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함문평

‘나는 청년시절 조국수호를 위해 군문(軍門)에 뛰어들던 때의 초심을 되새겼다.

대의를 살펴 판단했고 내 삶의 신조가 가리키는 대로 결심했고, 내가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했다. 12.12다.

그 일은 나의 주저 없는 선택이었고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전두환 회고록 제1권, P.18)

나는 ‘솔’이다. 내 이름에 따옴표를 한 것은 솔로 부르면 요즘 북한의 비운의 황태자 ‘김 정남’이 말레이시아에서 독극물에 의한 사살을 당하고 그의 아들 ‘김한솔’이 미지의 세상으로 안전하게 탈출했다는 뉴스 때문에 ‘솔’이 김한솔을 지칭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단 나를 소개하자면 우리 부모님은 지금의 담배 인삼 공사의 전신인 전매청이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서거하시고 우리나라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0 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최 대통령은 처음부터 자신은 임기를 다 채울 생각이 없다고 발표했다. 헌법 그야말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상당수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유신헌법이 시대에 맞지 않다고 최 규하 대통령은 생각한 것이다.


1980년 8월 16일 최 대통령이 돌연 사임을 하였다. 자신이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헌법을 개정하여 민주 헌법이 탄생되면 그 절차에 따라 새 대통령을 뽑고 자신은 물러나겠다고 하였는데 새 헌법을 만들기도 전에 사임을 했다. 그리고 9월 1일 전 두환 보안사령관이 대장으로 전역을 하고 역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을 선출했다.

전 두환 대통령의 취임을 경축한다고 경축 담배를 출시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름은 ‘솔’이었다. 한글 ‘솔’ 자 좌우측으로 봉황무늬가 그려져 있다.

경축 제11대 대통령 취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하얀 담배 과고에 빨강 바탕에 솔이 눈부시게 빛났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외웠던 국민교육 헌장의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처럼 나는 전 두환 대통령의 제11대 대통령 취임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그때부터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것을 기록하였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 12.12군사반란이 발생했기에 나는 12.12. 시기의 이야기는 가경취숙과 손자 함문평 대화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를 들은 대로 기록했다.


제목 바로 밑에 전 두환 회고록 1권의 18 쪽에서 인용하였듯이 12.12는 부득이 전두환의 일하던 방식대로 행동하여 발생한 사건이었다.


나이 50 대 중반인 함상천과 이영구는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 앞의 수원식당에서 만났다. 시흥동에 오면 은행나무라는 지명이 있다. 은행나무 옆 동네는 별장동네다. 왜 별장동네냐 하면 해방 후 초대 수도청장 ‘창랑 장택상’의 별장이 시흥계곡에 있었다. 그래서 별장동네라고 했는데 지금은 공원으로 변해 별장은 찾을 수 없다.

은행나무는 수령이 천 년은 안 되고 900 년은 넘었다. 어른 셋이 손을 잡고서야 한 바퀴 돌 정도의 나무다. 은행나무는 너무 늙어 몸통만 남고 가지는 다 절단되었다. 절단된 가지에서 새순이 나와 보통의 나무와는 좀 분위기가 다르다. 바로 옆에 조선시대 이곳이 서울시 금천구가 아닌 경기도 시흥현 시절의 시흥현령 중에 백성의 존경을 받은 4 명의 현감 송덕비가 있다.


맨 좌측이 김병이 현령으로 1876년 1월부터 1878 년 3월까지 백성들을 청렴하게 돌봤다고 ‘청덕애민 선정비’가 세워져 있다. 그 우측으로 이양택, 조동우, 방천용까지 송덕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은행나무를 중앙에 두고 5 거리다. 3 개의 도로는 대형버스가 다니는 길이고 2 개의 도로는 마을버스나 승용차만 다니는 도로다. 은행나무 바로 등 뒤는 까멜리아 24 시 사우나가 있고 지하는 은행마트가 있다. 길 건너 24 시 SS 마트가 있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수원식당이 나온다. 수원식당 건물에는 큰 도로 쪽으로 롯데리아, 온 누리 약국, 쌀 통닭집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구야! 여기야 여기!”

