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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Apr 13. 2020

당신도 '시험 인간'이신가요?

사회학자-심리학자의 우리나라 시험 분석 - <시험 인간>, 김기헌-장근영

1. 지긋지긋한 시험


한국에서 태어나서 정규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이상, 시험은 피할 수 없다. 일년에 한 번 있는 수능부터 시덥잖은 쪽지 시험까지, 우리나라 학생은 시험 보면서 좋은 시절을 다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간이 있는 곳에는 항상 '평가'가 존재한다. 하지만 '평가 방식'은 사회마다 다르다. 우리는 5지 선다형-객관식 시험이 보편적인 '평가 방식'이다. 얼마나 보편적이냐면, 한 학생이 음악과 미술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느끼는지도 객관식시험으로 평가한다.


미국 건국자 중 한 사람은 "죽음과 세금은 피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나라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죽음과 세금, 그리고 시험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시험 공화국이다.


청소년 정책연구원의 김기헌, 장근영 박사의 저서 <시험 인간>은 한국 사회에서 시험이 가지는 의미와 파급효과, 그리고 시험이 만들어내는 인간 형태 등을 다룬다.






2. 시험 인간


박스는 <시험인간> 인용구


대한민국은 '시험공화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시험만능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시험인간'이 되고 말았다.

시험인간이란 선발과 경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루어지는 시험에 적응한 인간형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볼때 한반도 거주민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시험'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일제 시대의 고등 문관 시험, 광복 후의 행정-사법-외무 고시가 대표적이다. 이 시험들은 공공 부문 노동자의 충원 통로였는데, 통과만 한다면 높은 확률로 중산층 이상의 삶이 보장되었다.


근대화, 경제 성장는 민간 영역의 성장을 촉진했고, 민간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력은 과거에 비해 급속히 증가했다. 그리고 기업도 '시험'을 통해 노동자를 뽑았다. 1957년 삼성물산이 민간 기업 최초로 공개채용 방식을 채택한 후, 필기 시험 + 면접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공채 시대'가 열렸다. 전문직 라이센스도 시험을 통해 분배했다.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감평사 등의 전문직은 문-이과 가릴것 없이 시험이라는 '벽'을 통과한 사람만을 구성원으로 인정했다.


일자리 뿐만 아니라, 학력 자본의 획득 과정에서도 시험은 (어쩌면 더) 결정적이었다. 고등학생은 '수능'이라는 큼직한 시험 하나, 그리고 몇달 간격으로 보는 중간-기말 고사를 3년 내내 봐야한다. 중학생도 '특목고-자사고'에 진학하고 싶다면 중간-기말 고사에서 높은 성적을 거둬야했고, 필요할 경우 입학 시험도 따로 준비해야 했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제도권' 내에서 '안정적'으로 자리잡으려 한다면, 시험을 질릴 정도로 보게될 가능성이 크다. 저자는 우리 사회를 시험 공화국이라고 지칭하고, 여기에 적응한 사람을 시험인간이라고 말한다.


시험 공화국이 양산해내는 시험인간은 어떤 사람들일까?


시험이라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맞추기 위해 훈련할수록 나만의 생각이나 가치관 같은 고유한 정체성의 요소를 키울 기회는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우리나라 시험은 객관식-5지선다형이 특징이다. 정답은 정해져있으며, 피평가자는 제대로 '찍기만' 하면 끝난다. 그런데 이런 식의 평가는 개인의 고민, 가치관, 비판적 사고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왜'인지 질문하거나 비판적으로 생각하는건 비효율적이다. 그냥 주어진 거, 군말 없이 열심히 하는게 이런 유형의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한 최고의 방식이다.


