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죽음, 그 애도일기 11
내가 명리학 공부에 진심인 것을 안 선배님이 명리학의 대가 강헌 선생님과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유튜브로만 팬심을 가지고 그의 영상을 여럿 봐왔는데 만남 전에 뭐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싶어 <명리>라는 강헌 선생님의 책을 서점에 가서 구매했다.
선생님은 학자답게 그 어떤 느낌에 의존하기보단 이성과 합리적인 사유를 통해 사주를 풀어내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희망적이거나 긍정적인 이야기를 쏟아내기보단 더도덜도말고 글자 그대로 풀이해서 설명해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절제의 미덕이 있는 사주 풀이.
며칠 전 그의 책을 완독했다. 세상에 미신이라는 선입견과 오해를 자주 받는 명리학을 양지로 끌어낸 분이다. 알다시피, 심리학 역시 100년 전만해도 비과학적이라고 여겨지고,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시절이있다. 명리학도 심리학의 100년 전과 같은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강헌 선생님은 이미 세상사람들이 익숙한 학문적인 언어와 다양한 임상실험으로 학문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고 적립하려는 노력이 있고, 그 노력이 책에서 많이 느껴졌다. 학문으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보니 그간 공부하면서도 애매했던 것들이 많았는데 많은 학파(?)의 이론을 예시로 들고, 여러 임상을 통해 증명하는 선생님의 책을 읽고나니 명쾌해지는 부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이치를 8개의 타고난 글자, 그리고 2개의 대운을 나타내는 글자, 또 2개의 년운을 말하는 글자, 2개의 월운, 2개의 시간을 나타내는 글자가 모두 조합된 (단순한 조합도 아니지만서도) 한 순간과 한 시절을 예측한다는 것은 공력이 켜켜이 쌓이더라도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8x2x2x2x2의 경우의 수. 그러나 조금만 공부해보면 이렇게 확률로만 말할 수 없는 복잡한 학문이라는 걸 알 수 있기에... 인간이 어찌 자연의 이치에 가 닿을 수 있으리오~
명리학 공부를 오래한 분들은 사주(4개의 기둥)보다 '심주心柱'(마음의 기둥)의 중요성을 역설하신다. 세상의 흐름(트렌드)을 읽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자연의 이치를 완벽히 이해한다는 것 불가능하기에) 예외와 변수가 발생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일테고, 따라서 살다보면 예외와 변수를 만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직면할 것인가? 두려워 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 주어진 변수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 것인가? 이것들만이 '내'가 스스로 다스려 볼 수 있는, 훈련가능한 영역. 따라서 변수를 대하는 '마음' 그것이 오랜 선생님들이 말하는 '심주'가 아닐까!
내 마음을 생명체 답게 온기를 가지고, 사랑으로 가득채우는 것이 1번이요, 방향을 설정하고 매일매일 무언가 하는 것이 2번, 방향에 대한 세부 목표와 과업 설정 과정에서 나의 잘못된 욕망이 투영되진 않았는지 점검하는 것이 3번. 그 와중에 상황에 과몰입한 나머지 나 홀로 Overpace 하고 있진 않은지 매일매일 돌아보는 것이 4번. 내 나름의 지향점을 정해본다.
궁극적으로 우주의 텐션, 내 주변인 - 주변 상황과의 텐션, 나의 텐션 이 삼박자가 잘 Resonate (공명) 하고 있는지 시시 각각 느끼고, 알아차리며... 죽을 때까지 도전하고, 실패하고, 훈련하고, 또 실패하고. 이것이 슬프지만 아름다운 우리네 인간의 삶이겠구나. 알아차린다. 슬픈 우리네 여정이 그래도 아름답기 위해서는 내 안의 온기를 불러모아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온기와 사랑을 불어넣는 것. 그것에 아낌 없는 수 밖에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