“상천아 반갑다!”

“사장님, 여기 도가니탕 2 개와 소주 한 병 주세요.”

“파랭이?”

“에이 사장님, 상천이가 파랭이 먹는 거 봤어! 빨갱이로!”

“빨강이 없네~ 파랑뿐인데.”

“그럼 우리 손님이 다른 식당에 가라고?”

“아니야, 바로 사 오지.”

“이거 전두환이 회고록 내더니 수원식당가지 술 파랭이만 팔고 빨갱이는 안 파는 거야?”

“아니, 이 사장 왜 그래. 금방 사 올 테니 잠깐 기다려.”

“발리 사오 슈!”


영구와 상천은 내가 태어나기 전 12.12 당일 고 3이었다. 영구는 흑석동의 검은 돌 고등학교 3 학년, 상천은 시흥동은 은행 고등학교 3 학년이었다. 고등학교가 서로 다른데 영구와 상천이 친구가 된 것은 시흥동의 동네 폭력조직 ‘산이슬파’의 조직원이었다. 산 이슬파의 맨 위 대장은 오성경이었다. 오성경은 80 년대 삼청교육대에 잡혀가서 교육 중에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조직의 우두머리가 죽자 중간 보스들이 모두 저 잘났다고 다투다가 조직이 모두 와해되었다. 지금은 시흥동 은행나무에 와서 산이슬파를 찾으면 다들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지만 영구와 상천이도 오 성경이 잡혀갈 때 부대는 다르지만 삼청교육대 입소를 했다. 오 성경은 강원도 화천 근처의 부대로 잡혀가고 영구와 상천은 소사 33 사라고 하던 지금의 17 사단으로 잡혀갔다. 그 소식을 들은 상천의 아버지 함종우 장군이 수도권의 군단장으로 근무하고 있어 상천이만 뺄 수 없어 영구를 함께 빼준 것이다.


함 장군은 12.12에 적극 가담한 것도 아니지만 노태우 9 사단장의 예하부대 1 개 연대병력이 행주대교와 삼송리를 통과할 때 벽제 군단 지휘소에서 검문소를 개방 못하게 하고 9 사단 병력을 되돌릴 수 있었는데, 우리 군인끼리 충돌이 우려되어 충돌 없이 하느라 검문소 통과를 묵인했던 것이다. 함 장군이 이미 12.12 주동세력이 성공할 것 같으니 기회주의자로 전 두환 보안사령관 편을 들었다고 정 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추종한 장군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괴로워했다.


반대로 전 두환 보안사령관 측에서는 함 장군이 검문소에서 시간을 끌게 만들어 하마터면 쭉 쒀서 개에게 줄 뻔했다고 함 장군을 12.12가 지나서 한직으로 보냈다.


함 장군은 최 규하 대통령이나 한미연합사령관의 명령도 없이 부대를 이동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생각해서 최초 행주대교 검문소에서 부대 이동 근거 명령을 보고하라고 한 것이 시간을 끌었다는 빌미를 준 것이다.


9 사단의 1 개 연대병력이 경복궁 30 단의 외곽을 둘러싸자 이미 12.12 사건은 경복궁의 보안사령관 측으로 기울어졌다. 함 장군에게는 12.12 사건이 마음에 탐탁하진 못했지만 더 큰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정도에서 정리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전역을 해서 태안 고향에 가서 낚시나 하고 회고록이나 쓰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역신청서는 수리가 안 되고 강원도 1 군사령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초등학교부터 고 3까지 부반장은 거의 있으나마나 존재처럼 부군사령관도 거의 사령관 휴가 갈 때 직무대리 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함 장군의 아들 상천은 아버지가 장군이라는 것을 시흥사거리에서 말할 수 없었다. 삼청교육대 잡혀가기 전에는 장군의 아들인 줄 아무도 몰랐다.


