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동화처럼 : 불을 삼키던 용, 말 없는 작은 그림자
내가 놓친 것들
내가 그때 놓치고 있던 것은 단순한 인내가 아니라
나 자신을 돌볼 권리였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고,
지지를 구할 용기도 잃어버린 채 홀로 버텼다.
또 하나 놓친 건 관계 속에서의 인정이었다.
누군가 "힘들지?"하고 다가와 주었다면,
나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따뜻한 손길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는 신호를 수없이 보냈지만,
그 모든 경고를 무시하고 더 오래,
더 깊이 참아내다 결국 폭발했다.
그날 나는 끝에 서 있었다.
무너진 건 나였지만,
그 무너짐의 그림자는 고스란히 어린 딸에게 드리워졌다.
딸이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짐을 짊어져야 했다.
그 시절의 고통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던 이야기.
하지만 내 인생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건너뛰고는
작은 바람에도 떨고 있을 감정을
이해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워진다.
오랜 번뇌 끝에
나는 이 이야기를 한 편의 짧은 동화로 풀어냈다.
우리만의 아픔과 희망을 남겨본다.
불을 삼키던 용, 말 없는 그림자
옛날, 아주 오래된 산 아래
한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그 용은 불을 뿜지 않기로 다짐했다.
자신의 불이 사랑하는 이들을 다치게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은 불을 꾹꾹 눌렀다.
잿더미 위에서도 작은 둥지를 만들며,
어떻게든 지켜내려 애썼다.
첫 번째 알이 태어났을 때,
용은 세상을 버텨낼 힘이 생겼다고 느꼈다.
하지만 두 번째 알이 깨어날 무렵,
하늘은 더 이상 용을 도와주지 않았다.
불을 참아내느라 용의 비늘은 금이 가고,
날개는 점점 무거워졌다.
둥지는 흔들렸고, 용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용은 끝내 불을 삼키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눌러왔던 불꽃이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다.
울부짖는 불꽃 속에서 작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작은 그림자는 무서웠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사랑하는 존재가 불에 타버리는 걸 지켜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작은 그림자는 외쳤다.
"여기 불이 나요! 도와주세요!"
불은 꺼졌지만, 남은 것은 타버린 재와 차가운 침묵.
숨이 턱 막히는 상실, 어딘가 부서진 마음들이었다.
그날 이후,
작은 그림자는 더 이상 아이일 수 없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고, 눈물을 마음껏 쏟아낼 수도 없었다.
그림자는 가족을 지키는 빛이 되었지만,
동시에 갑자기 커버린 어른이 되었다.
그 빛은 소중했지만, 자신을 잃은 대가 같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다시는 어린아이가 되어 울 수 없다는 걸 작은 그림자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둥지에는 아직 작은 촛불이 있었다.
막 태어난 새끼 용은 언니의 품에서 울음을 삼키며
작은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모두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았음에도, 용과 작은 그림자는 자주 엇갈렸다.
서로를 바라보지만, 말은 쉽게 닿지 않았다.
불을 삼키느라 상처 난 용과,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작은 그림자 사이에는
말 없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용은 드디어 불을 삼키지 않아도 되는 날을 맞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너는 나를 구했지.
하지만 네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날 이후 네 삶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나는 미처 알지 못했어."
작은 그림자는 한참을 말없이 서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꾹 눌러왔던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용도 함께 울었다.
타버린 둥지와 함께 살아온 세월,
두 아이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버텼던 긴 어둠이
그 눈물 속에서 서서히 풀려갔다.
그 울음이 잠잠해진 자리에서,
두 그림자는 조용히 맞닿았다.
작은 촛불 하나가 그 곁을 지켰다.
말없이 지나친 시간들이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딸의 눈동자에 비친 그날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그때의 나 역시
얼마나 외롭고 지쳐 있었는지,
이제라도 그 마음을 돌보고 치유해야 한다는 걸 안다.
엄마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의 나,
그 상처 입은 마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일.
그것이 늦은 고백이자 우리의 새로운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