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심해의 취미생활 Dec 13. 2020

엄마, 아빠의 기억을 기록하자!

시간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남기는 기록

# 이제 제대로 독립, 기억하자!


곧 회사에 복직한다. 회사가 지방에 있어서, 이제 독립한다. 나는 학교 재학 중에 입사 시험에 붙었다. 병역 의무를 미뤄두고 시험본 거라, 회사에서 일하다 뒤늦게 병역의무를 이행했다. 현역으로 가고 싶었는데, 수술 기록 때문에 안 됐다.

병역 판정 담당자에게 현역 판정 내려달라 했더니, 자기 징계 먹는 꼴 보고싶냐고 했다. 결국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았다. 나는 장교로 가고 싶었는데, 정말 아쉬웠다. 뭐 어쩌겠나, 법이 그런 걸.

인생 계획과는 달리, 나는 본가에서 2년간 지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 중 하나였다. 가족끼리 정말 재밌었는데, 이제 헤어지게 됐다. 지방에서 살고 있고, 결혼도 하면 '구조적'으로 멀어진다.

시간은 무서운 놈이다. 얘는 행복한 기억, 슬픈 기억 가리지 않고 뺏어간다. 종래에는 생명까지 가져간다. 아무리 '행복한 기억'도, 시간에게 뺏기게 되어 있다. 다만, 나도 기억을 지켜낼 방법이 있다. 기억을 기록하면 된다.


엄마, 아빠와의 관계를 기억하고 추억해본다. 동생과의 기억도 따로 글을 쓸 거다.




# 엄마, 아빠에 대한 기억!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그들


엄마, 아빠는 나의 자율성을 존중해주신다. 내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한, 나의 선택을 대부분 인정해주셨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러셨다.

내 기억에는 없지만, 엄마, 아빠는 유치원생에 불과한 아이의 의사 결정을 존중해주셨다. 엄마가 미술 학원에 보내놨는데, 내가 몇 가지 이유를 들면서 학원 대신 책을 보겠다고 했단다. 돈이 아까울 수도 있지만, 그냥 OK하시고, 책을 사주셨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도, 대학 입학의 방식부터 입학 대학의 결정과 전공 선택까지, 그냥 내가 다 결정했다. 맘에 안드시는게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뭐라고 하지 않으셨다. 대학교 때도 그랬다. 학점 망가지면서, 맨날 놀러다녀도, 몇 번 뭐라고 하시고, 그 후로 크게 잔소리는 안하셨다.

회사 선택을 하고 집을 구할 때도, '너가 다 생각하고 했을 테니, 잘 될거다'는 말만 하셨다. 인생에서 나 스스로 내린 큰 결정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시거나 잔소리하시거나 했던 기억이 거의 없다. 내 인생의 중대사는, 내가 결정해왔다.

물론 내가 뭐 나쁜 짓을 하거나, 사회 상도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은 크게 없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검증되고 인정받는 길을 빠르게 걸어온 편이다. 그럼에도 부족한 점을 지적하려면 한도 끝도 없는 게 인간사다. 나의 부모님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시고 존중해주셨다.


항상 낙천적인 엄마와 아빠


엄마, 아빠는 굉장히 낙천적이시다. 엄마의 낙천성이 더 쎄다. 아빠는 낙천적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하시는데, 엄마는 그냥 낙천적이시다. 아마 깊은 기독교적 신앙 때문이리라.

그게 나에게는 큰 힘이 된다. 병역 의무 이행도 안한 25살의 나. 친구들은 군대 갔다와서 인턴도 하고 교환학생도 가고 있었다. 나는 그때 시험 준비생이었는데, 그해 입사 시험을 떨어진 줄 알았다. 그때 떨어졌다면, 3번 연속으로 떨어진 거다. (다행히 그 해에 한 방에 붙었다) 시험을 보고 와서, 굉장히 침울하고 우울한 상태로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그때 우리 엄마는 속 편하게, "뭐 어떠냐? 또 하면 되지? 별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심각해~"라고 말씀하셨다. 위로의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겠지만, 그냥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도, 부모님은, 특히 엄마는, 굉장히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상황을 해석하신다. 우리 엄마가 자주 하시는 말이, "다 잘 될꺼야, 다 뜻이 있는거고, 얼마나 감사하냐"라는 문구다. 힘든 일이 있어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빠도 낙천성의 중요성을 깊이 인지하는 분이다. 옛날에 나에게 "세상과 무관하게 혼자 행복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그놈이 제일 행복한 놈이다. 반대로 혼자 세상을 비관적이고 우울하게 바라보면, 뭐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나에게 낙천적 성격이 있다면, 그건 우리 가계에 흐르는 정서적 유산일 것이다.