시흥사거리 ‘산이슬파’가 20여 명이 삼청교육대 동부전선 서부전선 나누어 갔는데, 어느 날 상천과 영구 둘만 시흥사거리에 나타났다. 그 무시무시한 삼청교육대에서 누구의 힘으로 나왔느냐? 고 동네 어른들이 물으면 몰라요. 아니면 외할아버지가 힘써주신 모양이에요.라고 대충 둘러댔다. 하지만 발 없는 말 천리 간다고 상천이 아버지 함 종우 장군이 부천 소사 중학교 역사교사 최송선과 눈이 맞아 결혼식도 안 올리고 동거를 하다 태어난 것이 상천이다.


함 종우 장군의 고향은 충청남도 태안이었다. 함 종우 장군의 아버지 함 재석 옹은 일제강점기 만주의 독립운동을 하던 김구 선생과 김좌진 장군에게 태안일대의 농지를 처분하여 군자금으로 만들어 은밀하게 전달했다.


종우는 만주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만주의 생활은 가난했다. 하지만 함 재석이 한학에 밝아 틈틈이 아버지에게 배운 한문 실력과 일본어 공부도 했다. 친일을 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운 것이 아니라 일본을 이기기 위해 일본어 공부도 했다.


만주 군관학교 입학하던 해에 일본이 패망하고 귀국 직전에 함재석 옹은 돌아가셨다. 어머니와 고국으로 돌아온 함 종우는 태안에 친척들의 도움을 받고 국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6 기로 임관했다.


박정희를 저격한 김 중앙정보부장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태안에서 함 장군 하면 다 알아주는 상태였는데 아내가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키우다 보니 함 종우는 전후방 각지를 혼자 다니면서 근무를 했다. 그러다가 서울 근교에서 근무할 때 시흥사거리에 사는 소사중학교 역사교사 최송선을 알게 되었다. 함 장군과 최 송선 사이에 태어난 것이 상천이다. 일부일처제의 나라에서 혼외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호적은 태안의 본처의 막내아들로 등재했다.


“사장님, 소주 빨갱이를 만들어 오는 거요?”

“아니, 항상 소주가 파랭이가 부족하고 빨갱이가 남아도는 데 오늘은 은행마트에도 빨갱이가 부족하네!”

“사장님 은행마트에서 사다가 손님에게 삼천 원 받고 팔면 불법아녀?”

“에이 장군의 아들이 왜 그래?”

“장군은 뭔 썩어빠진 장군이야, 아버지는 국립 대전 현충원 가기 싫다는데 억지로 동네 이장, 면장, 군수 국회의원 놈들이 강제로 현충원에 안장시켜 지금도 맘이 불편하실 건데.”

“상천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 아버님이 삼청교육대 빼줘서 감사드린다고 해야 하는데.”

“돌아오는 현충일에 우리 아버지 묘소 참배 같이 할래?”

“그래.”

“야, 그건 그렇고 요새 뉴스 보다가 생각한 건데, 최순실이 모습이 꼭 네 어머니 최 송선 선생님 꼭 닮았더라.”

“그래, 나도 하도 신기해서 어머니에게 물으니까 최태민이 일제강점기 북한에서 친일 순사한 것을 숨기려고 호적을 세탁한 모양이라고 하셔. 외할아버지가 최 재석인데, 그 윗대가 계속 올라가면 최태민 이름도 나온다는 거야.”

“하긴 해방 이후 북한은 김일성이 친일 행위자 처단을 하였고, 우리 남한은 이 승만이 친일 경찰을 그대로 고위층에 채용했으니 북한에서 친일 행위자가 많이 목숨 걸고 내려왔겠지.”

“그 당시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이북 5 도민회에 가서 아는 분들 증인만 세우면 주민등록, 학교 졸업증서 다 만들 수 있었다더라.”


매일 9 시 뉴스 땡! 과 동시에 TV화면에 등장하는 대머리 전두환 대통령이 상천은 너무 보기 싫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을 갈 것도 아니고 삼청교육대에 붙잡혀 갔다가 아버지 장군의 인맥으로 나오긴 했어도 시흥 사거리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건설일용직 근로자로 나섰다. 처음에는 일당 잡부를 하다가 목수 팀장의 눈에 들어 목수의 길을 가게 되었다.

