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묵묵히 살아낸 엄마의 고백, 딸에게 전하고픈 말

by 심우연

얼마 전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다가,

마음이 꽉 막히는 장면을 마주했다.

딸을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 엄마가,

시어머니께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소 죽은 귀신처럼 잘 참는 애순이가,

삶이 고달프다고 할머니 찾아오거든 딱 한 번만 살려줘요.”


그 말이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도대체 얼마나 참아야 그런 말로 불릴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건 바로 내 이야기였다.


나는 말없이 참는 걸 사랑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모든 참음은,

딸과 나 사이에 침묵의 벽을 세운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내 도시락에는 늘 김치 한 가지뿐이었다.

김치국물이 흘러내린 날이면 괜히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나는 김치를 좋아하니까 괜찮아.”하고 스스로를 달랬다.


동생들이 도시락을 싸가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걱정했다.

‘나는 잘 참았지만, 동생들까지 나처럼 주눅 들어선 안 되는데...’


그래서 가끔은 내가 직접 도시락을 싸 주었다.

계란프라이, 소시지 같은 반찬을 정성껏 담아주면

동생들이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뿌듯했고, 나도 잠시 힘이 났다.


그러나 집안과 가게 일을 동시에 감당하던 엄마는 늘 지쳐 있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가게 일을 도와야 했고,

무거운 짐은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짓눌렀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어느새 할 일을 알아서 하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힘들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외로움은 늘 내 곁에 있었고,

나는 그걸 '책임감'이라는 말로 눌러버렸다.


그래서 내 딸에게만큼은 “네가 첫째니까 동생을 돌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무게가 얼마나 삶을 짓누르는지,

그 속에서 자기 몫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야 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자신만의 삶을 살기를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야근을 갑자기 해야 했던 어느 날,

나는 결국 딸에게 부탁했다.

"동생을 어린이집에서 좀 데려와 줄래?"


스스로 세운 원칙과는 어긋나는 순간이었다.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던 내가,

현실 앞에서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딸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시켜?"


그 한마디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그 아이 덕분에 버텨왔는데,

왜 나를 밀어내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막막한 순간들이 쌓이며

나는 자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내몰렸고,

결국 서운함은 원망으로, 원망은 미움으로 번져갔다.


'엄마가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그때 나는,

엄마이기 전에 한 사람으로서 너무 지쳐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딸은 사춘기 한복판에서

가정의 불화와 엄마의 기대를 함께 견뎌야 했다.


아직 자기 인생도 버거웠을 텐데,

그 아이의 마음에는 늘

"이번에도 또 나야?"라는 탄식이 맴돌았을 것이다.


내가 내 몫을 감당하느라 힘들었던 것처럼,

딸도 자기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땐... 그걸 알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딸이 성인이 된 어느 날,

그날 일을 꺼내며 말했다.

"어떻게 중학생한테 동생 데려오라고 할 수 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숨겨둔 서운함이 낯설게 다가와

그저 얼어붙은 듯 입을 다물었다.


며칠이 지나고,

참다못해 결국 터뜨리고 말았다.


"네가 성인이 된 시점에서는 이해할 줄 알았어.

더 어린애들도 동생 데려오잖아!"


그 말이 입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내가 엄마로서 얼마나 버겁고 서툴렀는지

또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딸도 나처럼

감당하기 어려운 걸 꾹 참고 있었던 거였다.

내가 외롭고 무너져 있던 만큼,

딸도 제 몫을 버텨내느라 지쳐 있었다.


엄마로서 부족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왔고,

그보다 더 깊은 미안함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딸에게 기대지 않은 줄 알았다.

그러나 이미 깊이 기대고 있었다.

기대가 채워지지 않자 서운함만 더 깊어졌고,

나는 끝내 기대지 않은 척을 했다.


그 모든 혼란과 서툶을

사랑이라는 말로 덮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도 나는 믿는다.

딸의 눈빛 안에,

아직 닿지 못한 사랑이 있다는 걸.


말은 끝내 닿지 않았지만,

마음은 지금도 그 아이 곁을 맴돈다.


나는 엄마로서 서툴렀다.


참는다고 해서 사랑이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걸 그때 알았더라도 실천할 여력은 없었다.


눈앞의 현실을 버티는 데 매몰되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결국 딸에게 상처를 주었다.


언젠가, 그 아이가

말없이 내게 다가올 날을 기다린다.


나는 오늘도,

그 자리에 조용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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