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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해의 취미생활 Nov 02. 2020

주식, 부동산, 그거 불로소득 맞잖아?

경제학자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 - <가치의 모든 것>, 마리아나 마추카토

이 글에서 제가 말하는 투자는 (1) 수일에서 1-2년 내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상장된 기업의 주식'을 매매하거나, (2) 마찬가지로 지가 상승이 예상되는 토지, 부동산을 수년 내의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고 매매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1) 유상증자 참여 등으로 기업에 직접 자금을 공급하고 수년간 동행하거나, (2) 토지 매입 후 개발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행위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진작 글을 더 구체적으로 썻어야 됐는데, 힘이 좀 안들어갔나 봅니다.

독자 한분이 댓글로 진지한 논점을 제기해주셨고, 이에 용어를 조금 더 분명히할 필요가 있는 듯 하여 이렇게 수정합니다. 카인말러님, 감사합니다.




1. 주식, 부동산 Boom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은 지난 20년간 돈을 풀어왔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며 더 풀었다. 돈의 가치를 나타내는 장기금리는, '현금이 똥값이 되고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그간 돈을 많이 찍어냈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기업의 투자 발이다. 그런데 기업 투자는 기에 못 미쳤다. 대신 주식, 부동산 같은 '자산시장'으로 자금이 쏠렸다. 실물경제가 부진해도, 주식과 부동산 시장은 았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실업자 증가가 가속화되고, 자영업 폐업율이 높아짐에도 주가는 상승했다. 부동산도 상승했다. 우리나라만 그런건 아니고, 미국도 그렇다.


이제 주식, 부동산의 시세 차익을 노리고 투자하는게 사회적으로 가치있고 권장할 일이 됐다. 차익에 대한 과세는 '개인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노동의 가치'는 똥값이 됐고, '투자의 가치'는 칭송받는다.


나는 자산시장에서 시세차익을 누리는게 불법이거나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익을 거두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주식, 부동산의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세차익을 노린 투자에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투입되지만, 그럼에도 불로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영국 사회 과학원, 이탈리아 국립 과학원 회원이자 영국 UCL 대학 교수인 마리아나 마추카토의 저작 <가치의 모든 것>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뒤틀려 버린 '가치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했다. 인상깊은 구절을 좀 정리해본다.




2. <가치의 모든 것>


* 박스 안은 인용구


전에는 금융 분야가 이미 생산된 가치를 단순히 이전만 하거나 '지대'를 가져가는 영역으로 여겨졌는데, 갑자기 가치를 창조하는 영역으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지각 변동은 상업 은행의 활동에는 '금융 중개', 투자 은행의 활동에는 '리스크 감수'라는 새 이름표를 붙임으로써 가능해졌다. 그리고 이 변화는 금융 분야의 규제 완화와 나란히 이뤄졌다.


과거에 금융은 산업 발전을 위한 '지원자' 역할에 머물러 있었다. 성장의 원동력은 혁신 제품과 서비스의 창조자인 '기업가', 혹은 보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공학자'라고 간주됐다.


상식적이고 타당한 생각이다. 스타트업이 많아지면, 기업 생태계에 활력이 생긴다. 공학자가 많아지면, IT 기술이 발전한다. 과학자가 많아지면, 과학 기술이 발전한다. 이는 장기적인 경제 혁신과 사회 발전의 토대다.


그런데 '투자자'가 많아지면 어떨까? 투자는 그 자체로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한다. 모든 시민이 주식과 부동산 투자를 전업으로 한다면, 그 사회의 장기적 전망은 어둡다. 금융은 가치 창조 과정을 매끄럽게 해주는 윤활유에 불과하다. 은행과 증권사만 존재하는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런데 저자는, 어느 순간부터 '금융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고 말한다. 금융의 가치가 가장 앞단에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1970년 즈음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민계정의 GDP 추계에 금융 부문이 '생산' 활동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금융 부문의 많은 측면도 '금융화'되어 버린 것이다. 금융적인 사고와 행동 방식은 산업 부문에까지 깊이 스며들었다. 기업 경영자들이 수익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업에 재투자하기보다 단기적인 주가 부양을 위해 자사주를 매입하는 데 더 많이 쓰기로 결정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저자에 따르면 1970년 이후, 금융 진전에 따라 금융이 '가치창조적인 활동'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사회의 많은 분야가 '금융 논리'에 젖어들게 됐다.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신자유주의'라고 부는 현상이다.