1980 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30 년간을 목수를 했다. 전국 어디든지 건설현장에 목수팀장이 가자고 하면 다 따라다녔다. 그러다 2016년 5월 17일 강원도 화천에서 모 건설사의 아파트신추공사장에서 발판이 결속체결이 똑바로 안 되어 한쪽만 묶고 한쪽은 풀려 발판이 뒤ㅣ집어지면서 지상 2층에서 지하 3 층으로 떨어졌다. 3 명이 떨어졌는데 한 명은 철근에 안전벨트가 걸려 구사일생으로 살았고 한 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상천은 발목뼈가 부서졌다. 화천의 삼성병원에서도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긴급 환자호송 앰뷸런스를 타고 시흥대로 독산동 새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새움 병원서 수술을 하고 다음 수술 환자를 위해 병실을 이동하라고 해서 고려고든 병원 107호에 이송되었다.


이영구는 역시 건설일용직 근로자로 해체를 하다가 2016년 8 월 19 일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주상복합건물 신축공사장에서 대퇴부 골절로 병원서 수술을 하고 5주의 병원치료 후에 역시 병실을 비워주기 위해 이송하여 고려고등 병원으로 왔다.


처음에는 다친 다리가 부끄럽고 살아갈 길이 막막해 자살을 생각했었다. 고려 고등 병원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62 년 호랑이띠 함상천과 이영구가 재회를 했다. 인생 마지막 학교 고려고등 정형외과에서 만난 것이다.

이영구는 103 호 함 상천은 107 호였다. 병원에서 산재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나를 찾아가는 시간에서 이 원지 강사가 환자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어 친해졌다. 병원치료가 끝나고 통원으로 물리치료를 하게 되었다. 수원식당에서 고려고든병원 환자 친목회를 하였다.


함상천 어머니 최 송선은 소사중학교 역사교사였다. 상천 아버지 함 장군이 1983 년 돌아가시고 하도 답답하여 교사라는 직업을 속이고 김포공항 근처의 청명 철학관에 가서 청명거사에게 사주를 봤다.


청명거사는 최송선의 소나무 송(松) 자가 여자 이름에 쓰면 일찍 과부가 된다고 말했다. 최 송선은 아들 함상천의 생년월일시를 내밀었다.

이름 함상천, 전생에 호랑이던 놈이 이생에 금계로 태어났구나. 처음에는 고난이 있고 뒤에 길함이 있다. 고향 땅은 이롭지 못하니 고향을 떠나 대처로 가면 대성하겠다.

부모 형제, 처자의 덕은 없다. 평생 고독하게 살아갈 팔자다. 한번 부르면 백가지로 대답하고 가는 곳마다 횡재와 복이 있다.


초년의 운세는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다. 천권성이 들었으니 어렸을 때는 분주하리라. 권위가 사방에 있으니 가히 천 사람을 사귀게 된다.

학문을 부지런히 배우면 관록을 얻게 되리라.

천성이 맑고 활달하니 스스로 따르는 사람이 많다. 천 액성이 들었으니 삼십 전에 해로움을 보리라. 성품에 고집이 많으니 친한 사람이 자연히 멀어진다.

동쪽으로 가나 서쪽으로 가나 바람과 서리가 거듭되리라. 천지간에 정이 있으니 자수성가하리라.


함종우 장군과 정식 결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야합으로 태어난 자식이라 태안의 본처의 자식 함 상윤, 상철다음으로 셋째 아들로 상천을 입적을 하였다. 아버지 고향 태안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서울 금천구 시흥동 은행나무에 터전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면 사주팔자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사주에 사(巳)가 있으면 치아가 고르지 못하다고 했다. 어머니 최 송선의 치아가 덧니 투성이니 아들 상천이의 치아가 못난이 옥수수 같다. 아버지 함 장군을 닮아 외모는 튼실했다. 사주에 역마살이 있어 전국을 돌아다닌다더니 정말로 공사현장 따라 부산, 대전, 대구, 청주, 전주, 익산, 영월, 화천 등지로 돌아다니면서 목수를 했다.


