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1
내가 좋아했던 그 사람은 직장동료로 만나 3개월 정도 같이 일했고, 2년에 한번 정도 만나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는 사이. 멀찍한 거리에서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동료 사이였다. 실제로 자주보지는 않지만, 정서적 친밀감이 있었다. 이성적 호감을 나누기 전까지 그는 내게 언제 어디서든 건강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3월 첫주, 우리는 2년만에 만나 같이 밥을 먹었다. 평소와 달리 그 날 이후로 그는 연락이 잦았고, 2년 뒤가 아닌 2주 뒤에 우린 또 만났다. 그 날 상대가 내게 호감을 드러냈다. 그 후로 점점 더 연락은 잦았고, 종종 만났다. 나는 상대가 일로 만난 사이기에, 관계의 성질이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웃긴 건 항시 철벽을 치면서도 그가 만나자하면 나는 쪼로로 나갔고, 만나서 술이 한두잔 들어가면 내 철벽이 무장해제되기도 했다. 잦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나는 그에게 스며들었다. 철벽을 치고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그에게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엔 멀찍이서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었던 그가, 어느새 가까운 곳에서 일상을 나누고 싶은 그로...'
내 마음 안에서 상대에 대한 감정이 변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해, 상대에 대한 정의, 관계에서 기대하는 바, 관계의 형질 자체가 변했다. 한달 내내 내 내면은 정신없고, 다이내믹한 변화와 충동을 겪고 있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 안에 있으면서 그걸 잘 체감하지 못했다. 둔했다. 언제나 내가 내 스스로의 감정은 내가 제일 늦게 안다. 하지만 감정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내 스스로 인지의 영역으로 꺼내어 내 감정 변화를 알아봐 주지 않아도 그 여부와 상관없이 내 안에서는 무수한 변화가 역동한다. 번뜩, 그를 많이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가 잦은 고백과 찬미를 전할 때는 철벽을 치던 내가 뒤늦게 그를 좋아하게 된 내 감정을 알아챘다. 몰라줬던 감정을 내 스스로 알게되고 그 감정을 인지의 영역으로 꺼내는 순간, 그것을 심지어 공기 밖으로 발화라도 해버리게되면 내 감정은 그간 몰라봐준 것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전보다 더 빨리 빛의 속도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며칠사이(내 감정을 알아주고 1-2일 사이) 그를 좋아하는 감정이 온몸을 애워쌓다. 결국 나는 내 감정에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얼른 상대에게 내 감정을 아낌없이 꺼내보이고 싶어졌다. 그렇게 내 감정을 알아준 뒤 3일째 되는 날. 나는 그에게 카페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고, 그 날 헤어지기 5분 전 고백을 했다.
"사귀자."
1시간정도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는 만나자마자 고백해야지 결심했다. 하지만 처음해보는 고백이었기에, 목구멍에서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내 몸은 그 말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나올 생각이 없던 그 말덩이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엔 헤어지기 5분 전(내게 예정된 뒷 일정이 있었다) 억지로 퀙! 뱉어낸듯, 전혀 서두가 없던 고백을 상대에게 던져버렸다.
나는 그의 가까이에서 나의 기쁨을 나눠주고, 그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그에게 나의 친절과 상냥을 나눠주고 싶었다. 내 안의 사랑으로 그를 따뜻하게 배려해주고 안아주고 싶었다. 그와 함께 일상을 가꾸고 싶고, 나의 일상과 함께 그의 일상을 돌보고 싶었다.
내 바람은 실현되지 않았다.
내 고백에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4월 초 고백 후, 대답이 없는 그를 기다리던 나의 남은 4월의 시간엔 물음표가 가득했다. 여전히 대답없는 그를 기다리던 나의 5월의 시간들엔 적당한 짐작과 기대가 가득했다. '지금은 동굴로 들어가버린 그지만, 언젠가 그가 마음의 여유를 찾으면, 그 땐 내게 찾아와 무슨 얘기를 해주겠지...'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바쁜 거 한풀 지나고 나면 같이 땡땡앤땡땡땡에 가자~"라는 그의 가벼운 말에 나는 희망을 얹어버린 것이다. (왜 나는 먼저 "아무 얘기라도 해줘, 그게 내가 진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라고 제안하진 못했을까?)
6월이 되었고 관계의 종료를 말한 것은 내 자신이었다.
2명과 이별한 기분이 든다. 이성으로 좋은 호감을 나누던 이와 멀어진 것뿐만 아니라, 좋은 동료 하나 역시 잃은 것이기에. 사귀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별이라고 쓰고 있을까? 어쩌면 이별이라는 말보다는 '관계의 죽음'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두명의 존재를 내 마음 속에서 훌훌 떠나보내고 싶어한다. (왜 예쁘게 간직할 생각은 안할까?)
