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심해의 취미생활 May 01. 2020

본인이 원해서 히잡을 쓴다는데요

인류학자의 히잡 분석 - <히잡은 패션이다>, 김형준

#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히잡


나는 히잡이 낯설다. 한국에서 히잡을 본 기억은 거의 없고, 유럽 갔을 때는 꽤 봤다. 그때마다 느꼈던 주된 감정은 바로 '낯설음'이었다. 어두컴컴한 히잡은 쎄했다. 더 거리감을 느꼈던 건, 본인들이 원해서 쓰는게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두발-복장 제한이 있었다. 머리가 좀 길어보이면 밀어 버리고, 바지 통이 좁아보이면 빠따 갈겼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무식한데, 그때는 그런게 너무 싫었다. 도대체 학교에서 자기 표현을 제한하는 근거가 뭔지 이해가 안됐고, 지금도 안 된다. 그런 악몽이 있어서일까, 특정 복장 착용을 의무화하는 종교가 멀게 느껴졌다.


그런데 얼마전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히잡 착용에 관한 책을 읽었다. 강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김형준 교수가 썼다. 이 책은 '주체적으로 히잡을 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보여줌으로써, 나의 선입견을 단박에 깨뜨렸다. 책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을 좀 정리해보고, 우리나라 무슬림의 숫자를 좀 찾아봤다.







# 히잡은 패션이다


* 박스안은 인용구


1990년대 초중반만 해도 인도네시아에서 히잡 쓴 여성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현지 조사를 했던 마을에서 히잡을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여성은 한 명도 없었고, 도시에서나 히잡 쓴 여성을 이따금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에 접어들자 거리에서 히잡 쓴 여성을 찾아보기가 수월해졌고, 대학에서는 히잡 쓴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더 많다는 느낌이 들었다.


2018년 기준, 인도네시아 인구는 2.7억명 정도다. CIA는 전체 인구의 87%가 무슬림이라고 추산한다. 이를 적용하면 인도네시아 무슬림은 2억명이 넘는다. 자타공인 이슬람 국가다.


이슬람 국가인데, 히잡을 쓰지 않는 여성이 더 많다는 게 신기했다. 나는 무슬림은 무조건 히잡을 써야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착각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히잡 착용이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오히려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학교에 이슬람식 복장을 입고오는 걸 법으로 규제했다고 한다.  이게 90년대 들어와서야 변했다. 특정 복장의 착용을 강제하는 폭력적 종교인 이슬람 그리고 이슬람 국가라는 이미지는, 스스로 만들어낸 편견과 착각이었다.


이처럼 히잡 착용이 개인의 선택에 맡겨진 상황에서, 히잡을 두르는 사람은 누굴까?


히잡 유행이 대학교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 사이에서 착용 비율이 상당히 높다. .. 히잡 미착용 여성은 사회경제적으로 중하층, 지역적으로 이슬람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은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는 뜻이다.

패션으로서의 히잡에 열광한 또 다른 집단은 '비싼 차를 모는 상류층 여성, 경영인, 유명 연예인, 고위 관료, 전문직 종사자, 사회정치 분야 활동가'였다.


근대화는 탈종교화를 수반한다. 이제 바티칸의 교황은 더 이상 왕을 임명하지 못한다. 근대화로 인해 종교는 과거의 헤게모니를 상실했다. 그리고 근대화의 주요 동력 중 하나는 바로 '교육'이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에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이 히잡을 더 많이 착용한다고 한다. 게다가 이게 하나의 패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의아했다.  얼굴을 가리는 아이템이 어떻게 패션과 연계될까?


저자가 언급한 히잡 디자이너, 디언 펄렁이(Dian Pelangi)의 인스타그램을 직접 찾아봤다.  20년 5월 현재, 팔로워 5백만명에 달한다. 이 '무슬림 인플루엔서'의 계정에서 히잡과 패션의 융합을 확인할 수 있었다.


https://www.instagram.com/dianpelangi/?hl=ko

인도네시아의 히잡 착용 트렌드를 보여주는 디언 펄렁이. 그녀의 히잡은 '얼굴을 가리는 어두침침한 두건'이 아니다. 오히려 기분, 날씨에 따라 다양하게 코디할 수 있는 패션 아이템이다. 특히 눈길을 끌었던건, 그녀의 히잡이 '서구적인 화장'과 어우러졌다는 것이다.


히잡은 외간 남자의 시선으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한 개인의 내적-외적 개성을 표현해내는 수단이다.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히잡'의 이미지는, 나의 선입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슬림 여성들은 그들의 개성을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게 분명했다. 단지 내 시각이 좁아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히잡은 패션 아이템의 성격을 가지지만, 그 본질은 종교적이다. 히잡 착용이 강제되지 않는 나라에서 한 개인이 히잡을 쓰겠다고 결심할 때는, 종교적 신념이 큰 영향을 미친다.  


