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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한 그의 모습

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2 (feat. 카를 융)

by 심심

"남자의 어떤 면이 내 마음에 들었다면, 그건 진짜 그가 가진 모습이라기보다는 내가 투사해서 보고싶었던 내 안의 남성성이 아닐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스친 한 문장이다.


어제부터 진 시노다 볼린의 <우리 속에 있는 남신들>이라는 책을 읽고있다. '내가 좋아했던 그는 어떤 유형의 남자일까' 궁금했다. '무엇이 날 그렇게 강렬하게 갈망하게 만든 것일까?' 알고싶었다. '어떻게 하면 연이 다한 그를 내 마음 속에서 놓아줄 수 있을까?' 찾고 싶었다.


관계의 죽음 앞에서 나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수많은 질문을 던지다보면 문득 '그저 아픔은 아픔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내버려두면 안되나?' 허탈한 자기 감상에 빠질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는 이런 행위가 어쩌면 이게 나라는 인간의 삶의 동력인지도, 내 시나리오 작업의 동력인 줄도 모르겠다.


그는 '직진남'이었다. 자신의 호감을 표현하는 데 있어 거침이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보는 어떤 생명체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떠오르는 영감을 아-주 Straight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그가 숨김없이 나에 대해 찬미하는 그 순간

그의 발언이, 그의 음성이 공기라는 매질을 타고 내 귓가로 전해질 때면

나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확신감'을 그를 통해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 쓰는 이 글의 많은 어미(語尾)에서도 느낄 수 있듯, 내 사전엔 '확언'이 잘 없다. 그저 세상을 잘 모르겠고, 나를 잘 모르겠어서 매사 '질문을 던지는 태도'가 내겐 더 익숙하다. 따라서 나로 살면서 좀처럼 경험해볼 수 없었던, 그 낯선 확신감이 좋았다.


이게 진짜 그의 상(象)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내거나, 투영해낸 창조된 상(象)일까?


연애상대를 정한다는 것은 내 안의, 미개발된 남성성을 발현시켜주고 성장시켜줄 적절한 스승을 찾는 것 아닐까? 그렇치, 그게 좋았던 거지. 눈치 안 보고 무언가 말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가 내가 창조한 그의 상(象)이었다. 그 자유와 확신이 내가 모방하고싶었던 거지.. 갖고 싶었던 거지...


잠에서 깨어나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얘기하고, 상대의 음성을 듣고, 타인의 에너지를 느끼고... 그러고 있다보면 세상과 상대를 통해 경험하는 것들이 왠지 상대가 아니라, 나인 것 같다고 느낄 때가 자주 있다. 지나가는 사람도 나같고, 대화 나누는 내 친구의 모습에서도 나를 보고, 모든 게 내 자신에 대한 투영, 나의 일부분을 보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는 매일 세상에 나가 내가 보고싶은 나의 거울을 찾아다니는 게 아닐까!


그와 친해지던 3월의 시간들 속에서 내 뇟속에 각인한 문장들, 내 눈과 마음에 기억하고 심어버린 목(目)상과 심(心)상에는 내가 되고싶은 '꼴'이 있었다. 그가 가진건지 그에게서 내가 창조해낸 건지 알 수 없지만, 뭐가됐든 결론은 '자유와 확신감' 이라는 긍정적인 남성성을 내 안의 남성성과 동일시하고, 그와 닮은 꼴이 되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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