이를 대표하는 단어가 '주주자본주의'다. 주주자본주의는 '가치의 척도'를 변화시켰다. 이 이념은 기업의 소유주는 주식을 보유한 주주이고, 기업의 제1의 목표은 '주주 이익 극대화'라고 말한다.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주식 가격 상승'을 최우선적인 가치로 상정한다.


나는 이 관점에 동의할 수 없다. 내 생각과 상식의 세계에서, 기업의 최우선적 목표는 '합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최대한 많은 수익을 장기간 창출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가 공급되고, 일자리가 꾸준히 창출된다.


'주가 상승'을 최우선시한다면, 이게 어려울 수 있다. 주주들은 길게 봐야 1-2년 안에 수익을 거둬야 한다. 그들은 당장 성과가 나지 않는 장기적 투자는 선호하지 않는다. 대신 배당 증가와 자사주 매입을 희망한다. 노동 비용도 최대한 절감하길 원한다. 기업은 결국 기술과 사람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게 된다. 아래 그림을 보면, 1970년대부터 기업 투자가 감소는걸 볼 수 있다.


가치의 모든 것(민음사, 마리아나 마추카토) 중 발췌


이는 당장의 주가 상승을 위해 미래의 성장성을 훼손시키는 행위다. 지금 당장 성적 잘 받겠다고 공부 안하고 컨닝하는 것과 똑같다. 성적은 잘 나오겠지만, 실력 향상은 없다. 언제까지 컨닝하면서 사기칠 수는 없다. 쌓인 실력이 없으면, 결국 도태된다.


저자는 그간 선진국에서 주주자본주의가 '최우선적 가치'로 상정됨에 따라, 기업과 경제의 장기적 성장은 훼손됐다고 언급한다.


케인스는 도박의 결과는 운으로 결정되므로, 금융 투기가 기술이나 실력과 관련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투기를 하는 사람의 기술이나 실력, 혹은 생산성에 대한 언급은 속임수의 신호와 다름없었다.


현대 경제학의 거장인 케인스는 그 자신이 '성공한 투자자'였다. 그는 분명히 말한다. 투자의 결과는 운으로 결정되므로, 금융 투자에 기술이니 실력이니 하면서 거창하게 네이밍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글쎄, 나는 여기에 동의하기 어렵다.



뭣도 없는 바이오 주식을 단타치다가 물리는 것과 철저한 분석을 통해 성장 산업의 유망 기업 주식을 매수하는 사람의 실력과 통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지난 수십년간, 워렌 버핏이 일궈냈던 훌륭한 투자 결과를 '운'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다만 주식 투자에 '생산성'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다는 그의 말에 백분 동감한다. 주식시장에서 돈을 버는 건 간단하다. 미래 상승이 예상되는 주식을 먼저 사놓고, 가격이 오르면 팔면 된다. 그뿐이다. 이 과정에서 생산되는 사회적 가치가 뭐가 있을까? 나는 상상하기 어렵다.


나는 주식 시장에서 훌륭한 수익을 거두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탐구, 강인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내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떤 일에 엄청난 노력, 시간, 지식이 필요하다는 조건 자체가, 그 일의 '사회적 가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내가 체스를 잘 두기 위해 몸이 쓰러질 정도로 플레이하고 복기한다고 해서, 이게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지는 않는 것 처럼.  


1925년에도 당시 재무 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은 금융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우려를 표명했다. 이때 한 연설에서 처칠은 "금융은 조금 덜 자랑스러워하고 산업은 조금 더 만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나는 주식, 부동산 투자로 차익을 누리는 게 욕먹을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끼치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가 선취매 하기 전에, 내가 사놓고 나중에 파는게 뭐가 잘못됐는가? 그 과정에서 불법 행위가 없었고, 세금도 잘 냈다면 욕할 일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이게 '찬양할만한 행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의 담론이 불편하다. 주식,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서 돈 따먹는게 가치있는 일로 여겨지는 게 싫다.