중-고등학교 내신 시험에서는 교사가 강조한 걸 닥치는 대로 외우고, 빠릿빠릿하게 기억해내는게 제일 중요하다. 대학교 시험이라고 별반 다르지는 않다. 교수 말을 얼마나 잘 받아적고 시험에 토해내느냐가 학점을 결정한다. 대학교 와서 가장 충격적이었던건,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는 교수 강의를 달달 암기해야 한다는 거였다. 강의 자체가 흥미로운 경우는 많았지만, 대부분의 시험은 단순했다. 객관식이거나, 아니면 단순 암기로 족한 주관식 시험. 내 주관과 고민은 불필요하다.


본인들은 미국에서 좋은 교육 받고 박사까지 땄으면서 단순 암기식 시험을 내는 교수들을 생각하니 짜증이 나서, '이딴 식으로 시험 낼거면 어디가서 명문대라고 하지 마세요'라고 시험지에 써낸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치기 어린 행동이다.


그래도 나만 이렇게 느낀건 아닌가 보다. 서울대학교 학생의 대학 생활을 분석한 책인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의 저자 이혜정은 상위권 학생들과 면담한 후,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너만의 어떤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되고, 네 생각이 아무리 좋아도 교수님 생각과 다르면 버려야 하며, 교수님의 말씀을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적어야 좋은 성적을 받는다.


시험은 틀에 맞춰진 '정확한 정답' 요구한다. 게다가 많은 경우 '시간 제한'까지 둔다. 주어진 조건이  모양이니, 피평가자의 입장에서 비판적 사고, 상상력은 고득점에 방해되는 ' 생각' 밖에  된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시험은 비판적 사고가 거세되고, 자신만의 고민이 없으며, 기존 가치에 마냥 순응하는 사람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선발과 경쟁의 기능을 전제로 한 고부담 시험을 통해서 가능해진 줄 세우기 프레임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불평등과 부당한 차별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의 시험은 대부분 '선발'을 목표로 한다.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줄세우기'를 수반한다.


요즘엔 좀 나아졌지만, 십년 전만해도 '대학 못가면 미싱, 대학 가면 미팅' 같은 표어가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다. 시험을 얼마나 잘봤느냐에 따라 갈리는 사회적 격차도 '당연한 것'으로 치부됐다. 여기에는 나보다 시험을 못 본 사람은 못 사는게 당연하고, 나보다 시험을 잘 본 사람은 잘 사는게 용서가 되는 그런 심리가 깔려있다.


저자는 시험이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 해준다고 말한다. 게다가 시험은 사람 사이에 서열 관계를 형성하며 이를 합리화 시켜준다. 갑-을의 차별 관계를 지적하기 보다, 갑의 위치에 올라가지 못한 을을 손가락질 한다. 갑이 되면 마음껏 가혹해지고, 을이 되면 비굴함을 인내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사람들은, 특히 학생들은 행복하지 않다. 시험이라는 줄 세우기로 평가당하는 학생들은 존감을 느끼기 쉽지 않다. 좋은 성적을 거둔 소수의 경우, 일시적으로 행복함을 느끼겠지만,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달려가야 한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 다수는? 좋은 성적부터 순서대로 자존감과 인정을 배분하는 시스템에서, 성적이 낮은 학생이 행복해지는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나 저러나, 우리 학생들에게 행복은 말그대로 남의 나라 일이다. OECD 통계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스스로의 삶에 만족한다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을 보자. OECD 전체 평균은 67%인데 우리는 그보다 낮은 57%다. 비경쟁적 교육의 대표 주자인 핀란드, 네델란드 같은 나라는 이 비율이 80%에 가깝다. 그래도 일본보다는 높. 일본은 50%다. 이 나라도 참 문제 많다.


PISA 2018 Result : What School Life Means for Students' Lives


단순히 삶의 만족도가 낮은게 아니라, 우울함도 많이 느낀다. 항상 우울함을 느낀다고 응답한 학생의 비율 OECD 평균이 6% 정도인데 반해, 우리나라는 10%다. 좀 잘산다고 알려유럽 국가 중 5%를 넘는 국가가 거의 없다. 그래도 일본보다 낮다. 일본은 11%다.



