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페이지의 시작

초등학교 3, 4학년, 나도 모르게 시작된 첫 기록 루틴

by 심신


아홉 살에서 열 살로 넘어가며, 나도 이제 막 10대에 들어섰다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들떴다. 그렇게 새 학기가 시작됐고, 담임 선생님은 아침 자습 시간에 해야 할 과제를 내주셨다. 300자 칸 종이를 주며, 일기를 다 쓰면 1교시 시작 전까지 운동장에서 놀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2학년 때까지는 그림일기를 쓰다 3학년이 되자, 300자 칸 종이에 오로지 글씨로만 일기를 써야 했다. 덜컥 겁이 나면서 갑자기 언니가 된 기분이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의 일상도 단조롭지만 10살의 삶은 얼마나 단조로운가.


300자를 채우기 위해 나는 일과를 모조리 적었다. 하루의 시작은 KBS에서 방영하던 <TV 유치원 하나 둘 셋> 오프닝 곡이었다. 그 음악을 듣고 일어나면 다행이었고, <아침마당> 오프닝 곡을 듣고 일어나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이제 열 살이니까 네 할 일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나둘셋유치원.jpg TV 유치원 하나 둘 셋 오프닝 장면 中

학교를 다녀온 뒤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던 선교원에 가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시간이 되면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집에 돌아와 만화를 보며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잠들었다. 그 반복되는 하루를 나는 빠짐없이 적어 300자를 채웠다.

처음 며칠은 1교시 직전에야 간신히 칸을 채웠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다시 써야 했기에, 무엇을 다르게 적을지 머릿속이 바빴다. 그런데 학기가 끝날 즈음에는 요령이 생겼다. 300자를 쓰는 일이 더는 버겁지 않았고, 아침에 잠깐 친구들과 놀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학기가 끝나면 선생님은 한 학기 동안 쓴 일기들을 모아 ‘꿈과 희망’이라는 제목의 책을 만들어 주셨다. 표지에는 ‘3~6월 꿈과 희망’이라는 제목과 반 단체 사진, 그리고 학교와 학번, 이름이 들어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최초의 독립 출판이었다. 일기를 쓸 때는 몰랐는데 모아보니 꽤 두툼했다. 내 이야기로만 채워진 한 권의 책이라는 사실이 뿌듯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심심할 때마다 그 책을 꺼내 읽었다. 내가 쓴 글에 내가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누가 방귀를 뀌었다거나, 누군가 넘어졌던 이야기 같은 것들이 특히 그랬다. 웃긴 부분은 여러 번 읽어도 계속 웃겼다. 그때 집에는 컴퓨터도 없었고 당연히 스마트폰도 없었다. TV 역시 어린이가 볼만한 프로그램은 오후가 되어서야 있었다. 만약 지금처럼 볼거리가 넘쳤다면, 나는 지난 일기를 다시 꺼내보지 않았을 거다.


4학년이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3학년 때와 같이 같은 분이었다. 역시 아침 자습 시간에 일기를 썼는데, 일기 종이의 칸은 더 작아지고 분량은 300자에서 500자로 늘어났다. 학년은 하나만 올랐는데, 글자는 왜 200자나 늘었는지 억울했다. 일과만으로는 더 이상 칸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처음으로 ‘내 생각’을 쓰기 시작했다. 3학년 때는 ‘오늘 점심에 카레가 나왔다’라고만 썼다면, 4학년이 되고 나서는 왜 좋은지를 적었다.

‘오늘 점심에 내가 좋아하는 카레가 나왔다. 카레는 김치랑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 또, 카레가 나오는 날에는 요구르트도 간식으로 나온다. 요구르트는 껍질을 까서 먹기보다 뒤집어서 앞니로 구멍을 조금 내서 마시는 게 더 맛있다.’

내 이야기만으로는 더 쓸 말이 없었기에 나는 할머니와 동네 할머니들이 나누는 대화를 적기 시작했다. 집에는 늘 동네 할머니들이 집에 놀러 왔고, 나는 종종 할머니를 따라 마을 회관에도 갔다. 초록 담요 위에서 화투를 치거나 TV로 레슬링을 보던 풍경을 기록했다.

KakaoTalk_20251219_114021092.jpg 할머니들의 최애 프로그램 중인 하나인 'WWF'. 할머니들은 누군가를 패는 장면을 보면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하셨다

학교에 도착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칸에 맞춰 쓰던 그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면 내게는 최초의 모닝 페이지였다. 전날 있었던 일을 돌아보며 떠오르는 장면과 생각을 가감 없이 적었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하루의 모든 일과보다 유독 마음에 남은 장면과 그때의 감정, 생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렇게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고, 학기가 끝날 때마다 지난 일기를 다시 읽으며 잊고 있던 기억을 발견하거나, 내가 쓴 글에 다시 웃기도 했다. 그 시간이 이후에도 생각을 글로 옮기는 일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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