히잡 착용의 주요 목적은 종교적 의무 충족이다. 내가 인터뷰했던 대학생들은 이러한 의무가 신체를 적절하게 가림으로써 충족된다고 생각했다.

아니사(대학교 졸업)와의 인터뷰

1년여 동안 그녀는 차다르를 착용했고 결혼 후 차다르를 벗었다. 차다르 쓰고 벗기에는 이슬람이 개입됐다. .. 또 다른 요인은 불특정 다수 남성의 시선이었다. 남성의 치근거림, 성욕으로 가득찬 시선, 성적 상상은 차다르를 쓰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히잡에 대해 '교과서적' 시각을 드러냈고, 강력한 남성 중심적 시각을 내재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이 가족으로 국한된다고 지적한 후 자신의 몸은 궁극적으로 자신과 남편을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저자는 히잡 착용이 기본적으로 종교적 의미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인터뷰이들은 '알라와의 관계'가 히잡을 쓰겠다는 결심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차다르'를 쓴 경험이 있는 '아니사'와의 인터뷰도 흥미롭다. 차다르는 부르카와(아래 사진) 비슷하게 온 몸을 가린다. 그녀는 히잡 착용의 이유로 종교적 의미와 '남성들의 성적 치근거림'을 언급한다. 그녀는 성적 치근거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다르를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은 남편을 위한 것이라도 말한다.


부르카를 쓴 여성


인터뷰 내내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차다르를 썼다고 말한다. 일견 주체적인 결정이라고 보이지만, 또 완전히 주체적인 결정이라고 단언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물론 그녀 스스로 차다르를 쓰겠다고 결심한건 맞다. 그렇지만 이는 다른 남성들의 성적 치근거림을 회피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만약 남성들의 불쾌한 접근이 없었다면?


또한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을 남편과 나눠 가진다는 발상도 '주체성'과는 좀 멀어보인다. 이건 아마 이슬람의 교리일테고, 그녀는 스스로 이걸 수용했을 거다. 본인 신체에 대한 통제권 포기를  스스로 결정했다고 해서, 그게 주체적인 행위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슬람에는 남성 편향적 요소가 꽤 많다. 그리고 이런 남성 편향적 요소는 보수-근본주의적 세력이 열을 가할 때 쉽게 발화한다.


이슬람화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시도가 보수적 무슬림에게서 나왔고, 그것이 급진적 무슬림에 의해 강력히 추동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복장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고 현대적이고 서구화된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히자버는 보수 세력의 비판에 취약할 수 밖에 없다.   


근본주의적 무슬림은 '패션으로서의 히잡' 트렌드를 강력히 비판한다. 그리고 원리원칙에 따른 히잡 착용을 강조한다. 그들은 <꾸란> 구절, "예언자여, 그대의 아내들과 딸들과 믿는 여성에게 베일을 쓰라고 이르라. 그때는 외출할 때라 그렇게 함이 가장 편리한 것으로, 그렇게 알려져 간음되지 않도록 함이라"를 앞세운다.


자유주의 이슬람, 이슬람 페미니스트는 이 구절을 '간음되지 않는 수단'으로서의 히잡에 집중한다. 히잡은 여성혐오적 문화에 살고 있던 여성들의 방어 수단이었다. 꾸란은 자기 보호를 위해 히잡을 쓰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시대는 바뀌었고, 히잡 착용의 '자기 보호적 의미'는 감소했다. (애초에 있었는지 의문이긴 하다)


이에 반해 근본주의적 무슬림은 '히잡을 쓰라'는 구절 그 자체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를 아직까지도 집요하게 강요한다. 이들은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기도 한다.


이슬람 창시자의 부인이 환생해서 아프가니스탄에 가면 어떤 취급을 받을지 궁금하다. 아프가니스탄은 온몸을 두르는 부르카 착용을 강제하는 곳이다. 마호메트의 부인은 '신이 자신에게 아름다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숨기는 일이 적절치 않다'고 말하며 히잡을 벗어던졌다고 한다. 21세기의 근본주의 무슬림은 그녀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한국인 중 이슬람 신자인 사람은 극소수이며, 국내 무슬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외국인 이주자 역시 자기 목소리를 뚜렷하게 드러낼 수 없는 처지다. 상황이 이렇다면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 쪽은 한국인이 아닐까. 그래야 주변 세계를 좀 더 관용적으로, 배타적이지 않게, 균형 있고, 편견 없이 존중하면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히잡 연구를 시작했고, 이 책을 쓰게 됐다. 미진하나마 이 책을 통해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복장을 착용한다는 이유만으로 무슬림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그들과의 교류를 스스로 제약하지 않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오해한 게 많았다는 걸 깨달았다. 미지의 분야를 알아가는 것도 정말 재밌었다. 이슬람, 히잡이 조금이나마 궁금했던 사람이 읽으면 필히 재밌게 읽을 것 같다. 히잡 착용 여성과의 인터뷰, 히잡 착용이 가지는 개인적-사회적 의미, 인도네시아 이슬람의 역사적 변화가 풍부하게 서술되어 있다. 작가의 인류애와 사명감도 느낄 수 있었다.