이런 조건의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으려면 교육이 아니라 훈련이 필요하다. 문제의 내용을 이해하고 그동안 축적한 자신의 지신을 적용해서 해결하는 과정이 아니라, 여러 가지 유형의 문제-정답의 패턴을 반복해서 숙달함으로써 거의 생각에 이르지 않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훈련 말이다.

그 지겨운 공부를 중단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멍청해진다.


행복을 포기해가며 미친듯 공부하니까 공부로 정점을 찍을까 싶겠지만, 그건 또 아니다. 우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공부'의 뜻을 다시 짚어보자.


우리 사회에서 공부는 사실 '지식에 대한 탐구' 보다는 '시험에서 더 성적을 거두기 위한 기존 지식 암기 및 문제 풀이'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공부는 호기심에 기반한 탐구 행위라기보다 경쟁심에 기반한 훈련이라고 보는게 더 적합하다.


원인은 우리 사회가 공부를 질리게 만든다는 데 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이 있던 아이조차, 시험 대비 과정에서 공부는 '재미없는 것'이 된다. 지긋지긋한 시험을 안봐도 되는 어른이 되면, 공부 이유를 상실한다. 우리 청소년들은 중고등학교 때만 해도 교육 평가에서 다른 나라를 압도했지만, 어른이 되면 오히려 평균 수준이거나 평균보다 못하게 된다. 시험을 위한 공부마저 안하게 되니까 그렇다.


저자는 우리나라의 시험이 똑똑한 어린이, 멍청한 어른을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세계화로 인해 다른 나라의 인재들과 '평생' 경쟁해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지만, 우리의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시점에서 오히려 공부에 손을 놓는다. 공부에 대 부정적인 선입견을 심어준 결과이다.


수업 방식은 강의식으로 교과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에서 토론식으로 본인 스스로 생각하고 친구들과 논의를 통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중간 및 기말 등 지필고사는 순차적으로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고 과목 이수 여부만으로 평가하는 과목을 늘려야 한다.


저자는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성장는 과정에서 시험이 맡았던 긍정적인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간 시험은 산업화 시대에 맞는 인재를 '줄세우기'라는 명확한 방식으로 선별해줬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나라의 시험은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존재가 됐다. 저자는 교육, 시험 방식의 변화를 강력하게 주문한다.


상대평가를 토대로 한 '줄세우기' 대신, 'Pass-Fail' 평가 방식을 기본으로 하여 아이들이 시험이 아닌 학습에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한다. 교사가 시험에 필요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기존의 강의 방식 대신, 학생들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토론식 수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강고한 대학 서열 구조 완화의 필요성과 국가-기업-대학의 선발 방식 전환도 언급한다.


'시험 공화국', 그리고 '시험 인간'에 대한 저자의 통찰과 해결책은 굉장히 적확하며 구체적이다. 시험이 개개인을 어떻게 주조하는지에 대한 직관적인 사례와 설명이 풍부하다. 시험을 꽤 많이 봤다고 생각하기에,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었다.


그렇지만 저자가 주장한 대안만으로 과연 '탈시험 사회'가 가능할런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3. 시험 인간 계속될 것 같은데


'시험 인간'을 창조해내는 주된 기제는 바로 5지 선다형-객관식 시험이다. 아무리 토론-참여형 수업을 해도 단순 암기형 시험을 토대로 생활기록부와 학점을 매긴다면, 학생들은 토론 준비보다 시험 준비에 매진할 거다. 평가 방식이 본질적으로 바뀌어야 '탈시험 사회'가 가능하다.


그런데 평가 방식을 변화시키는거, 이거 쉬운게 아니다. 왜냐하면 시험은 단순히 '학습 평가'가 아니라 '희소한 자원과 가치'를 배분하는 사회적인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희소한 자원과 가치' 획득 여부에 따라 사회경제적 격차 상당해진다. 단순히 '교육적 관점만' 고려하고 변화를 추진하면 역풍이 분다.


