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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봄

[생각정리] 4월4일 화창했던 날.

by 심심

봄비가 오고나니 하늘에 떠있던 미세먼지들이 모두 바닥으로 잠시 가라앉았다. 봄비 덕분에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흑석동에 작업실을 얻었다. 낯설지만 오래된 동네다 보니 아직 정감어린 지방 소도시같은 정취가 남아있다. 덕분에 쉽게 정을 붙일 수 있었다. 그런데 공기만큼은 내가 사는 성북구보다 좋지 못하다. 같은 서울 하늘인데도 그 차이가 느껴진다. 매일 도심 전체에 스모그 머신을 뿌려놓은 것처럼 뿌연 하늘만 보다가 정말 오랫만에 청명한 하늘을 보니 처음 라섹 수술을 했을 때, 눈 보호를 위한 칩거생활을 끝내고 밖으로 나와 세상을 처음 마주할 때처럼 개운하다! 좀 더 어렸을 땐 이런 자연이 고마운 건지 몰랐는데 이젠 마음 깊이 고맙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와중에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모든 게 내맘같지 않다는 걸 이젠 머리로 아는 나이. 하지만, 그럴지라도 큰 기대와 큰 용기로 하던 것을 그만두고 나왔기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여차저차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 그와중에 또 무슨 용기인지 작업실까지 구하고 가꿨다. 졸업장도 채 받기 전부터 돈을 벌면서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졸업이후 따라오는 것들을 살펴보지 못했었다. 뒤늦게나마 내 마음과 소홀했던 잔일들과 부채의식을 정리하는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게 갈무리가 되어 갈 쯤 봄이 오고 있었고 내겐 대상포진이 왔다. 얼마나 정신없이, 나를 돌보지 않았는지 꾸중하듯이 다가 온 대상포진을 앓고 나니 봄은 이미 완연한 상태. 완연한 봄.


왜 그렇게 무수히 많은 시인들이 봄을 찬양했는지 알 것 같다. 쨍한 햇빛과 청량한 날씨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넘어 사람의 기분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뤘던 할일들을 해내고 병까지 앓고 나니 삶에대한 공허함과 허무함이 밀려왔지만 봄이 내게 기운을 준다. 땅꿀을 파봤자 현상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을 내가 다 잡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봄이 해줬다. 날씨가 다했다.


언젠가 수업시간에 니체의 영겁회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학생 때 처음 들었을 때 무서웠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도 발전이 없이 도돌이표가 되면 무슨 마음으로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릴 때 배운 것들은 지나고 돌아보면 나 좋을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더라.) 올 봄이 올 때 내가 겪은 감정들은 마치 처음 겪는 슬픔과 고통, 번민과 우울감 같지만 사실 꽤 여러번 나를 찾아왔었다. 하지만 또 까먹고는 정신없이 살았다. 그런 반복을, 반복하는 나를 인정하기 싫었던 거다. 그런데 봄이 찾아오듯 내게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반복되는 감정의 패턴을 인정하고 나니 좀 편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내게도 그 것이 필요한 거겠지.


또다시 마음의 가을과 겨울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걸 타락내지는 후퇴라고 생각하지 말았으면 한다. 내가.

다시 올 찬란한 봄을 알뜰이 준비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전에 지금 내게 주어진 상황이, 감정이 청명한 봄이 아니지만 계절상 봄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길. 마음을 다잡는다.


고마운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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