강원도 철원에서 군부대 공사를 하는 중에 상천은 아버지 함 종우 장군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병명은 간 경화라고 했다. 태안 본가에 도착하니 큰형 상윤과 작은 형 상철은 이미 삼베옷 상복을 입고 곡을 하고 문상객을 맞고 있었다. 시골집 마당에는 전 대통령이 보낸 조화가 맨 앞에 서 있고, 태안 군수, 지역 국회의원, 새마을지도자회, 지역 경찰서 등에서 조화를 보내왔다.


늦게 참석한 상천은 재빠르게 삼베옷으로 갈아입었다. 태안에는 강릉 함 씨의 문중 산이 있었다. 아버지는 큰 형과 작은 형에게 죽으면 국립모지로 가지 말고 선산에 묻어달라고 했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고 했다. 작은 형 상철이가 아버지 청춘을 바쳐 군인의 길을 가셨고 장군이 되셨는데, 국립묘지 안장이 가문의 영광 아니냐? 고 물으니 아버지는 그래 장군이면 가문의 영광이 맞지만 나는 선배 장군들 뵐 면목이 없으니 현충원 말고 함 씨 문중 산에 비석도 세우지 말고 묻어 달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12.12 사건 때 행주대교와 삼송리 검문소 두 곳 중 하나만이라도 똑바로 통제했으면 12.12가 전 두환 보안사령관 맘대로 정 총장을 연행하고 나중에 최 규하 대통령 하야까지 불러오는 불충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국립묘지 들어가면 선배 장군님들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물론 이 사실은 장례식이 다 끝난 다음에 형들로부터 들어 상천은 알게 되었다. 함 장군은 돌아가시기 전에 술만 마시면 괴로워했다. 정권찬탈을 막지 못했는데 죽어 선배 장군들을 무슨 면목으로 보겠는가?


보안사령관 별 둘의 전두환이 별 넷 정승화를 어떻게 체포하고 짜인 각본에 따라 최규하 대통령 하야와 통일주체국민회의 소집하여 별 두 개를 더 달고 네 개로 전역하여 청와대로 입성하는 일련의 과정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듯했다.


1980 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했다.

대통령은 하야 발표를 하고 다음 날 청와대에서 서교동 자택으로 이사를 했다.


8월 27 일 소집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전 두환 예비역 대장을 추대했다. 9월 1일 제11 대 전 두환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여 경축 담배 <솔>이 출시되었다. 태극기 앞에서 전두환은 국헌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 증진에 노력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한다고 선서를 했다.


나 <솔>도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는 우리나라 담배 중에서 최고의 질이 좋고 베스트셀러 담배가 되었다.

일반 사회에서는 <솔>로 팔려나가지만 특수하게 나가는 경우도 있었다.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습격하고 난 후에 북한의 김신조를 파견한 124 군부대에 대항하는 우리 부대를 만들었다. 일명 그린베레 부대라고 불리는 ‘설악 동지회’ 요원들에게 나 <솔>은 솔이라는 내 이름이 무명으로 답배필터나 담배 과고에 아무런 표시 없이 제공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1980 년대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었다. 삼청교육대 구경도 했다.


<솔>은 제12. 13 대 대통령 이. 취임식도 목격했다. 여의도 광장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단임제를 실천하고 떠나는 전 두환 대통령과 1987년 역사적인 직접 투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아름다운 광경을 봤다.

신구 대통령을 보기 위해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행사장은 인산인해였다.

거리마다 ‘단임 실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 두환 각하 내외분 만수무강을 기원합니다’ 등의 현수막과 피켓이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 이 승만 대통령은 4.19 데모로 청와대(당시 경무대)에서 쫓겨나 해외 망명을 하였고, 박 정희 대통령은 장기 집권에 성공했으나 임기 말에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갔다. 장면, 윤보선 대통령 시기는 데모로 해가 떠서 데모로 해가 지는 날의 연속이었다. 어수선한 난국에서 5.16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불분명한 상황으로 하야 했다.


