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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Jun 05. 2024

유년시절의 추억. 20

 상처

할아버지가 촌에서 소를 많이 보유해서 서울로 위장전학을 시킬 정도면 요즘 말로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나 동수저는 물고 태어났다.


돌아기신지 30년 되는 조부와 12년 되는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여생을 보낸다.


중학2학년 때의 일이다. 할머니는 항상 도시락 반찬이 콩나물, 김치, 콩자반의 메들리였다.


망종 시기가 생일이라 생일날은 할머니가 노란 도시락 하단에 귀한 계란후라이를 깔고 그 위에 밥을 담았다. 반찬도 그 시절 귀한 오징어채 볶음으로 해주셨다.


4교시가 체육이라 다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고 들어왔기에 반찬 불문하고 맛있다고 비명을 지를 상태였다. 도시락을 꺼내니 가벼웠다. 주번을 불렀다.


너 내 도시락 먹었어?

 아니. 서ㅇㅇ 이가 자기가 남을 테니 너는 운동장에 나가라고 해서 나갔어했다.


바로 ㅇ ㅇ에게 갔다.

네가 내 도시락 먹었니? 물으니 전혀 미안함 감 없이 그래. 왜? 했다.


주먹으로 그의 머리를 한대 치니 내손이 아팠다. 그래도 분을 삭일 수 없어 한대 더 쳤다. 치고받고 했는데 감당이 안되었다.

도망쳤다.


그 시절은 교실 유리가 깨져도 유리값이 비싸서 그 칸을 교체 못하고 창호지로 유리를 부착했다.

하필 그 부착한 유리가 문을 여는 내 팔에 떨어졌다.


피가 철철 흘렀다.

반장이 나를 부축해 양호실로 갔다.

학교에 앰뷸런스가 없던 시절이라 양호 선생이 교장에게 보고하고 교장 선생님 차로 평강의원에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이고 안 될 놈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의사가 대방교회 목사님 장례에 가서 그냥 간호사들 수준에서 내 상처를 처리했다. 나이 60이 넘어도 중학생 시절 상처가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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