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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Oct 31. 2021

그깟 질병가지고 호들갑은?

질병이 바꿔놓은 인류의 역사 -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

# 그깟 감기가지고..


기술, 경제, 정치가 세상을 바꾼다. 맞는 말이다. 엔진 기술 덕분에 자동차를 탄다. 생산력이 증가한 덕분에 복지 제도가 가능하다. 정치인 한명 잘못 뽑으면? 머리 아파진다.


그런데 얼마전에 읽은 책은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기술, 경제, 정치만큼, 아니 그것보다 중요한 건 바로 전염병'이라는 거다.



이 책은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감염병>이다. 페스트, 인플루엔자, 콜레라, 말라리아, 매독 등의 전염병이 인류 역사에 미친 파급효과를 쉽고, 재미있고, 짧게 서술한다. 술술 읽힌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깟 '병원균'이 세상을 바꾸는게 신기하다.


저자는 근대 사회의 형성에 '페스트'라는 질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페스트가 어땠길래?




# 그깟 페스트?


근대 사회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과학기술과 시장경제가 그것이다. 전자가 가능하려면 종교적 맹신이 아닌, 이성적, 과학적 사고가 독려돼야 한다. 후자가 가능하려면, '신분'이 아닌 '돈'으로 살아가도 괜찮은 사회가 조성돼야 한다.


저자는 말한다. 페스트가 이걸 가능케 했다고.


페스트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이탈리아 북부 베네치아의 사망률은 4분의 3, 파도바의 사망률은 3분의 2 수준이었다. 오늘날 프랑스 남부에서 스페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는 무려 전체 인구의 80%나 되는 엄청난 수의 사람이 사라졌다고 추정된다.

페스트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기 전인 1328년 프랑스 인구는 1500만~1800만 명으로 추정된다. 페스트 이전 수준까지 인구가 회복되려면 400년 이상의 기나긴 세월이 필요해, 18세기 말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인구수를 회복했다.

1350년 전후의 유럽 인구는 1억명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중 4분의 1에서 3분의 1이 페스트로 사망한 셈이다.


당시 유럽 인구의 20-30%가 죽었다. 한반도 인구로 치면, 1000-1500만명이 죽은 거다. 사람이 줄었다. 노동력이 귀해졌다. 같은 일을 시켜도, 옛날보다 돈을 더 줘야 한다. 임금 상승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한다. 임금이 높아지니, 기술 개발과 자본투자에 더 많은 힘을 쏟는다. 저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근대 과학기술의 맹아가 자라났다고 말한다. (18세기 영국 산업혁명도, 영국의 높은 임금을 원인으로 지목하는 학자들이 많다.)


인건비 폭등은 활판 인쇄술과 대형 범선 등의 발명으로 이어졌고 군사 측면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전쟁터에서 필요한 능력과 기술을 연마한 전문 기사와 용병을 고용하려면 고액의 인건비를 지불해야 하고 활쏘기나 말타기 같은 기술이 숙련되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에 농민에게 쥐어주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총기가 급속히 보급되었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도 널리 확산됐다. 옛날에는 사람이 필사했다. 이제 사람이 없다. 그러니 책을 인쇄하게 됐다. 결과적으로 지식과 정보가 많이, 빨리 확산된다.


이게 있었기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그전에는 성경을 가진 신부님이 하나님 말씀을 독점했다. 그런데 일반 신도도 성경을 가지게 됐다. 신부님의 말씀이 뻥인지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게 당시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 같은 삽질과 맞물려서,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로부터의 '인간의 이성과 과학이 지배하는 사회'로의 전환점이다.


임금 상승은 자본주의의 토대인 '소비 문화'의 기반도 다졌다.


페스트로 크게 줄어든 인구를 오랫동안 좀처럼 회복하지 못한 유럽에서는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 16세기 이후로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 덕분에 하급 장인과 상인 등 도시 주민의 살림살이는 나날이 넉넉해졌다. 형편이 나아진 사람들이 식탁에 고기를 올리는 횟수가 늘어나며 식육 수요가 증가했다.

또 연극 등 문화와 여흥, 오락에 돈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는 아시아와 중남미에서 수입된 홍차와 설탕 등의 기호품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도시 주민이 늘어나 시장경제 규모가 확대되었다.


소비력이 상승되니, 더 많이 먹고 누릴 수 있게 됐다. 내가 쓴 돈은, 누군가의 수입이다. 내가 더 많이 쓰면, 누군가는 더 많이 번다. 더 많이 번 누군가를 보고 욕심이 동한 다른 누군가는, 더 좋은 상품을, 더 많이 만들고자 노력한다.


