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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벌이 간다고 원망하지 않는다.

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10

by 심심

지난 3일간 제주가 고향인 배우 선배님과 함께 제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에 대한민국연극제가 제주에서 개최되었고 거기에 참석하는 선배님의 일정에 나는 따라간 여행이었다. 나와 두바퀴 돈 띠동갑, 24살 많으신 선배님의 일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또 그녀의 고향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단둘이 차를 타고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모든 것이 내겐 너무 큰 공부이자 배움이었다.


뒷산을 산책하며 여행을 떠올려보자, 인상 깊은 지점이 셀 수 없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선배님의 진실성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매 순간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사랑받길 기다리기보단 사랑을 베푸는 태도가 선배님 삶 전반에 베여있었다.


에리히프롬은 사랑을 Love도 Loved도 아닌 'Loving'이라고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표기한다. 그가 말하는 Loving을 현실에서 매 순간 몸소 실천하는 삶을 곁에서 볼 값진 시간이었다. 그렇다. 사랑은 Loving이다.


그간 살면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스럽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랑스럽다는 것은 사랑을 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게 하는 말 같다. 맞다, 나는 세상이 주는 사랑을 편식 없이 잘 받는 편이다. 기꺼이 감사하며 신나 하며 받는 걸 잘한다. 반면, 주는 사랑에는 익숙지 않는 나를 발견 중에 있다. 내가 3월에 한 남자랑 친해지고, 좋아하게 되고, 그 이후의 과정을 통해 나는 사랑을 주는 방법에 있어 사랑을 받는 것에 비해 능수능란하지 못하는 점. 그리고 원하는 걸 요구하는 것에도 능수능란하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그런데 내 저 깊은 무의식은 '사랑은 주는 것이다, 받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라는 에리히프롬의 말에 동의하고 있으며, 따라서 사랑을 행하는 자가 되고자하는 욕망이 무척 강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 기저에 깔린 숨은 욕망을 알아챈다.


주고 또 받고. 둘다를 잘해야 순환적 삶, 균형 있는 삶일 텐데. 그중에서도 인간 간의 사랑에 있어 내가 '준다, 한다'에 중심이 있어야 하는 걸 내 무의식과 본능은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현재 살던 방식의 패턴에서 벗어나 숨은 욕망을 꺼내어 진정한 사랑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거겠지. 다행히도 적절한 타이밍에 찾아온 여행을 통해, 주는 사랑에 능한 훌륭한 선배님과 함께하는 시간동안, 주는 사랑에 대해 얼핏 맛을 볼 수 있었다.


선배님과 나는 지난달부터 교류가 많아졌다. 그녀와 내가 서로 알고 지낸 지는 13년이 되었지만 근래 5-6월의 시간들만큼 자주 만나고 여행을 다닌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산책 중에 이러한 인연과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흥미로워 지난 몇 개월간 내게 다녀간 사람들을 돌아봤다. 1월에 찾아온 사람, 2월에 찾아온 사람, 3월에 찾아온 그... 4월, 5월,6월... 재밌는 사실은 3월에 찾아온 그 외에도 매달 1-2명의 사람들이 내 삶에 찾아와 많은 영양을 주고 다시금 자신들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의 강도와 수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돌이켜보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삶에 찾아 왔다가 또 갔던 것이다.


내가 꽃이라면 무수히 많은 벌들이 내게 왔다가 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을 살뿐인데 누군가가 다녀간다는 게, 내 장단에 맞춰 함께 춤을 춘다는 게, 그렇게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고 떠난다는 게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만나자는 말을 살면서 해본 경험이 많지 않다. 어쩌면 나의 선천적 생김자체가 받는 사랑으로 시작하는 것에 익숙한 생김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어떤 땅을 만나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지만 스스로 움직일 수는 없는 꽃을 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이어서 '시절인연'이라는 불교 용어가 떠오른다. 인연법에 의해 사람이 왔다 가는 것.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며칠 전 엄마가 인연은 네가 그렇게 무 자르듯 끊어낼 수 없다는 말도 이와 닿아있는 말이겠다싶다.

시절 인연으로 찾아온 이에게 내가 무게를 부여하고, 쥐고자 하면 내 마음이 끄달릴 뿐이겠구나~ 어떤 연유에서든 내 안의 잠재된 내면아기에 의해서든, 나의 업보 때문이든 치명적인 감정에 대해서도 그저 비워내고 가벼워지는 것만이 답이겠구나 알아챈다.


한달 전쯤. 내가 좋아한 그와 함께한 시간을 부여잡고 있던 때, 심신을 다스는 과정에서 '꽃은 향기를 뿜을 뿐, 빛을 좇지 않는다'라는 말을 여러 번 내 맘 속으로 되새긴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은 같은 꽃이지만 다른 차원의 비유가 떠올랐다. '꽃은 떠나는 벌을 원망하지 않는다.' '꽃은 벌이 간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쓰고나니, 이 표현이 썩 마음에 든다.


주는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는 것.

아름다운 꽃으로, 하나의 고유한 생명체로써 나의 생김을 알아차리는 것.


나는 지금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 중요한, 삶의 여정에 있어 꼭 필요한 통과의례를 지나고 있다는 기시적인 느낌이 든다.


사주로보면 나는 임수라는 글자를 타고났다. 큰 물. 그리고 내가 좋아한 그는 기토라는 글자로 태어난 사람. 임수에게 기토는 정관이다. 내게 정관이 되는 기토는 임수인 나를 치는 글자. 즉, 고통을 주는 글자다. 그러나 이 고통은 나쁜 고통이 아니라 임수가 잘~~ 다듬어질 수 있도록,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삶에 꼭 필요한 아픔'을 의미한다. 모든 생명체에게 닥치는, 죽지 않을 고통과 아픔은 성장과 성숙을 가능케 한다. 더 나은 생명체로 거듭나게끔 만드는 게 고통과 아픔이다. 고통과 아픔은 인간에게 배움을 준다. 맞아, 고통이라고 표현하기보단 배움을 준다고 말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다.


결국 그는 내게 훌륭한 스승이구나 알아차린다. 스승임을 몰라보고 섬기지 못했다. 하지만 몰라보고 난 후의 여정들이 이렇게 많은 반성과 영감을 주는 것을 보면 그를 섬기는 것보다는 이 여정 자체가 그라는 스승이 내게 배움을 알려주는 방식 아닐까? ㅎㅎㅎ 나의 사고의 흐름이 참 재밌고, 썩 내 마음에 드는구나!


이런저런 단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한 없이 겸손해지는 아침이다. 앞으로 만나는 스승들은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범사에 감사하고, 지금의 균형을 잘 느껴주자. 감각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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