박 대통령 서거 후 최 규하 대통령은 자의 반 타의 반 하야를 했다. 주어진 임기를 꽉 채우고 내 발로 청와대를 걸어 나가는 최초의 대통령이 전 두환 대통령이다. 그래서 시인 미 당(未堂) 서 정주는 전 두환 대통령을 단군 이래 최고의 통치자라는 칭송 시를 쓰기도 했다.

전 두환 대통령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未 堂 서 정 주-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도 맑게 만드신 이여

이 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 하신아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새 맑은 나라의 새로운 햇빛처럼

임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참된 자유와 평화의 번영을 마련하셨으니

잘 사는 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물가부터 바로 잡으시어

1986년을 흑자 원년으로 만드셨나니

안으로는 한결 더 국방을 튼튼히 하시고

밖으로는 외교와 교역의 순치를 세계에 넓히어

코리아의 국위를 모든 나라에 드날리셨나니

이 나라 젊은이들의 체력을 길러서는

86 아시안게임을 열어 일본도 이기게 하고

또 88 서울올림픽을 향해 늘 꾸준히 달리게 하시고

우리 좋은 문화 능력은 옛것이나 새것이나

이 나라와 세계에 떨치게 하시어

이 겨레와 인류의 박수를 받고 있나니

(이하생략)


정말 세계에 보기 드문 칭송 시다.

1988년 2월 25일이 역사적인 날로 기억되는 것은 바로 평화적으로 대통령을 이임과 취임이 한자리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의도에는 KBS, MBC, SBS, 연합통신, 내외통신, AP, UPI 등 세계적인 언론이 모두 모였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국민의례가 거행되고 대통령 선서, 축하노래, 이임사, 취임사로 이어졌다. 이임 대통령의 리무진이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리무진은 연희동을 경유하여 백담사로 향했다. 이임한 전 두환 대통령 내외는 7 년 동안 단임 대통령 기간 휴식이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퇴임하면서 바로 백담사에 가서 휴식을 취하기로 약속이 되었다.


백담사 주지였던 일해 스님이 과거 전 두환 대통령이 1 사단장 시절에 군대의 법당이던 불이사(不二寺)의 법사로 봉직했다. 그 인연으로 전 두환 장군은 머리가 복잡하고 문제가 해결 안 되는 일이 있으면 일해 스님을 찾아가 환담을 했다. 그때마다 스님은 아주 시원한 샘물 같은 지혜를 주셨다. 아니 전 두환 장군의 내면의 이미 간직했던 총기를 밖으로 분출시켰다. 제1 사단장을 마치고 국군 보안사령관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한 사람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었다.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는 문홍구 수도군단장을 차 지철 경호실장은 이 재전 장군을 보안사령관으로 추천하려 했다. 노 재현 장관은 전 두환 장군이 1 사단장으로 근무하면서 제3 땅굴 발견한 공로와 평소 박 정희 대통령이 전 두환 장군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추천한 것이다.


보안 사령관으로 업무파악을 하고 열심히 대통령에게 보고다운 보고를 하려고 준비하는 시점에 김 재규 정보부장이 박 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는 10.26 사건이 터진 것이다. 김 재규와 정 승화 육군참모총장과의 친분이 깊어 사실상 조사를 해야 하나 최 규하 대통령은 국방장관의 배석 하에 결재를 하겠다고 하고 국방장관의 행방은 국방부에 없고 난감한 상태가 되었다. 순간 1 사단장 시절 일해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산은 높으나 하늘 아래 있고, 물은 아래로 흐르나 바다 위에 있구나!’라는 말을 되새기자 보안사령관은 내면의 총기가 일어났다.


밀어붙이자.


여기서 멈추면 죽음이다.


12.12 전 승화 육군 참모총장 체포 작전은 강행되었다.