기업을 세워서, 혹은 노동을 제공해서 벌어들인 100억원의 가치와, 미래에 상승할 주식/부동산을 선취매해서 얻은 100억원의 가치가 사회적으로 동등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


나는 후자를 '불로소득'이라고 생각한다. 자산시장에서 100억원을 벌기 위해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 인내심을 '노동'이라고 볼 수 없다. 누군가가 힘들였고 노력했다고 해서, 그게 노동이 되는건 아니다. 사회적인 가치 창출이 없다면, 노동이라고 볼 수 없다.


사회가 10의 보상이 적합한 곳에 100의 보상을 하게되면, 회의 인센티브 구조가 뒤틀린다. 피나는 기술개발, 근면성실한 노동의 가치보다 '선취매를 통한 수익'의 가치가 우세한 사회에 미래는 없다.




3. <새로운 가치를 위해>


나는 금융과 가치에 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그렇지만 이 책은 가치 전반에 대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좀 더 깊게 다룬다.


저자는 먼저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마르크스의 가치설과 한계효용 학파의 가치설을 비교한다. 한계효용 학파의 관점이 압도적 우세를 점하게 됨에 따라, 가치 창출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과소 평과되고, 금융의 역할은 과대 평가되었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앞으로 정부가 많은 역할을 도맡아야 하고, 정부가 그렇게 할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가 언급한 테슬라의 사례가 흥미롭다.


2009년에 태양광 패널 스타트업 솔린드라는 미국 에너지부에서 5억 3500만 달러의 정부 보증 대출을 받았고 같은 해에 전기차 제조업체 테슬라도 정부 보증 대출 4억 6500만 달러를 받았다.

테슬라는 크게 성공해 2013년에 부채를 상환했지만, 솔린드라는 2011년에 파산해 정부 재정을 보수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부가 승자를 잘못 선정한 대표적 실패 사례로 지금도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다.


꽤나 흥미로운 사례고, 좀 더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애플도 CIA, 미국국방부 DARPA의 기술을 많이 가져다 썼다. 구글의 검색 알고리즘도 미국 과학 재단이 지원했다. 정부가 창출하는 가치가 생각보다 크다.


저자는 '가치에 대한 재정의'를 강조한다. 주식, 부동산 같은 '자산 가격 상승'이 가치 상승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진정한 가치란 혁신적인 상품과 서비스의 등장, 장기적 안목의 투자와 적극적 일자리 창출이다.


정부는 여기에 힘을 쏟아야 한다. GDP 산정 방식부터 금융 규제, R&D 지원 등 전방위적 재고려가 필요하다.


사회과학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봄직 하다. 특히 주류 경제학의 가치 담론에 의문이 있다면, 읽어볼만 하다.


가격이 가치를 결정한다는 개념, 그리고 시장이 가격을 결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개념은 온갖 문제적인 결과들을 낳았다.

첫째, 이 서사는 금융 영역에서, 또 그밖의 영역들에서도, 가치 착취자를 더 대담하게 만들어준다. 현재의 지배적인 논리에서 보면 금융 거래, 약탈적인 대출, 부동산 가격에 거품을 일으키는 투자 등을 모두 가치를 부가하는 것으로 인정한다.

둘째, 현재의 지배적인 담론은 민간 기업이 아닌 가치 창조자들을 가치 절하하고 위축시킨다... 간호사든 공무원이든 교사든 할 것 없이 공공 영역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고 있다.

셋째, 시장에 대한 지배적인 서사는 정책 결정자들을 헛갈리게 만든다. 규제 당국은 기업의 로비로 기득권 기업이 한층 더 부유해지게 만드는 정책, 그들의 수익만 불려 줄 뿐 투자를 유도하는 데는 별로 효과가 없는 정책을 승인한다.

넷째, 수익과 지대를 헛갈리면 성장 자체를 측정하는 방식, 즉 GDP 계상 방식도 영향을 받는다. 가격이 붙는 것은 무엇이든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면 국민계정은 가치 창조와 가치 착취를 구별할 수 없어서 정책이 아무리 전자를 목적으로 해도 후자 쪽으로 쉽게 귀결될 수 있다.

가치에 대해 더 분명한 논의가 있어야만 모든 영역에서 가치 착취를 더 잘 포착할 수 있고, 그것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힘을 제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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