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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May 16. 2024

한 밤의 재즈 무대 위에서

텅 빈 열정의 재즈 선율



매일 밤, 우울만이 감도는 싸구려 술집. 최고의 재즈 무대만으로 생계를 이어왔던 베이커 형제. 무대에서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이 둘의 성격은 정반대였다. 냉담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가정과 생계를 위해 아랑곳하지 않는 형 프랭 (보 브리지스)와 달리 자존심 강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동생 잭(제프 브리지스) 은 언제나 감정 없는 시시한 무대에서 사람들을 위해 애쓰는 프랭크를 영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머리숱 없는 형을 위해 페인트를 뿌리는 중. 출처: 영화' 사랑의 행로 '


그렇지만 지난 31 동안 빈틈없었던 무대를 선보였던 이 형제에게 큰 고민거리가 하나 생겼는데 갈수록 그들을 찾는 사람들 줄어들었고 프랭크는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바로 자신들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할 수 있는 가수를 뽑자는 것. 프랭크와 잭은 며칠 뒤 오디션을 열었지만 딱히 그들 마음에 드는 참가자를 찾을 수 없었다. 다 포기하고 정리하려는 순간 거친 욕설과 함께 등장한 수지 (미셀 파이퍼)는 이 형제에게 당당하게 오디션 기회를 달라고 한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수지의 수준 높은 노래를 들은 프랭크와 잭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를 새로운 멤버로 들였다.


수지와의 첫 번째 공연 날, 약간 정신은 없었지만, 이 셋의 공연은 관객들로 하여금 최고의 공연이었다. 나날이 갈수록 이 셋의 조화는 무르익었고 그들을 찾는 사람들은 이전보다 셀 수 없이 많아졌다. 하지만 잭은 여전히 이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연주를 삼류 취급하는 사람들을 위해 잭 자신만의 진짜 재즈를 할 수 없다는 현실이 그를 항상 불만에 싸이게 했다. 


연말 새해 공연을 위해 베이커 형제와 수지는 고급 호텔로 향한다. 어김없이 환상의 공연을 마친 후 한껏 기분에 취한 셋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술기운에 기분이 상기된 프랭크는 자신의 과거 댄스파티를 회상하며 수지와 스텝을 밟기 시작하고 갑자기 피곤하다며 잭에게 손을 넘긴다. 달달한 바람과 함께 춤을 추는 수지와 잭. 둘 사이에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걸 예상하듯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 프랭크는 우연히 잭과 수지와의 미묘한 관계를 목격하고 잭에게 팀의 생계를 위해 더 이상 멈추라고 경고한다. 


영화의 명장면.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와 붉은 드레스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출처: 영화 '사랑의 행로 ' 

새해 전야, 프랭크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사고 때문에 잠시 떠나게 되고 수지와 잭만이 남게 되었다. 예상했듯 이 둘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날 밤무대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며칠 뒤, 오랜만에 모인 셋. 프랭크는 열심히 다음 공연 스케줄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둘은 전혀 관심조차 없는 반응이었다. 잭과 마찬가지로 매번 같은 연주와 노래에 질린 수지는 프랭크에게 몇 개의 노래를 빼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손님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며 말하는 프랭크는 그녀의 제안을 당차게 거절하고 둘의 말싸움을 끝으로 이 셋은 점차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수지는 잭을 찾으러 한 재즈바로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여느 때와 다른 잭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저 관객들을 위한 시시한 연주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연주하는 잭의 표정을 보고 수지는 그를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둘은 다시 한번 같은 밤을 보내게 된다. 이전 광고음악 러브콜을 받은 수지는 잭에게 팀을 그만둘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잭의 반응은 냉담했고 날카로웠다. 언제나 갈아낄 수 있다는 부속품처럼 자신을 취급하는 걸 느낀 수지는 곧장 그의 곁을 떠난다. 


그날 밤 마지막 무대를 마친 수지는 홀로 걸어가는 잭에게 다가가 쏘아붙인다. 자기 자신을 속인 채 텅 빈 삶을 살아가는 당신은 겁쟁이라고. 이에 잭은 언성을 높이며 수지에게 상처 섞인 말은 남긴다. 그렇지만 예전부터 방황해 오던 잭은 그녀의 말에 서서히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날 새벽 프랭크와 잭은 이름 없는 방송국의 모금방송에 참한다. 어수선한 세트장과 너저분한 사람들은 다시 한번 잭의 기분을 언짢게 해고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자신들을 삼류 광대 취급 하는 방송국을 박차고 나온 잭은 프랭크와 크게 다투게 된다. 

형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출처: 영화 '사랑의 행로'


있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싶지만 현실을 바꿀 용기가 없는 잭과 자존심을 버리고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프랭크. 이 둘의 무거운 고민은 형제 사이의 거리를 더 멀어지게 했다. 자신과는 달리 있는 시시한 현실을 뚫고 나온 수지의 말과 행동은 잭을 며칠간 깊은 방황의 길로 이끌었다. 무엇인가 결심한 잭은 며칠 뒤 프랭크에게로 향한다. 프랭크는 잭이 다시 일을 하겠다며 돌아온 줄 알았지만 예상 밖이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자신 있게 이 일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는 잭. 그의 완고한 태도에 프랭크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없다는 잭의 이 말 한마디에 프랭크 그제야 자신도 아이들이나 가르치는 것이 적성에 맞았다고 인정하게 된다. 결국 두 형제 모두 자신들의 속이는 짓을 그만두기로 한다.


다시 한번 만나게 된 수지와 잭. 잭은 수지에게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새로운 희망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89년도에 개봉한 'The Fabulous Baker Boys'는 92년도 한국에서 '사랑의 행로'라는 다소 뭔가 아쉬운 제목으로 개봉했었습니다. 음악영화라는 명성에 걸맞게 영화 전반에 흐르는 재즈들과 미셀 파이퍼가 직접 부른 쳇 베이커의 'My Funny Valantine'은 이 영화의 큰 매력입니다. 특히,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입고 피아노 위에서 노래하는 미셀 파이퍼의 씬은 영화의 명장면이죠. 그리고 호텔 발코니에서 프랭크가 자신의 유년 시절 댄스파티를 언급하는 장면에 흐르는 Benny Goodman의 'Moonglow'는 연말 분위기가 느껴지는 12월의 차가운 바람과 어울리는 곡이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프랭크와 잭을 연기한 보 브리지스와 제프 브리지스는 실제 형제로 전혀 연기 같지 않은 형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얼핏 보면 여자 하나 때문에 틀어진 형제 뮤지션 이야기 같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현실적인 삶과 고민을 담아낸 영화였습니다. 한국에서는 너무 잔잔한 탓이었는지 머지않아 비디오판으로 넘어가게 되죠. 특히 영화 속 잭의 고뇌와 방황은 우리에게 많은 공감을 가져다주었죠.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만큼이나 용기 있는 일이 있을까요?


- '자신을 속이지 마!' - 프랭크의 대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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