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09
나는 내 세계의 언어와 사회적으로 학습, 훈련된 정보와 상대에 대해 느끼는 동물적인 감각을 섞어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겠지. '그와의 대화에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은 어디서 부터 시작되었을까?'를 생각해보던 중에 내가 감정적으로 위축되어 있을 시, 똑같은 나임에도 그렇지 않을 때보다 내 세계의 언어와 사고방식에 많이 치우쳐버렸음을 깨닫는다. 결국 상대의 반응을 지레 예측한 뒤 방어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 같은 사람이라도 컨디션이 좋을 때와 아닐 때, 화법이 많이 달라진다.
내가 위축되어있을 때, 상대적으로 상대의 발언이 공격이라고 감지하는 센서가 더 민감하게 작동하는 것. 어쩌면 면역력이 약할 때 몸을 좀 더 보호하려는 것처럼, 위축되어있을 때 생기는 방어적 태도와 화법은 동물로서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와 방어적 반응은 상대가 공격할 의도가 없음에도 내가 '공격'이라고 잘못 읽어버리는 불상사를 만들 확률을 높힌다. 그런 측면에서 내 입장에서의 방어가 상대에게는 또다른 공격으로 느낄 수도 있겠다. 칼도 부딪혀야 싸움이 난다고 '방어'와 '공격'은 상대를 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 같은 태도에서 출발하고 그러므로 극과 극은 통하는 격.
며칠 전 회의 때, 내가 하고싶은 말을 막 마치고 나니 문득 '말할 때, 전제를 왜이렇게 깔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전달하고 싶은 바만 올곧게 전달하면 될 것을, 상대가 어떻게 해석할지까지 고려해서 전제를 깔고 있었다. 내가 그런 화법을 구사하는 것에 대해, 의도를 좋게 봐주자면 상대입장에서 오인지 되지 않도록 배려가 담긴 것으로 볼수도 있으나 또 달리 생각해보면 상대를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자문해보게 된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나의 화법은 내 좋은 의도와 정반대의 출력값을 만들어낼 수 있다. 참으로 비극이다.
1) 대화하는 상대를 믿고 한 가지 정보만 정확하게 전달하기. 그리고 나서는 2) 더 첨언하지 말고 여유있게 상대의 반응을 기다리기. 3) 상대의 반응에 따라 적절한 질문을 던지기. 아주 기본적인 부분이 지켜지지 않는 대화를 나는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많이 범하고 있을까?
때때로 애정어린 대상, 기대가 있는 상대와의 대화에서 상대가 주는 정보를 정보로 대하지 못하고, 감정으로 대응할 때가 있다. 사람이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그 감정을 느꼈을 때 일단 내 스스로 느껴주고 난 다음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훈련이 많이 필요하겠지만. 상대는 내 세상의 언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그는 또 내가 모르는 그의 언어가 있기에 언어를 흡수해내는 과정에서 내 알고리즘으로 상대의 말을 들으면 안된다. 대화 시 아주 심플해질 필요성. 그리고 그의 언어를 조금이나마 빨리 학습해서 상대와 통하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내가 앞서 말하기보다는 상대의 말을 찬찬히 들어볼 필요가 있겠다.
나는 주로 회의할 때, 내가 밑장을 먼저 다 까는 대화법을 선호해 왔던 것 같다. 그게 상대가 편하게 자신의 얘기를 할 수 있게 물꼬를 열어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생각이 틀린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적재적소에, 대상에 따라 다른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역량에 대해 고민해보고, 훈련방법을 궁리하는 중이다. 그것은 좋은 관계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고, 일을 팀원들과 협력해서 잘하기 위해서도 개발하면 좋을 덕목일터인데... 맞다, 나는 생의 욕구,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참 강한 사람이다.
언어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선 무엇부터 해야할까? 가깝던 멀던 그 어떤 대상이든 세상에 나가 조우할 때 항상 상대는 다른 언어와 사고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걸 잊지 않는 게 핵심일 것 같다. 그리고 주로 나는 세상의 편견에 휩쌓인 시쳇말 같은 말을 자신의 의견처럼 말하는 상대의 말에 지레 귀를 닫아버리는 습성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역시 시쳇말을 하는 대상과 다를 게 없는 선입견에 사로잡힌 행동이다. 아차. 주의하자.
나의 세계의 언어에서 잘못 번역된 말들은 대화 상황을 잘못 공격이라고 받아들이기 쉽고, 결국 출력값을 '방어'르 뱉어내는 오류를 저지르고 만다. 그렇게 한번 대화가 꼬이기 시작하면 상대와 나 사이에, 인지도 못한채 보이지 않는 전투를 벌이게 되는 것이다. 모든 건 작용반작용. 말 역시 선행한 자의 화법이 대답하는 사람의 태도와 화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오마이갓.
물론 기계가 아니라 인간인 이상, 위에 언급한 내용들을 유념하고 주의한다고해서 완벽한 대화가 바로 출력되진 않을 것이다. 때때로 여전히 오해가 생기겠지. 하지만 대화가 종료하기 전에만 때때로는 종료 이후에 골든타임 안에만 잘못들을 캐치하고 오해를 바로잡을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면 서로간의 '불통'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오해나 짐작을 하기 앞서 물음표를 띄우자. 그리고 나서 순수하게 상대의 발언에 대해 한번 더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자. 순수한 질문을 할 줄 아는 능력이 곧 좋은 대화 (원하는 것을 얻거나, 그게 아니라도 예상치 못한 훌륭한 걸 배우는 고무적인 대화)의 순간을 창조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 있다. 상상보다 어마어마한, 선물같은 대화를 만날 수 있다.
상대의 얘기를 듣고, 느끼고 그 느낀바를 감탄과 내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해낼 것.
삶도 대화도 리스크를 줄이는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었던 나의 예상치 못한 소극적 삶의 태도를 절감한다. 말하기와 듣기. 언어는 모국어조차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배워야한다고 깨닫는다.
남자 하나 떠나보낸 것, 관계의 죽음이 참 많은 반성과 교훈을 준다. 생에서 만나는 갈등과 작은 죽음들은 흘긋보면 나쁜 일 같지만 실은 정말 값진 것이구나. 이 많은 영감들이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또 새로운 화두를 던지며 찾아오는 걸 보면 나는 그를 정말 잃고 싶지 않았나 보다. 그를 여전히 이해하고 싶은가보다. 방법은 모른 채 마음만 간절하고 애틋했던 나의 미숙함을 이제라도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