무슬림을 다룬 책을 읽다보니, 우리나라의 무슬림 인구가 궁금해졌다. 정말 간단한 통계와 자료 몇 개를 좀 추려봤다.






# 낯선 이웃, 무슬림


2015년 중앙일보 자료다. (링크) 2014년 기준, 한국 이슬람 인구를 2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에 따르면 내국인이 4만명, 외국인이(불체자 포함) 16만명 정도 된다. 이건 5년 전 자료다. 최신 통계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좀 찾아봤다.

 

나는 명지대학교 아랍지역학과 안정국 교수의 논문 <한국 이슬람의 현황과 종파 분화>의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국내 체류 중인 외국인을 나라별로 나누고, 여기에 CIA가 조사한 나라별 무슬림 인구 비율을 곱했다. 가령  A국의 이슬람 비율이 80%고 우리나라에 100명이 있다고 치면, 우리나라에 거주하고 있는 A국 출신 무슬림 인구는 80명이다. 연령, 성차, 사회경제적 요소를 무시한 거친 방법이긴 한데, 대강을 추정할 수는 있다.


한국 이슬람의 현황과 종파 분화 -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5/안정국)


우선 안정국 교수가 2015년에 발표했던 논문 자료다. 이에 따르면 불체자를 제외하면 13만 5천명 정도의 외국인 무슬림이 있다고 추정된다. 우즈베키스탄,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타이순으로 많다. 이 5개 나라 출신 무슬림이 10.4만명 되고, 외국인 무슬림 77%를 차지한다. 무슬림 수가 1000명 이상인 국가는 총 16개 국가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추정치다)


나는 이 16개 국가 출신 무슬림 수가 궁금했다. 그래서 안정국 교수가 사용했던 방법론을 토대로, 계산해봤다. 그 결과는 아래와 같다.


18년 말 기준, 16개 국가 출신 무슬림 수는 18.8만명이다. 2015년에 비해 약 5만명 증가한 걸로 추정된다. 특히 카자흐스탄 출신 무슬림의 수가 급증한걸로 추정된다. 15년 3천명에서 18년 2만명으로 7배 가량 증가한 걸로 주청된다.


자체 추정


이건 상위 16개 국가만을 대상으로 했다. 다른 나라 출신 무슬림, 무슬림 불법 체류자, 그리고 귀화 무슬림의 수를 고려하면, 전체 무슬림의 숫자는 5년 전보다 증가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건 단기적인 변화가 아니라, 장기적인 추세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에는 고임금-고숙련의 '첨단 산업'도 있지만, 저임금-저숙련의 '3D 산업'이 공존한다.


우리 국민은 저임금-저숙련 산업에 종사하는걸 꺼려하기에, 부족한 노동력은 외국인 노동자가 메꾸고 있다. 지난 20년간 체류 외국인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아래 그래프가 잘 표현하고 있다. 30년전, 국내 체류 외국인은 50만 명도 안 됐다. 2018년에는 3백만 명에 가까워졌다. 단기간 내에 이 추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은 금방 바뀌는게 아니다.


출입국자 및 체류외국인 통계 - 법무부('20)


개인의 선호와 무관하게, 우리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교과서적인 소리지만, 오해와 편견은 갈등과 폭력을 낳는다.


나는 우리나라가 유럽 극우주의의 경로를 닮지 않길 희망한다. 동양인이라고 '코로나'라고 부르고, 폭행하고 하는게 얼마나 구역질나고 무식하고 역겹던지.. 그런 사회는 멋있지 않다.


타인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한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이 인정받는 그런 사회가 멋있다.


[참고자료]

https://www.cia.gov/donutslications/the-world-factbook/geos/id.html     

https://www.instagram.com/dianpelangi/?hl=ko

https://news.joins.com/article/17246551

한국 이슬람의 현황과 종파 분화 -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15/안정국)

출입국자 및 체류외국인 통계 - 법무부('20)

매거진의 이전글 아 그니까, '왜' 살아야 되는건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