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준비하다가 광고회사에서 일하는 작가의 근황.
하루하루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빠른 세상 변화에 대한 겁. 이것이 올해 자주 느낀 감정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에스토니아로 열흘 가까운 시간을 출장 다녀왔어요. 제가 쓴 글로 찍는 광고 촬영에 따라갔다왔어요. 영화 연출부는 많이 해봤지만 광고현장은 첨이고 외국 출장도 첨이고... 인스타그램도 끄적끄적 해보다가 떠오르는 상념은 많고 감정이 다 해갈되지 않아 오랜만에 몇자 끄적여봅니다.
상업영화 준비 하다가 영화가 밀리고 광고 프로덕션으로 넘어 온지 벌써 7개월이 넘어갑니다. 스토리작가(명함은 자진해서 Creative Writer라고 팠어요. 광고시장에 썩 어울리는 작명센스라고 자찬하며)라고 쓰고 글과 관련된 대부분의 일을 회사에서 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혼란스러워하던 6개월이 지나고 이제는 적응?이라기 보다는, 흔들리는 이 삶에 조금이나마 익숙해 진 것 같아요.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사회생활 한참 선배인 사내 피디님이 어느날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직장 생활 1년차 땐 1년 내내 흔들린다고. 다른사람처럼 안 살고 싶어 아등바등 하는 제게도 그 말은 꽤나 위안이 되었어요. 그렇다고 제가 직장인으로 사는 것에 안주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여기서 알 수 있죠? 무언가 나에대해 규정지어지는 것에 겁이 참 많다는 저라는 어쩔 수 없는 캐릭터를.)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를 차버린 스파이>라는 넷플릭스 영화를 봤어요. 구남친이 스파이라는 걸 알게되고 구남친의 유언인 미션을 수행하러 유럽으로 떠나는 LA에서 캐셔로 일하던 여자 (그 여자는 밀라쿠니스라는 게 함정ㅋㅋ)이야기에요. Uber 운전 기사에 대한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어요. 주말에는 디제이로 활약하고 욜로족?으로 짐작되는 젊은 운전기사였는데 그가 밀라쿠니스와 그녀의 절친의 도주를 돕게되죠. 이렇게 말해서 주요 에피소드처럼 오해받을 수 있지만 3분 남짓한 매우 짧은 씬이에요. 별거 아닌 디테일일 수 있지만 이런 디테일이 '이건 오늘을 사는 이야기다!'라고 느끼게 해주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요즘 제가 재밌게 느낀 콘텐츠들은 대체로 '오늘을 사는 이야기'더라구요. 하루하루 빠르게 변하는 오늘들을 담고있는 이야기. 따라서 쉽게 휘발 될 얘기일 순 있어요. 하지만 이 순간을 사는 내게, 약간의 안도와 공감, 유머를 선사하는 이야기들. 제가 근래 재미를 느낀 이야기를 되새겨보면 이렇습니다.
- 넷플릭스 드라마 <GIRLS>
- 노아 바움백 감독의 <마이어로위츠 이야기>
- 2011년작이라 좀 철지났다 생각할 수 있지만 <프렌즈위드베네핏>
- 넷플릭스 드라마 <코민스키 메소드>
- 어제 본 <나를 차버린 스파이>
긴 시간 비행후 집으로 돌아오는 공항버스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하루 변하는 대중들의 집단 무의식을 반영한 상품을, 때때로는 집단 무의식 변화를 뽐뿌질하는 새로운 상품을 발 빠르게 알리는 광고 일을 하는 게 어쩌면 '오늘을 사는 이야기'를 좋아하고 하고 싶어하는 나와 전혀 쌩뚱맞은 일은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합리화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렴 어때요.
29살 꽃다운 나이에 감독 제안을 받고 어깨에 뽕이 들어갔던 걸까요? 내심 큰 기대 없던 제 삶에 제 스스로 기대라는 상상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에 잘못된 양분을 꽤나 오래 주고 지낸 것 같아요. 그런데... 그냥 브런치든 짧은 스토리든, 긴 영화 스토리든 멈추지 않고 쓰자는 마음을 먹었어요. 글을 써야 작가지. 작가라고 말한다고 작가가 아니라는 걸 이제라도 알아챈 저 자신을 칭찬해 줄래요. 제 얘기는 진부하기 짝이없지만 앞으로도 기-승-전-자기반성 혹은 기-승-전-새로운 다짐일 예정이에요. 잘못된 초등 일기교육의 폐해라고 치부해두자구요. (얼마나 자주 브런치를 쓰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써야 작가라는 말을 되새기며 오늘을 사는 글을 좀 더 자주 써낼 내 자신에 대한 기대를 또 한번 속는 샘 치며 걸어보며! 이 글을 마무리 할게요.
오흐브아.
2019년 11월 19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