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무원이 저술한 조선 공무원의 일생
양반들은 과거를 보기 위해 7, 8세에 서당 공부를 시작해 사학이나 성균관 등을 거쳐야 했습니다. 때로는 개인교습을 받아가면서 20-30년간 공부에만 매진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과거에 도전하려면 경제적 뒷받침과 가족의 지원이 필수 적이었습니다.
교육방법은 암기에 주로 집중하는 것이었고, 교육 내용은 유학에서 이상 세계로 설정한 고대 중국 사회였습니다.
역사교육도 우리나라는 약간 다룰 뿐이었고, 대부분은 중국의 고대 역사가 중심이었습니다.
유교 이념과 인성교육에 지나치게 치우치다 보니 수학, 과학, 기술 같은 실용 학문은 아예 가르치지 않 았습니다.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과거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의 과거는 이미 쇠진했다. 과거시험을 제대로 바꿔야만 백성들의 삶이 나아질 수 있다.
일단 신참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그를 말석에도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동료나 사람 취급을 하지 않은 것인데, 새 귀신이라는 뜻에서 신귀라고 불렀습니다.
신입 관료들은 면신례가 끝날 때까지 50일 동안 얼굴에 분칠을 한 채 다 떨어진 옷을 입고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절름발이 걸음으로 게를 줍는 시늉을 하고 수리부엉이 울음을 흉내 내는 일 따위는 제가 직접 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해보려고 애를 썼으나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걸 어쩌겠습니다.
그저 난잡 하고 우스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명령에 따르지 못한 것이지 절대 존경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평상시에는 묘시(오전 5-7시)에, 겨울에는 진시(오전7-9시)에 출근했습니다. 그리고 출근부인 공좌부에 서명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공좌부에 기록되는 출근 일수는 근무 성적 평가와 승진에 반영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청은 유시(17-19시)에 퇴근을 했고, 겨울에는 신시(15-17시)로 앞당겨졌습니다. 퇴근 후 관료들은 자연스럽게 술자리 를 마련했고, 부서 내외의 모임이 자주 열렸습니다.
젊은 관리 중에서 학문이 뛰어난 사람을 뽑아 책 읽는 휴가를 주어 오로지 공부에 전념하게 하는 서재인 독서당도 있었습니다.
독서당은 한강 근처의 경치가 좋고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20칸 규모에다가 서늘한 마루와 따뜻한 방을 갖춘 곳이었다고 합니다.
신숙주, 이황, 유성룡 같은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독서당을 거쳐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