하급 수사관 허장환이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1. 홍남순 변호사는 광주 출신이 아니다. 전남대 조선대 총학생회장과는 연관이 없다.


2. 홍 변호사는 광주희생을 막기 위해 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한 분이다.


3. 광주사태는 공수부대 과잉진압이 시민 저항을 불러온 것이지 사전 조직을 만들어 시위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4. 홍 변호사 사무장이 김대중에게 돈을 받아 홍 변호사에게 전달 정황이 사실과 다르다는 이의 제기하자 서 중령은 권총으로 상관에게 항명한다고 처단하겠다고 하자 쏠 테면 쏴봐 했다.


5.18이 평정되고 서 중령은 대령 진급을 했고 허 수시관은 군복을 벗었다.


43년이 지나도록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은 광주백서라는 책이 광주이야기의 원조인데 감자탕은 원조집이 돈을 잘 버는데 광주백서는 원조지만 아는 사람이 별로 없고 책도 도망 다니고 숨어 지내면서 만든 것이라 조잡하다.


5공이 들어서기 전의 역사라고 5 공전사가 있다. 똑바로 된 책이라면 발행과 동시에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에 납본하는 것이 상식인데 딱 3부를 만들어 전두환에게 1부 보안사에 1부 있다는 소문만 들었지 가경취숙도 원본 구경을 못했다.


1980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보안부대장 이재우 대령이 있음에도 뭔가 미흡한 생각이 들어 보안사 에이스라고 불리던 홍성률 대령을 파견했다. 보안사 기획조정실장 최예섭 준장 힙동수사본부 최경조 수사국장 중앙정보부 빅정희 서기관인지 부이사관인지 직급을 알 수 없는 사람까지 4명을 광주에 파견했다.


홍성률은 광주일고 출신이었다. 친척도 많고 동창들도 많아서 전화 한 통이면 광주 동서남북 소식을 파악할 수 있었다.


최예섭 준장은 이재우 대령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사실상 광주사태 전기 간을 보안부대장 역을 했다. 1996년 12.12와 5.18 사건 검찰조사에서 광주시태 전기 간을 최예섭이 보안부대장 역할을 하였고 진압상황 보고는 그가 보안사로 직접 했다고 진술했다.


광주에서 운용한 공작편의대를 지만원이 북한군 광수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특전사가 전쟁준비는 잘한 것 같다. 북한에 침투해 북한군인 것처럼 하는 편의대 훈련을 얼마나 잘했으면 광주에서 활동이 북한군 소행으로 보였을까.


만약 북한군 광수가 맞다면 평정 후에는 시신을 북으로 보냈어야 한다. 아직도 일부 유튜브에서 광수를 그대로 인용하고 재생산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43년이 흘렀으니 그때 악역들 일부라도 참회나 양심선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지.


1980년 5월 25일 광주에서 시민군 장계범이라는 사람에게 북한군이 독침을 찔렀다고 정향규라는 동료 시민군이 입으로 빨아주다 번진 독에 전남대부속병원으로 입원시켰다.


세월이 흘러 그 독침 사건은 북한군 광수가 한 것이 아니라 특전사에서 공작편의대를 운용한 자작극이었다. 독침 맞은 장계범도 독침을 빨아준 정향규도 광주사태 진압된 후 학생수습 위원장 완장을 찬 김창길 모두 특전사에서 포섭해 운영한 공작편의대들이었다.


전두환을 정점으로 신군부가 광주폭도들 진압한 것이 북한군과 싸운 정도 유공이라고 무공훈장 수여 준비를 하라고 지시받은 가경취숙 준장은 적과 싸워야 무공훈장이지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평정작전 참가자에게 무슨 훈장이냐고 하고 전역을 했다.

세월이 흘러 노무현 대통령 시기에 잘못 수여된 훈장에 대하여 삭탈을 했다.

40년이 흘렀으니 그때 악역들 일부라도 참회나 양심선언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싶다.


광주 5.18 이야기를 듣는데 할머니가 밥상을 들고 오셔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그날이 1994년 12월 14일이고 할아버지는 1995년 12일 14일 돌아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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