문제의 10.26 사건은 어찌 보면 예견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 지철 경호실장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 경쟁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의 파워게임은 국정농단 그 자체였다. 사실상 차 지철 경호실장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차 지철을 제거하고 국정농단을 혁파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하면 군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태안 함동우 장군의 빈소에 장군의 관을 병풍으로 가리고 상윤, 상철, 상천 3 형제는 삼베옷을 입고 곡을 하였다. 청와대 비서실장이 전 두환 대통령이 보낸 조화와 조의금을 부의함에 넣고 분향을 했다. 함 씨 형제들과 비서실장이 맞절을 했다.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오지 못한 것을 유감이라고 하셨습니다.”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각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런 시골까지 조화를 보내주시고 감사의 말씀 꼭 전해주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장지는 대전 현충원으로 하실 거죠?”

“아닙니다. 아버님이 그냥 함 씨 문중 산에 묻어달라고 하셔서......”

“아, 예.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서울로 올라가서 전 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각하, 함 동우 장군 빈소에 다녀왔습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소!”

“예, 그런데........”

“뭔 문제가 있소?”

“함 장군 묘소가 현충원이 아니고 함 씨 문중 산이라고 합니다.”

“뭐야?”

“장군으로 예편한 분이 함 씨 가문에도 영광인 현충원으로 모셔야 하지 않겠느냐 말했더니 망자의 유언이 현충원 대신 선산을 택하였다고 들었습니다.”

“함 장군이 죽어서도 전두환을 애 먹이네? 12.12 때 화끈하게 검문소 열어주면 빨리 해결될 것을 부대이동 명령 근거가 대통령 명령이냐 한미연합사 승인받았느냐 따지더니, 죽어서도 애를 먹이네.”

“어떻게 할까요?”

“당장 지역구 국회의원과 태안군수, 지역 유지, 성우회를 다 동원해서 무조건 현충원에 안장시켜!”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태안군수,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태안읍장, 심지어 이장까지 총동원하여함 종우 장군을 대전 현충원에 안장시켰다.

“상천아, 왜 전 두환 대통령은 아버지를 꼭 대전 현충원으로 보냈을까?”

“영구야, 생각해 봐. 현충원에 안 가고 태안 선산에 묻히면 12.12에 적극 가담하자 않았다고 전 두환 대통령이 현충원 안장을 반대했다고 소문이 돌게 되면 대통령 입장이 나쁘겠지?”

“하긴 그 당시 5공 때는 9시 땡! 뉴스시간에 매일 나오는 전 두환 얼굴 보기 싫다고 TV채널을 돌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돌아가신 장군을 현충원에도 안 보냈다고 하면 빅 뉴스거리지.”

“정말로 아버님이 현충원 안장을 하지 말고 선산에 묻어달라고 했으면 지금이라도 유골 네가 이장시키면 안 되니?”

“에이, 이미 세월이 흘러 뼈도 다 썩었을 텐데, 이제와 이장이 무슨 의미가 있어. 또, 나는 적자가 아니고 서자고 장손이 아니라서 그런 권한도 없지. 그런데, 지금도 난 큰형이나 작은 형이 왜 아버지 유언이 그러면 그렇게 하지 군수,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한다고 대전 현충원에 모셨는지 이해가 안 가.”

“그럼, 그때 네가 형들에게 말하지?”

“에이 난 발언권 없어. 두 형은 아버지 본처의 자식들이고 난 솔직히 첩의 자식 아니냐?”

“야, 요즘 본처, 첩의 자식이 어디 있어. 호적에 등재되면 동일한 대우지?”

“그건 영구 네가 나를 친구로 좋게 말해주는 거고 태안 가면 나는 첩의 자식이라 집안 친척들에게 인정도 못 받아.”

“너의 생모는 지금 뭐 하셔?”

“응, 부천 소사 중학교 역사 선생님으로 정년퇴직 후에 그냥 교원 연금으로 살아가시지.”

“그럼, 어머니는 아버지 묘소에 참배는 하니?”

“현충일, 추석, 설날, 기일 등은 태안의 본가 식구들이 참배하니까 그 며칠 전에 다녀오거나 그 후에 다녀오시지.”

“어머님에게 들은 아버님에 대한 숨은 이야기 없어?”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가 장군이 된 후에 우리 엄마 만난 줄 아는데, 그건 말이 안 되지 내가 나이 55세인데 말이 안 되잖아?”

