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선생님의 질병 추척지 -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
눈에 확 띄는 분홍색 책이다. 제목도 참신하다. <세종의 허리, 가우디의 뼈>다. 부제도 흥미롭다. '탐정이 된 의사, 역사 속 천재들을 진찰하다.' 바로 사서 읽었다. 술술 읽힌다.
저자는 대학병원 교수다. 의학지식을 토대로 세종대왕, 가우디, 도스토옙스키, 모차르트, 니체, 모네, 퀴리, 말리 등 다양한 천재들의 인생과 질병을 추적한다. 천재가 시현한 작품은 질병 덕분에, 혹은 질병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다.
그간 천재들의 뛰어난 결과물은 종종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체적 아픔은 잘 못들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 흥미로웠다. 특히 세종대왕과 모네가 인상 깊었다.
* 박스 안은 인용구
먼저 세종이다. 그간 세종은 외부 활동은 없고, 고기만 먹고, 책만 보는, 정신적으로는 부지런하지만 육체적으로는 게으른 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실제로도 그랬다. 역성혁명을 성공한 장군의 아들인데, 신체 활동은 적었다.
세종은 유독 운동을 싫어했고 말타기를 기피했다. 오죽했으면 아버지 이방원은 이렇게 말하며 함께 사냥을 가자고 졸랐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산책하고 운동해야 합니다. 문과 무, 어느 하나만 집중하면 안 됩니다. 오늘 이 아버지가 운동을 한 수 가르쳐 드릴까 합니다."
게을러서였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자는 새로운 해석을 제기한다. 세종이 아팠기 때문이라는 거다. 저자는 세종이 강직성 척추염을 앓았다고 한다.
이 모든 증상을 발생시키는 단 하나의 질병이 있다. 강직성 척추염이다. 강직성 척추염은 결국 허리가 아픈 병이지만 다른 관절과 장기에도 영향을 준다.
세종도 22세에 무릎 통증이 생겼다. 그리고 무릎 통증은 강직성 척추염이 발생했다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세종의 허리는 굳어 간다. 세종은 '허리와 등이 굳고 꼿꼿하고 굽혔다 폈다 하기조차 어렵다'는 독특한 증상을 보였다.
결정적인 추가 단서가 있다. 40대부터 심해진 눈 증상이다. 세종의 눈은 시리도록 아프고 까끌거리다가 돌연 씻은 듯 나았다. 뿌옇게 흐리기도 하고 붉게 충혈되기도 했다. 이는 급성 포도막염이다.
조선의 황금기를 이끈 지도자가 강직성 척추염 환자다. 그것도 이른 나이부터 아팠다. 이쯤되니까, 세종이 더욱 대단해보인다. 누워있기도 바쁠텐데, 앉아서 죽어라 뭘 했다.
집현전 학자들과 한글을 만들었다. 정책 토론인 경연도 자주 열였다. 복지도 잘했다. 여자 관비에게 출산휴가를 준건 유망한 일화다. 조선 최고의 과학자인 장영실도 세종이 데려다 썼다. 농업, 교육, 복지, 언어학, 역사, 과학, 수학, 군사, 하여간 다 잘 됐다.
아픈 몸을 이끌고 이걸 했다. 이걸 했기에 아팠나?
이런 상상을 해봤다. 만약 세종의 허리가 튼튼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육체활동에 재미를 느꼈더라면, 한글이 있었을까? 대신 정복전쟁을 토대로 조선의 영토가 확장됐을까? 아니면 더 늦은 나이까지 일하면서 더 많은 업적을 창출했을까?
세종의 질병이 역사의 진행경로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 모든 일은 건강하거나, 아픈 사람이 한다.
나는 미술을 모른다. 그래도 모네는 안다. 이름이라도 안다. 나같은 무식이도 아는 걸 보면, 모네는 분명 대단한 사람일 거다.
미술사는 인상파부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고 선언한다. 인상파 이후를 모더니즘이라고 칭하니 인상파 이전 화풍은 자연스레 고리타분한 중세 미술로 묶인다. 그리고 클로드 모네는 인상파의 아버지라 불린다.
내가 아는 인상파는 대충 이렇다. 그전에는 신화, 역사, 종교가 그림의 주요 주제였다. 그리고 그림마다 교훈이 있었다. 하지만 인상파는 빛과 풍경, 자연을 그렸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했다. 하여간 예술 사조를 바꿨댄다.
뭘 처음하면 욕을 먹는다. 모네도 그랬다. 기존 전시회에 그림을 올려주지 않아서, 따로 스튜디오 잡고 전시했다. 졸작이라고 엄청 욕먹었다. 그렇지만 나중에는 성공했다. 살아 생전에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벌었다. 흔치 않은 케이스다.
하지만 그런 모네에게 병이 생겼다. 미술가에게는 치명적인 병이다. 눈에 문제가 생겼다.
모네는 백내장에 걸렸다. 백내장은 눈의 수정체가 혼탁해지는 질병이다.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증상과 비슷하다. 백내장은 저절로 좋아지는 경우가 드물다. 증상이 발생하면 지속적으로 나빠진다.
백내장은 담배를 많이 피고, 햇빛을 많이 쬐면 발병 위험이 높아진다고 한다. 모네는 그걸 다 했다. 특히 자연 관찰한다고 맨날 밖에 있었는데, 선글라스도 안꼈다고 한다.
백내장을 앓은 모네는, 과거의 색채 구성 능력을 상실했다. (나중에는 다행히도 수술을 통해 회복했다) 위의 그림은 같은 대상을 그렸다. 윗쪽은 아플 때 그린 그림, 아랫쪽은 멀쩡할 때의 그림이다. 내가 봐도 아랫쪽이 조금 더 이뻐 보인다.
백내장의 모네는 건강한 모네와 다른 그림을 그린다. 만약 그의 백내장이 조금 더 일찍 발병했다면 어땠을까? 나는 그의 이름을 몰랐을 수도 있다.
건강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이한 능력과 정신력을 갖춰도, 아프면 많이 힘들다. 모네마저도 우울증을 앓았다. 나는 그 정도의 능력과 정신력이 없다. 잘먹고, 잘자고, 행복하고, 운동하고, 그러고 살아야겠다.
인간은 허무한 존재라고 느꼈다. 사람은 자신이 위치한 몸, 땅,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 나는 21세기 한국의 언어, 의료, 문화, 경제에 젖어든 사람이다. 내가 아프리카에 태어났다면, 나의 삶은 어땠을까? 500년 전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내 몸, 내 땅, 내 시대를 인정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겸손하고, 감사하고, 행복하자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위인들은 어떻게든 후대에 '가치'를 남겼다. 내가 '가치'를 남길 수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악'은 남기지 말자는 생각이다.
언제부터인가 '거대 담론'을 잊어버렸다. 하루하루 일하고, 사람 만나고, 쉬고. 그것만 해도 시간이 훅 간다. 이거 잘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슨 거대 담론이냐. 잘 모르겠다. 뭔가 크게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배웠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많이 잊었다. 이게 맞나?
어쨌든 천재, 위인으로 기억됐던 이들의 '질병'을 알게 됐다. 그들은 남들처럼 '아팠던' 사람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이다.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