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8
하루하루 사건과 영감이 넘친다. 오전에 업무와 관련된 몇몇 일정들을 마치고 1시에 헬스장에 갔다. 내 PT선생님은 백육십이 채 안 되는 나와 비슷한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진, 희고 당찬 여선생님이다. 언제나 그녀와의 시간을 유쾌하고 보람차다. ENTJ인 그녀는 INFP인 내게 항상 시원시원한 감정과 에너지를 선사한다. 그 덕분에^^ 격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타던 시기에, 다행히도 내 곁에 무게를 치는 이 쇠질(웨이트 트레이닝)과 우리 선생님이 있었다. 격정의 감정 파도에서 다시금 완만한 파형을 그리는 파도로 돌아올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 쇠질임을 확신한다. 나는 내 몸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올 때마다 흐트러져버린 집중력 따위는 내팽개치고 집 나와 헬스장에 무게를 치러 갔다. 결국 그는 잃은 대가(?)로 짧은 시간 안에 빠른 체형변화를 얻었다. 작가의 고질병인 굽은 어깨가 쫙- 펴졌고, 팔에는 없던 삼두가 생겼다. 근육이 쭥쭥은... 아니지만 조금씩 형태를 드러내서 요즘 같은 여름에 민소매를 입을 맛이 난다!
6개월 동안 50회, 오늘이 마지막 50번째 날이었다. 그가 내게 호감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나는 SNS 스토리에 데드리프트하는 영상을 올린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치는 무게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기도 웨이트를 하는데 내가 드는 무게가 자기가 드는 무게와 50kg으로 같다며, 작은 몸으로 어떻게 몸무게보다 많은 무게를 드냐며 감탄했다. (지금 나는 데드리프트 60-70kg으로 실력이 향상되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종종 헬스에 대한 얘기를 나눴기에, 그와의 희로애락과도 함께한 50회의 PT가 종료된 것이다. 이렇게 곱씹어보니 PT 50회 종료가 내게 더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나는 50회를 다시 등록했다. 웨이트는 기분이 나쁠수록 잘되는 운동. 평소 사람들에게 화를 낼 줄 모르는 내게 웨이트는 스트레스 해소에 제격이었다. 게다가 힘이 좋아져서 요즘은 술도 예전보다 잘 먹고, 장바구니도 잘 들고, 여럼으로 일상생활이 훨씬 수월해졌다. 내 의지만으로 이어갈 수 없는 관계와 달리, 내 의지로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도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사하다.
웨이트를 마치고 시나리오 회의를 하러 갔다. 나 포함 5명. 멤버들의 말로 가득 채운 2시간짜리 회의를 마치고나니 숙제를 가득 안게 되었지만 예정된 약속대로 아는 편집기사님 사무실에 놀러 갔다. 회의를 마치고 기사님이 내게 남긴 사무실 주소를 확인했는데 지도 앱을 보다가 경악했다. 기사님의 사무실은 내가 좋아했던 그의 업무공간과 불과 50m 남짓한 거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내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고, 나를 둘러싼 무드는 긴장감이 넘쳤고, 장르가 스릴러로 변했다.
쫄깃한 심정으로 영화사 사무실에서 기사님 편집실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이런저런 자문자답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를 보며 나는 인자하게 웃어 보일 수 있을까?' 내게 물어봤다가 ’못할 건 또 뭐람~'하고 또 내 자신에게 센 척도 해보이다가. ‘이렇게 심장이 벌렁대는 걸 보면 평정심을 어느 정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를 대면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구나'하고 이내 알아차렸다. 10분 남짓 짧았던 어제 일어난 나만의 스릴러 모먼트를 돌이켜 보니 내 눈에 내가 참 어이가 없다. 끝이라고, 관계의 죽음이라고 해놓고 대면할 걱정을 하다니. 죽음에는 다음이 없는데 말이다. (찡긋)
다행히 그와 마주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무사히 기사님의 사무실에 안착했고, 기사님이 편집 중인 영화 편집본을 모니터 했다. 중간에 있었던 시나리오 회의 그리고 기사님께 편집본을 본 감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방어적인 언어습관을 발견했다. 내 화법이 방어적일 수 있다는 걸 최초로 인지하게 된 건 역시나 그와의 관계를 반추하는 과정에서였다. '이게 문젤까? 저게 잘못됐을까?' 생각하는 와중에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것이 오늘 두 차례의 대화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었다. 유사한 언어행태를 구사하는 내 화법, 그 단서를 수집하면서 내 가설에 대한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어제의 대화를 복귀하는 과정에서 대화는 항상 선행하는 자의 화법에 다음화자가 영향을 받는다는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나의 화법에 대한 단상들과 깨달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내일 써보기로 한다.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고, 일도 해야 하니까. 돌이켜 봐도 정말이지 사건과 영감이 넘치는 하루였다! 다행히 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