항상 인정받는 엄마와 아빠


내 기억의 엄마, 아빠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분들이다. 신입사원 되고 1년 정도 지날 때 쯤, 아빠가 회사에서 퇴직하시게 됐다. 그때 아빠 퇴임식에 갔는데, 직원분들이 아빠를 진심으로 좋아하는게 느껴졌다. 누군가 와서, 훌륭한 리더였다고 말해줬다. 이런 소리 듣는게 쉽지 않다. 나도 덩달아 자랑스러워졌다.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셨다. 학원 근처에 가면, 항상 맛있는 걸 사주셨다. 피아노 학원에 사람도 많았다. 동네 형, 누나들은 엄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주말에는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때 엄마는 성가대 지휘자 역할을 맡으셨었다. 사람들이 엄마의 손짓에 따라 음을 내고 목소리를 냈다.

두 분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인정받는 사회 구성원이었다. 항상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고, 타인에게 베풀고, 남에게 얻어먹지만 말고, 이기적이고 재수없게 살지말고,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라고 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자식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엄마와 아빠


내 기억의 엄마, 아빠는 친구같은 분들이다. 엄청 친하게 지낸다. 결정적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때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동했다. 주위에서 아들, 딸 대학 진학 준비도 해야되는데 나가도 괜찮냐고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냥 갔다.

그때 정말 친해졌다. 가족끼리 미국 자동차 일주도 하고, 국경선을 넘어 캐나다도 갔다. 샌프란시스코 야경을 보면서 차에서 먹은 컵라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대한 사막.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기억이다.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서로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지고, 친밀감도 많이 쌓였었다.

회사 일을 시작한 이후로, 특히 아빠와 더 친해졌다. 밤 늦은 퇴근시간, 아빠한테 전화를 많이 했다. 대화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냥 친구한테 하는 하소연을 아빠한테 했다. '휴가 쓰고 싶어요, 아빠는 이 생활을 어떻게 하셨어요 몇십년 동안?' 아빠는 웃으시고, 날 놀리신다. '너 20-30년 일해야 되는데, 언제 졸업하냐..' 그때 뭔가, 아빠의 무게감도 느껴졌고, 회사원의 동질감도 느꼈었다.

집에 친한 친구와도 같은 존재가 2명이 있으니, 참 좋다. 그들은 나보다 세상을 더 많이 알고, 더 이해심이 넓다. 나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신다. 코로나만 아니였다면, 동생까지 포함해서 온 가족이 이번에 북유럽 여행을 가려고 했다. 그걸 못한게 진짜 너무 아쉽다.




# 갈 때 되니까 아쉽다


멀어지니까 아쉽다. 엄마 아빠랑 동네 공원을 더 다닐껄, 좋은 음식 더 먹을껄, 여행도 더 갈껄. 아빠와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 정말 좋았다. 아빠도 아들하고 단 둘이 간 여행이 꽤나 만족스러우셨다고 한다.


엄마랑 못가서 그게 너무 아쉽다. 동생도 함께였다면 최고였을 거다. 미래에 너무 늦지 않은 언젠가, 가족과 함께 좋은 곳으로 여행을 가야겠다. 가까운 국내 여행부터.. 그리고 일상에서의 추억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해야겠다. 미래에 배우자가 될 사람의 부모님과도 좋은 기억을 만들어야겠다.

앞으로 더 친절하고, 덜 까탈스럽고, 더 이해심이 넓은 아들이 되어야겠다. 엄마, 아빠와 정말 친하게 깊게 지낼거다. 이제 완전히 떨어지니, 아쉬운 게 많다.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아쉬운 게 많이 생각나서 다행이다. 그런 아쉬움은, 이제 채워나가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