# 목적지는 변함없다


중고등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싶다. 아무리 학교에서 과목 구성과 수업 진행 방식을 바꿔도, 많은 학생들이 '더 좋은 대학'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뛰어간다는 점에는 변화가 없다. 왜냐하면 좋은 대학 입학은 더 나은 사회경제적 위치, 더 높은 정신적 만족감에 유의미하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화여대 교육연구소 <대학 학벌이 대졸자의 첫 취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상위 10개 대학 졸업자의 첫 일자리가 대기업 정규직일 가능성은 31위권 이하 졸업자의 1.7배에 달한다. 곧 살펴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소수의 대기업-공기업 일자리와 다수의 중소기업 일자리 사이의 임금, 재직기간 격차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당연 노동자가 느끼는 '삶의 만족도'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명문대 빼면 다 고만고만해" 같은 이분법적 문제도 아니다. 대학 순위가 더 높을수록 임금은 '계단형'으로 증가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은 우리나라 148개 대학을 수능 성적에 따라 5개 집단으로 구분하고, 집단간 임금 격차를 조사하여 <대학서열과 생애임금격차>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대학 서열과 생애임금격차> - 한국노동연구원('19/이지영, 고영선)

위 그림을 보면 1분위 대학 졸업자의 평균 임금은 2900만원인데 반해, 5분위 대학 졸업자의 평균 임금은 3800만원에 달하는 걸 알 수 있다. 3분위 대학 졸업자의 평균 임금은 약 3350만원인데, 상위 10개 대학이 아니라도, 어쨌든 더 좋은 대학에 갈수록 더 나은 임금을 받는걸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집단간 임금 격차는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커진다. 물론 정규직 근로자 비율도 대학 순위가 높아지는 것과 비례해서 증가한다.


좋은 대학은 일자리에만 영향을 미치는건 아니다. 좋은 대학은 삶의 만족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  경제학연구(김영철 : 상명대학교 교수/'15)


상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김영철의 논문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는 성적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준다. 그는 학력 수준 별로 '삶의 만족도'를 분석했다. 위의 표는 전문대학교 졸업자의 만족도를 기준으로, 학력별 삶의 만족도가 얼마나 차이 나는지를 보여준다.


소득 변수를 통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위 10개 대학 졸업자의 만족도는 전문대학교 졸업자에 비해 약 25%p, 소득 변수를 통제하면 약 20%p 가량 높게 나타난다. 임금격차와 유사하게 더 나은 학력, 더 좋은 학벌일수록 삶에 만족할 확률이 커진다.


논문 저자는 삶의 만족도를 결정함에 있어 '차별적 처우를 얼마나 인지하느냐'가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학력-학벌 수준이 낮을수록 일자리를 얻기 위한 취업 과정, 기업 내에서의 승진 경쟁, 그리고 일상생활 전반에서 '차별을 당한다'고 느낄 가능성이 크다는 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고등학생들에게 더 나은 대학을 가는게 멍청한 판단이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는 '더 나은 교육'보다 '더 나은 시험점수'에 더 많은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다.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 좋은 일자리는 시험을 봐야 한다



일자리 평범한 사람의 경제-사회 생활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괜찮은 돈을 주고 안정성도 높은, 좋은 일자리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전문직, 금융 공기업, 대기업이 흔히 말하는 좋은 일자리다. 다만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소수고, 상당수 노동자들은 중소기업에서 근무하고 있다.


비교해보자면, 삼성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평균 연봉은 7000만원, 한국은행으로 대표되는 금융공기업 평균연봉은 9000만원 정도 된다. 변호사는 8000만원 정도다. 변호사 소득 통계가 이상한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니 넘어가자. 중소기업은 4000만원도 안 된다.


[연봉] 대-중소기업, 변호사(고용노동부), 금융공기업(알리오) / [불만족도] 잡코리아('19, 공기업 전체)


직장생활 불만족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직장생활이 불만족스럽다고 응답한 비율의 경우, 중소기업 노동자는 72%에 달하는 반면, 대기업-공기업 노동자는 60% 조금 안 된다.


