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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문평 Jun 27. 2024

유년시절의 추억. 26

중학동창 총무를 오래 하는 이유

강원도 횡성 촌에서 5학년을 마치고 6학년이 되자 서울로 전학을 했다. 요즘이야 출생률이 저조해 학생수가 줄어들어 시골은 폐교가 늘지만 1970년대는 표어가 딸 아들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고향에 중학교가 없어 어차피 원주나 횡성으로 중학을 보낼 바에는 큰 물에서 놀라고 서울로 왔다.


그냥 온 온 것이 아니고 면서기 월급이 칠천 원 시절에 강림출장소장에게 2만 원, 안흥면장에게 3만 원, 지금은 신길 6동으로 변한 대방 2 동장에게 3만 원 뇌물을 쓰고 위장전학을 했다.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수도서울 인구 억제 정책이라고 했다. 만주서 간도특설대 행적을 아는 할아버지는 백선엽과 박정희를 거지발싸개 취급을 하셨다. 지가 대통령이면 대통령이지 망아지는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라는 말도 이해 못 하는 놈이라고 했다.


장손은 소를 다 팔아서라도 가르친다고 하셨다. 그렇게 고향을 떠나 서울서 초중고를 나와 동창이 다 서울 사람들이다.


서울이라고 다 잘살고 고교, 대학 다닌 것이 아니었다. 나보다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던 친구가 중학 진학도 못했다. 어느 기간 동안 친하게 지냈는데 연락 두절이 되었다. 중학 시절도 친한 친구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진학을 못하고 중학만 마치고 배달을 하다 구두 수선공을 하고 돈을 벌어 개인택시 기사가 되었다.


고교 동창과 대학 동창 모임은 왕성하게 모이지만 중학 모임은 별로 안 모인다. 돌아가신 어머니 말씀이 중학교 모임 총무를 오래오래 하라고 하셨다. 이유는 중학졸업장이 최종졸업장인 몇 명 안 되는 친구를 위해 중학모임을 재미있게 유지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외삼촌 둘만 안흥중학교 공부시켰고 어머니나 이모는 초등학교도 못 마친 것에 대한 한이 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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