결국, 숨이 남아있던 관계에 소생의 노력은 하질 않고, 되려 그 숨마저 끊어낸 자는 나였다.
구체적인 정황은 이러하다. 나의 고백 이후, 관계가 흐지부지 되고 내 감정은 무수한 물음표와 함께 널을 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생긴 에너지를 나를 갉아먹는 방식으로 쓰기보다는, 내 삶의 좋은 연료로 쓰려고 애썼다. 그를 이해해보고자 또 나를 이해해보고자 그가 생각날 때마다 일기를 썼고, 산책을 많이했으며, 뜨거운 감정이 올라올 때면 헬스장에 가서 웨이트를 했고, 상대가 그리울 때면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한달 가량의 시간을 보내고 나니 감정의 진폭도 한풀 꺾이고, 어느정도 내 감정이 잘 갈무리된 듯 보였다.
관계가 흐지부지된 것에 대해 그를 탓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되려 관계를 다른 국면으로 전환해낼 뾰족한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못하는 나의 모자란 창의성을 탓하고 있었다. 그리고 왠지 그에게 부담을 주고싶지 않았다.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 사람에게 여전히 지지자가 되고싶어했다. 지금 가까이 다가가기엔 상대가 부담스러워할 수 있으니 멀리서 응원할 마음이었다.
문제는 SNS. 여느날처럼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마음으로 인스타그램에서 그가 그날 올린 스토리를 보고있었다. 그런데 그가 어떤 여자와 함께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엄청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온 몸에 있는 뜨거운 에너지가 위로 솟구치는 기분. 나는 놀란 마음에 먼저 심호흡을 했고, 이어서 바로 채비를 하고서는 집 밖을 나가 뒷산을 올랐다.
본능적으로 끓어오른 나의 감정은 뭘까? 바로 예측이 되지 않아, 산책을 하며 내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남자에게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여러 질문을 던져봐도 이게 무슨 감정인지 내 스스로 이해가 잘 되지 않고, 납득도 힘들었다. 그렇게 산책을 이어가던 중, 선명해진 것은 내가 왜 이러는지는 지금 당장 알 수 없지만 그 사진은 내가 예상치 못한 종류의 사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놀람과 동시에 '그 사진이 내 신변에 위협적이라고 느끼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툭 떠올랐다.
순차적으로, 나는 나의 안전을 위해 앞으로 이 사람의 SNS에서 이와 같은 (예상치 못한) 사진을 또 볼일을 미연에 방지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고민 끝에 그의 SNS 팔로잉 하던 걸 삭제했다. 나를 지키기 위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리고 나는 책상 앞에 일을 좀 하다가 멈추고 헬스장에 갔다. 웨이트를 열심히 하다보니 기진맥진하며, 감정도 많이 가라앉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일기장에 그에게 보낼 메시지 내용을 정리했다.
"어디서든 잘지내~"
구체적인 내용은 이렇다.
1) 내가 팔로잉을 끊은 사실에 대한 알림 2) 고백 이후 몇달이 지난 지금에서도 너를 남자로 보고있다는 현재상태에 대한 공유(그간 동료로 다시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3) 따라서 너의 근황을 보는 게 편하지 않다. 4) 너와 동료가 될 수 없어 아쉽고 미안하다 5) 어디서든 잘지내
정리된 내용을 SNS 창을 열어 메시지로 전송했다.
그렇게 동료와 남녀사이 그 언저리에서 불확실했던 관계가 끝이 났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만해도 남자와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인간애만 나누는 사이에는 남녀 간에도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와의 관계에서는 내가 살면서 경험해보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동료에서 연애감정을 느끼게 된 변화. 그 변화의 역동을 겪고 나면 상황은 예전으로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걸 처음 안 걸까? 앞 전에는 같이 일하는 동료, 원래 알던 친구에게서 연애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인간애를 나누던, 알던 사이에서 애정이 싹텄다는 것. 그것이 이유인 걸까? 이번 만남과 이별 여정이 내게 치명적이었던 이유. 그래서 평소와 달리 관계를 내 손으로 직접 끊어내는 이상하고 잔혹한 짓을 내가 한 걸까?
삼십오년을 살면서 나는 연인간의 이별을 제외하고는 내 스스로 어떤 적극적 행동을 취해 관계를 끊어내본 경험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 스스로가 지금 까지 안해봤던 걸 해봤다(=일탈)는 측면에서 신기하고 대견한 기분이 들때도 있다. 실은 대체로 얼떨떨하고,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내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무튼 중요한 건 내 손으로 관계의 숨을 끊었다는 것.
말하다보니 이거 살인자가 쓰는 애도일기인 건가? 섬뜩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