재직 기간의 경우, 대기업은 10년 정도고 금융 공기업은 10년을 넘긴다. 변호사는 죽을 때까지 라이센스를 보유한다. 모든 신문 대서특필되는 천인공노할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라이센스는 평생 간다. 그런데 중소기업 재직 기간은 3년 정도다.


많은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특징으로 경직성이 크고 상층이동이 쉽지 않다는 점을 언급한다. 개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게 장기적으로도 합리적이다. 몸값 불려가면서 이직하는 쉬운게 아니다.


그런데 좋은 일자리는 많은 경우 시험으로 사람을 뽑는다. A매치로 대표되는 금융 공기업 필기 시험, 로스쿨 졸업 후 보는 변호사시험, SSAT로 대표되는 대기업 인적성검사 시험. (다만 대기업의 경우 공채 폐지, 수시 채용, 경력직 위주로 바뀌는 트렌드라고 들었다) 이거 다 시험이다.


 20-30대의 청년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시험을 더 잘 봐야한다. 새내기가 아닌 이상 고 싶거나 여행가고 싶어서 휴학하거나, '마냥 노는 동아리' 들어가면 정신나간 사람 취급 받는다. 좋은 일자리는 갈수록 줄고 있지만, 젊은 청년들의 수에는 큰 변화가 없다. 경쟁은 당연히 치열하다.


# 시험 방식을 바꾸는 건 한계가 있다..


정리하자면, 우리 사회에서 시험은 '남들이 모두 원하지만 그 수는 부족한, 희소한 자리'를 배분하는 수단이다. 이걸 가졌을 때와 갖지 못했을 때의 격차는 체감할만큼 크다. 그리고 이 게임에 많은 참가자들이 치열하게 달리고 있다. 인생을 걸고 말이다. 대치동의 10대부터 노량진의 20-3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구조 자체가 이러니, 이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공정성'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공정하게 느껴'지는건 '한낮한시' '동일한 문제'를 토대로 '정해진 정답'을 물어보는 수능같은 시험이다.


많은 전문가가 4차 산업 시대에 필요한 인재와 '수능'이 길러내는 인재상이 상충된다고 말하지만,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은 '정시 확대'를 원한다. 이들에게는 '더 나은 교육' 보다 '더 공정한 평가'가 절실하다.


(민간 기업은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만) 공공 분야의 일자리 채용 과정에서도 '공정성'은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양질의 일자리'가 희소해지고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더욱 확대될 거다. 만약 한국은행, 산업은행이 공채 필기시험을 폐지하고, 기관별로 원하는 인재를 '정성 평가'로 뽑는다고 발표해보자. 이걸 추진하면 반발이 엄청날거다. 전문직 라이센스도 시험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부여한다면 역풍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셀 거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개인의 잠재력, 적성, 역량을 밀도 있게 평가할 수 있는 방식을 전면으로 내세우기 어렵다. 이걸 하려면 평가자의 재량과 자율성이 들어가야 하는데, '공정성 시비' 들어오기 딱 좋다. 사교육 몰빵받고 100시간 공부해서 100점 맞은 아이와 가족 부양하고 10시간 공부해서 99점 맞은 아이를 비교하면 후자의 잠재력이 크겠지만, 이렇게 주관을 넣어서 평가하는 순간 공격이 들어온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정한 시험'이 아니면 수용될 확률이 낮은게 현실이다. 그런데 '공정한 시험'은 어쩔수 없이 '획일적인 평가 방식'을 수반한다. 리고 평 방식을 바꾸지 않는 이상, 교육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하기 어렵다. 결국 시험-교육 방식은 그대고, 시험 인간은 계속 탄생한다.

학벌-일자리에 따른 사회경제적 격차가 크고, 계층 상승이 어려우며, 복지 체계가 개인의 불안을 해소해주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공정성'에 대한 요구는 앞으로도 지속될 거다.