자본주의는 자급자족이 아니라 소비 문화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페스트는 이걸 가능케한 여러 요소 중 하나다.


종합하자면, 저자는 페스트가 초래한 급격한 인구 감소와 임금 상승이 근대 사회의 초석을 다졌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다만 자본주의를 설명할 때, '소비 문화' 외에는 명확한 연결고리가 잘 안보여서, 좀 아쉬웠다. 애초에 질병이라는 한 가지 요소로 거대한 사회적 전환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어렵긴 하다.


어쨌든 질병으로 세계 역사를 풀어내려고 한 시도 자체가 재밌고, 신박했다. 페스트 외에도, 인플루엔자, 말라리아 등 다양한 질병이 있어서,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 그깟 코로나?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니까, 이게 남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코로나를 겪는다. 코로나는 꽤 많은 것을 바꾸고 있다.


나는 두 가지를 꼽는다. 에너지 전환과 디지털 전환이다.


'탄소중립'이라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도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제시했다. 기후 위기가 문제다. 그래서 태양과 바람으로 전기를 만들고, 자동차를 움직이고, 공장을 돌리겠다는 거다.


뜬금없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지루하다. 지난 수십년간 이 이야기를 했다. 지난 2000년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신재생에너지 투자, 기술개발을 촉진하겠다고 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과 유사하다.



그간 말은 많이 했는데, 뭐 잘 안됐다는 방증이다. 지난 미국 대통령 트럼프는 지구온난화를 부정했고, 파리협약에서 탈퇴하기까지 했다. 전세계 탄소 배출량의 11%(2위)를 차지하는 세계 최강국이 배째라고 하니, 별 수가 없다.


그러다 코로나가 왔다. 연임 가능성이 높았던 트럼프지만, 대응 과정에서 삽질을 많이 했다. 바이든이 대통령 됐다. 바이든은 기후위기를 인정한다.


그리고 지난 2020년, 미국, 유럽은 후퇴한 경기를 살리는 방안으로 '그린 뉴딜'을 제시했다. 국가가 침체된 경기 회복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하는데, 이걸 '친환경' 방면으로 하겠다는 말이다.


대규모 태양광, 풍력 발전기, 전기, 수소차 충전기, CCUS 기술 등 다양한 친환경 기술에 돈을 쏟는다. 이와 동시에 탄소 다배출국가에 패널티를 도입한다. 유럽에 수출하는 우리나라 철강 기업은 25년부터 '탄소세'를 납부해야 할 수도 있다.


탄소중립은 '환경정책'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산업정책'이 있고, '무역정책'도 있다. '친환경'은 산업이 됐고, 장벽이 됐다. 선진국이 유리하고, 잘 할 수 있는거다. 이제 이 방향으로 갈 것만 같다.


디지털 전환도 빠르다. 쿠팡을 써보니까, 훨씬 저렴하고, 편하다. 배달 음식도 낯설지가 않다. 원래 치킨, 짜장면만 배달시켰다. 이제는 리조또, 곱창전골, 커피까지 배달된다.


아래는 우리나라의 인터넷 침투율이다. 지난 수십년간 E-Commerce 침투율이 높아지고 있었는데, 코로나가 여기에 힘을 보탰다. 미국, 유럽 같이 우리나라보다 느렸던 나라는, 코로나가 큰 분기점이 됐을 거다.



먹는 것 뿐만이 아니다. 금융도 교육도, 이제 '디지털'이다.


은행 가기 힘들어서 카카오 뱅크를 써봤다. 계좌도 쉽게 만든다. 개인정보 공개만 동의하면, 하루만에 대출도 해준다. 이거 한번 쓰면, 다른 거 못 쓴다. 학생들도 학교 안 간다. 대신 온라인 수업을 듣는다. 편하다.


그런데 모든게 디지털화되면, 승자독식 현상이 강화된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오징어게임이 아주 잘 나간다. 승자는 플랫폼을 통해 세계 시장을 잡아먹는다. 그런데, 기존 방송사는 큰일났다. 그동안에는 좀 못 났어도, 비슷하게 못난 다른 방송사와 경쟁하면 됐다. 하지만 이제는 시청자의 관심과 시간을 두고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


사람들은 디지털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한 장소에서 '아주 흥미로운 것'에 돈과 시간, 그리고 관심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돈과 시간, 관심은 한정되어 있다. 경쟁에서 밀리면, 아예 밀린다. 과거에 사람들은 '로컬'이라는 물리적 한계에서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것에 돈과 시간을 써야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하여간, 코로나도 꽤 많은 것을 바꾸고 있는 것 같다. 좋은 쪽으로, 잘 바뀌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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