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의 한국 산업 진단 - <산업 대전환>, 박종구
한 나라의 국력은 그 나라의 산업과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쥐꼬리만큼 작다. 그렇지만 반도체, 자동차 등 핵심 산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정도로 먹고 살고, 목소리를 낸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우리 산업의 미래에 대한 제안은 차고 넘친다. 핵심 기술 개발, 공정 경쟁 조성, 인력 고도화, 밸류체인 재편 등이 바로 그것이다. 다만, 여기저기 '말'이 흩어져 있다. 정리가 어렵다.
박종구 박사의 <산업 대전환>은 잘 정리된 책이다. 우리 산업이 마주한 미래를 쉽고 간단하게 보여준다. 분량도 부담없다. 100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된다. 경제와 산업, 혹은 주식투자에 관심있다면 흥미롭게 읽어나갈 거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기존의 담론을 깔끔하게 설명한다.
저자는 두 가지 주요한 글로벌 트렌드를 꼽는다. 미국, 유럽과 중국간의 양분, 친환경의 트렌드가 바로 그것이다. 좀 더 살펴보자.
* 박스 안은 인용구
저자는 세계가 양분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미국-유럽 진영과 중국간의 대립이 격화된다는 거다. 미-중 갈등은 최근 2-3년간 주요 화두가 됐다. 세계는 각자만의 길을 걷는다.
중국은 유튜브 안 쓴다. 걔네들은 빌리빌리라는 앱을 쓴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도 안 쓴다. 걔네들은 웨이보를 쓴다. 미래의 '돈줄'인 '데이터'를 안 주려고, 중국은 자기들만의 '표준'을 만들어간다. 인구가 13억명이다. 장벽을 쳐도, 충분한 컨텐츠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유통된다.
저자는 이러한 '분화'가 제조업에도 나타나고 있다고 진단한다.
반도체가 대표적이다. 미국은 네델란드의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이 중국 IT 기업인 '화웨이'와 거래하는 걸 막았다. '자유시장 경제' 체제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자국 기업의 거래 관계를 규제하는 것도 어려운데, 타국 기업에 간섭하다니.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됐다.
만약 중국이 ASML로부터 반도체 장비를 못 사오면,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미국-유럽 반도체와 중국 반도체의 '표준'에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지금까지는 국가간 분업에 기반을 두고 '하나의 표준'을 '잘' 만드는 게 중요했다. 이제는 아니다. 국적에 따라 제품의 '표준'이 분화된다. 어느 나라의 '밸류 체인'에 포함되는 지에 따라, 기술과 경제의 방향성에 차이가 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의 해결책으로 '첨단 기술 확보'를 제시한다.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인건비도 높고, 새로운 먹거리 창출도 어렵다. 성숙 경제에 올라온 이상, 생산성 증가 밖에 답이 없다.
GVC 재편과 무역 분쟁, 기후 변화 이슈가 반영된 세계 통상 질서의 재편에 동시 대응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여기에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따라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우리의 위치는 달라질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판데믹 이후 경기 회복 과정에서 재편되는 GVC에 적극 참여하고 미국과 중국 간 통상 전쟁, 기술 전쟁의 소용돌이를 전략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해결책은 거의 유일하다.
과학 기술 기반의 첨단 제조 기술을 육성하는 것이다. 선진국이나 주요 기업들이 공급 사슬을 구성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 기술을 다수 확보해야 한다.
가령 이런거다.
중국의 전기차 배터리 업체는 CATL이고, 한국은 LG 화학, SK 이노베이션 등이 있다. '전기차 배터리'라는 이름은 같다. 그렇지만 각 기업이 만드는 배터리의 구성요소가 다르다. 우리 기업은 NCM을, 중국 기업은 LFP 유형의 배터리를 만든다. 각각의 배터리에 필요한 소재가 다르고, 장-단점이 다르다.
NCM 배터리 소재 기업은, CATL에 납품이 어렵다. 반대 상황도 그렇다. '표준'이 다르니, 교류가 막힌다. 그렇지만 '궁극의 배터리'가 있다. '전고체 배터리'라는 건데, 이게 NCM, LFP 배터리의 장점만 모두 갖춘 배터리다.
만약 우리가 '전고체 배터리'를 선도한다면? 국적에 영향을 덜 받고, 입지를 높여갈 수 있다. 핵심 기술이 있으니, '국적'을 뛰어넘을 수 있다.
두 번째는 환경이다.
저자는 그간의 세계 경제를 '효율성 중심의 경제'로 진단한다. 그런데, 이게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세계적인 트렌드가 그렇다. 지구온난화, 기후위기를 생각해야 한다. 옛날에는 전기요금 때문에 석탄발전소를 건설했다. 이제 그런 말 하면 큰일 난다.
이러한 기조에 따라, 제조 기업도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려워진다.
앞으로는 플라스틱 제품의 생물학적 안전성과 가격 대비 편리성을 평가하는 수준을 넘어 원재료의 제조 혹은 가공 단계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 제품을 사용하는 동안은 물론 최종 폐기한 후 자연 순환계에 포함되는 전체 과정 동안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효율성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지금 효율적이라고 평가받는 플라스틱도 더 이상 효율적인 재료가 아니게 될 것이다.
저자의 말은 이렇다. 그간 플라스틱은 저렴하면서도 효율적인 원료로 평가받았다. 페트병은 유리병보다 만들기 쉽고, 들고다니기 쉽고, 저렴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플라스틱은 분해가 어렵다. 분해가 어려우니 처리도 어렵다. 환경에 악영향이다. 글로벌 트렌드는 플라스틱의 악영향을 가격에 반영하라고 요구한다. 그간 플라스틱의 가격은 원가, 이윤만 고려해서 100원에 책정됐었다. 그러나 이제는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을 고려해서 150원이 될 수 있다.
이러면 플라스틱 판매량은 감소한다. 플라스틱 제조 기업의 부담은 늘어난다. 대신, '생분해 플라스틱' 같은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가치는 상승한다. 친환경에 준비된 기업들은 혜택을 보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어려워진다.
이 책은 100페이지 가량의 짧은 책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말일 수 있다. 다만 잘 정리되어 있다는 게 포인트다. 현재의 글로벌 트렌드, 그리고 우리나라가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간략하지만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도움이 될 만하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앞으로의 트렌드는 무엇이고, 어떤 정책이 필요한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투자자라면 미래 유망 기업을 골라내는 기준을 정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