앞선 논문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의 저자인 김영철 교수도 단순한 교육 방식의 개선 뿐만 아니라, 저학력 인력의 노동시장 내 성공 가능성 증진, 학벌에 따른 사회적 차별의 개선, 경직된 대학 서열구조 완화와 같은 '구조적 개혁'을 함께 추진하는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 변화는 필요해


고등학생 시절, 미국에 살았다. 그때 주 3회 정도 찾아오는 선생님이 있었다. 명목상 영어 교육이 주된 목표였지만, 그 선생님은 단순한 영어 공부를 넘어서서, 공부 자체의 재미를 알려주셨다. 그는 '나와 함께' 플라톤의 동굴 우화, 빈부격차와 노블리스 오블리제와 같은 철학적-사회학적 주제부터 빅뱅이론과 진화론 같은 과학적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생각을 풀어내는 도구인 '글쓰기'도 알려줬다. 그는 내게 세상에 다양한 지식이 있고, 이걸 배우는  고통스러운게 아니라 재밌다는 걸 깨닫게 했다.


그러다 다시 내 나라로 돌아왔고, 이곳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학교의 평가 방식에 질려버렸다. 수업 시간에 조는거, 질문하는거 하나하나 평가해서 점수 매기는게 쪼잔해 보였다. 닥치는 대로 암기해야 좋은 성적을 주는 중간, 기말고사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공부하느라 고통 받았던건 아니고, 그냥 그 시간 자체가 싫었다. 오만하게 들릴수도 있는데, 이거 잘하는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내신보다 수능이 편했고, 대학교 때는 학점 잘받는 것보다 차라리 고시공부가 편했다. 적어도 수능은 단순 암기를 할 필요가 없었고, 고 논리와 근거가 뒷받침될 경우 내 이야기를 들어줬다. 아래 그림은 정치학 과목인데, 보면 알겠지만 암기만 한다고 답 나오는게 아니다. 어설프더라도, 내 생각과 고민을 적절히 풀어내는게 중요하다. 과정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공부 자체는 대학 시험보다 훨씬 편하고 재밌었다.



그러니 나는 저자가 말하는 교육 방식, 시험 방식 변화를 너무나도 환영한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에 젊은이들이 줄어드는 상황이라, 사람 한명 한명이 귀하다. 그리고 미래의 젊은이들은 워싱턴, 팔로알토, 벨기에, 런던, 북경의 청년들과 경쟁해야 한다. 지금 우리 교육 체계는 '잘 인내하고, 잘 풀고, 잘 순응하는' 사람을 키워내고 있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근데 이런 역량을 굳이 20년간의 교육으로 키워내야 할까? 투입 대비 산출이 너무 비효율적인게 아닌가 싶다.


내 자식, 그리고 미래 세대는 같은 학교-같은 나라 구성원들과의 끊임없는 경쟁을 주문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기에는 이 나라가 너무 작고 좁다.


"지구를 내가 구한다"고 외치는 엘론 머스크가 유난히 별나보이기는 하지만, 실리콘밸리의 젊은 벤처기업가들은 '이윤, 승리' 보다 '사회, 진보' 이런걸 얘기한다. 속마음은 어쩔지 모르지만, 겉으로라도 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1등급이니 2등급이니, A학점이니 A+ 학점이니, 거기에 목숨 걸도록 만든다.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문제가 아니라, 운동장 자체가 문제다. 이제 운동장이 좀.. 변했으면 좋겠다. 물론 변화가 쉬운건 아니지만, 이건 너무 올드하다.. 너무 많이..


[참고자료]


대학 학벌이 대졸자의 첫 취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 - 이화여대 교육과학연구소('14)

행복은 성적 순이 아니잖아요? - 경제학연구('15)

대학 서열과 생애임금격차 - 한국노동연구원('19)

Pisa 2018 Result - OECD('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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