“그럼, 아버님 하고 어머니는 언제 만났어?”

“아버지가 소령 시절 안양에 군부대에 근무했는데, 우리 외가가 안양 비산동에 있는데 그 집에서 전세로 혼자 살고 있었는데, 부대장이 회식만 하면 부부동반으로 해서 태안에서 어른 모시고 농사로 바쁜 부인을 데려올 수 없어서 부부는 아니지만 부대장이 하도 아내 아니면 다방 여자라도 데리고 오라고 해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 말씀드리고 회식에 어머니를 참석시켰다는 거야. 그렇게 한번 두 번 회식을 참석하다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이 맞아 나를 태어나게 한 것이지.”

“야, 정말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수준이네.”

최송선은 소사 중학교 역사 교사를 하면서 함종우 소령이 부대 회식을 할 때마다 배우자로 참석을 했다. 부대에서는 함 종우 소령 사모님이 최고 엘리트 사모님으로 알려졌다. 함종우 소령이 중령으로 진급해서는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대대리에 있는 불곰부대 대대장이 되었다. 그곳 관사에까지 최 송선은 김치를 주기적으로 담아 냉장고에 채워주었다.


“그래, 솔직히 우리 엄마 최 송선 여사는 억울한 인생이야. 여자로 면사포 한번 못써보고 그늘에서 살았으니.”

“어머님은 아버지를 정말로 사랑한 모양이네. 결혼식 올린 사이도 아닌데, 아들을 낳았으니까.”

“엄마 말이 처음에는 나를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시키려고 갔는데, 병원에서 갓 태어난 아기들을 보니 차마 지울 수가 없어 되돌아와 그냥 학교에 출산 휴가를 내고 나를 낳았다는 거야. 학교 선생님이 결혼식도 안 올리고 출산휴가를 가니 얼마나 학교 다른 선생이나 학생들이 놀랐겠어?”

“완전 학교 특급 뉴스 되었겠다.”

“그런 셈이지.”

“어머니가 역사 선생님으로 은퇴했는데, 최근에는 너에게 한 말씀 있어?”

“식목일에 만났었는데, 어머니 말씀이 이놈의 나라 박 혜 탄핵이 문제가 아니라 5공 6공 청산을 똑바로 안 하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넘어가니 전 두환 이 순자가 회고록을 쓰고 있다고 한탄하시더라. 5공 청문회 똑바로 했다면 감히 전두환이 나 잘 났다고 회고록을 쓰겠어? 어머니 말이 전두환은 회고록을 쓸 것이 아니라 참회록을 써야 한다고 펄펄 뛰시더라. 이건 어머니가 다 읽어봤는데 전 두환 회고록이 아니라 전 두환 망언록이라고.”

“야, 나도 신문에서 봤는데 전 두환 회고록 광주에서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더라.”

“그래, 어머니 말씀처럼 쓰려면 참회록을 써야지 뭐 잘했다고 회고록이야?”

“상천아, 담배 한 대 주라.”

“여기 있다. 아주 귀한 담배다.”

“어, 추억의 솔이네?”

“그래 80 년대 추억의 솔이지?”

“이거 단종 담배를 어디서 구했냐?”

“응, 지난주에 태안에 큰 형님이 쓰러지셔서 내려갔었지. 큰 형님도 많이 늙고 형수님은 더 늙으셨더라. 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아버님 책장 정리 좀 하라고 형수님이 그러셔서 책장 정리했는데, 책장 구석에 솔 2 갑이 숨겨져 있더군.”

“야, 이 솔은 알고 있겠지. 12. 12의 진실을.”

“그럼, 이 솔 담배꽁초는 전두환과 그 일당들의 광주 민주화 운동에 누가 발표 명령을 내렸는지, 전 두환 회고록에 광주 발포 명령 왜 거짓말하냐고.”

내가 할 말을 상천이와 영구가 수원식당서 소주 한잔 하면서 대신했다. 나는 상천이와 영구가 빨아들이는 대로 내 몸을 태워 연기가 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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