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서점 예스24의 이북 서비스인 크레마클럽을 구독했을 때 매달 받았던 크레마머니가 있다. 돈 대신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와 비슷한 느낌인데, 어느 날 문득 그것을 최대한 다 쓰고 싶어서 크레마머니로 할인 받을 수 있는 책만 골라서 산 적이 있다. 그중 하나가 이 책이다. 책을 구매하게 된 비화는 다소 멋없다. 좋은 점이라면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코멘터리 북이 있다! 때로는 작품 본문 내용보다 작품의 뒷이야기와 작가 인터뷰를 읽는 것이 참 재미있다.
내가 처음 만난 김애란 작가의 작품은 소설집 <비행운>이다. 그다음으로 읽은 작품은 소설집 <바깥은 여름>이었다. 두 작품 모두 유명한 만큼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두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에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듯한 무게감이나 슬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작품도 그런 느낌일 것이라고 막연히 상상했으나 의외로 이 책은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을 품고 있고, 세 명의 주연 인물 모두가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청소년 문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책의 대표 키워드를 몇 개 꼽자면 아무래도 비밀, 상실, 슬픔을 선택하고 싶다. 세 아이는 저마다 각자의 비밀과 슬픔과 상실을 품고 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기에 슬프고, 혹은 소중한 무언가를 상실했기에 슬퍼 한다. 인물들은 모두 정서에 얕은 우울과 슬픔을 밑바닥에 깔고 시작한다. 읽으면서 생각한 점은 아니지만, 책을 다 읽고 나니 그랬었다는 생각이 든다.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남아 있는 마음
주요 인물인 '소리', '지우', '채운'은 모두 같은 반 동급생들이다. 같은 반 학생이지만 친밀하지는 않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세 아이는 모두 소중한 사람과 이별했거나, 추후 소중한 존재와 이별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리는 어머니를 잃었다. 큰 병을 앓게 되어 통원 치료를 받던 어머니는 병이 아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지우 역시 어머니 '지연'을 사고로 잃었고, 나중에는 애지중지 키우던 반려 도마뱀 '용식' 마저도 먼저 무지개 너머 세상으로 보낸다. 채운은 아버지 '기준'을 떠나보냈지만 그의 슬픔은 자신과 어머니를 학대했던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자기 대신 아버지를 칼로 찌른 죄를 뒤집어 쓰고 교도소에 수감된 어머니 '태선'과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었던 반려견 '뭉치'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세 인물의 상실과 슬픔.
소리는 비현실적인 초능력을 가졌다. 죽음을 앞둔 존재와 손을 잡으면 눈앞에 뿌옇게 흐려지면서 죽음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소리가 아무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비밀. 그러나 우연히 채운과 만났다가 채운의 반려견 뭉치의 죽음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된 소리는 채운에게 "뭉치에게 잘 해주라"는 말을 남기고, 뭉치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은 후 소리의 말을 미심쩍게 여기던 채운에게 결국 자신의 능력을 밝히게 된다. 그리고 몸이 편찮으신 아버지의 상태를 봐달라는 채운의 부탁을 받고 그의 아버지 기준의 죽음 또한 예지한다. ― 물론 소리는 채운이 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한다고 생각했기에, 채운에게는 아버지가 곧 나아지실 거라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 이것은 소리와 채운의 가장 큰 연결점이 된다.
아버지 없이 어머니 지연과 단둘이 살았던 지우는 지연이 죽은 후 지연의 애인이었던 '선호'와 함께 지내지만, 다정한 성품에 어떻게든 자신과 가까워지려는 선호의 태도를 내내 불편하게 여기다가 결국 집에서 독립하자는 목표를 세우고 방학 동안 건설 현장에서 일하게 된다. 집을 비우는 동안 반려 도마뱀 용식을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유일하게 와 주었던 소리에게 맡기면서 소리와의 연결점이 생긴다. 인터넷 만화 카페에 종종 만화를 올리는 지우가 연재하는 만화는 <내가 본 것>이라는 제목을 가진, 채운이 아버지를 찌르고 채운의 어머니가 경찰에 연행되었던 날을 재구성한 작품이다. 채운은 이 만화를 통해 지우가 그날 자신과 어머니를 목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말의 접점도 없었던 채운과 이어지는 매개체가 된 셈이다.
채운의 비밀은 자신이 아버지를 칼로 찔렀다는 것. 물론 악의를 가지고 찌른 것은 아니다. 만취한 상태로 칼을 휘두르며 어머니 태선을 위협하는 아버지 기준을 막아서다가 실수로 일어난 사고였지만, 태선은 자신이 남편을 칼로 찔렀다며 거짓 자백을 했고 채운을 대신해 죄인이 되었다. 그로 인해 채운은 이모 '태주'의 집에서 지내게 되고, 어느 날 이종사촌 동생 선이가 산책을 시키다가 잃어버린 뭉치를 찾다가 소리를 우연히 만난다. 이후 채운은 소리가 자신의 반려견 뭉치의 죽음을 미리 알았다는 사실, 그리고 죽음을 미리 볼 수 있는 소리의 능력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채운은 아버지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소리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봐 달라고 부탁했고, 그래서 소리가 한 선의의 거짓말에 절망하기도 했다.
세 아이는 저마다 깊은 슬픔과 외로움을 끌어안고 있다. 소중한 이가 영영 사라진 세상은 하늘 반쪽이나 태양과 별이 사라진 세상과 마찬가지일 테다. 어떤 존재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의 존재감, 조금 더 다정하게 굴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과 자책감, 이곳을 떠나버리고 싶다는 마음과 어디론가 떠나기 두렵다는 마음이 얽혀 세 아이는 내내 혼란스러운 감정에 시달린다.
인물들이 서로 깊은 감정을 가지거나 세기의 우정을 나누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지우와 채운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단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지우는 칼에 찔린 채운의 아버지 기준이 실려가는 현장을 볼 당시에 자신과 어머니를 버리고 떠난 증오스러운 아버지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에 몰래 따라간 차였다. 지우는 그때 채운을 부러워했고, 그 감정을 그대로 담아 만화에 그려냈으며, 채운은 그것을 보고 지우의 마음을 알게 된다. 안지우와 오채운 두 소년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은 그 정도가 전부다. 하물며 지우는 채운이 자신의 만화를 본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으므로 감정의 결이라고 하기에도 너무나 미흡한 상태인 것이다.
다만 소리와 지우, 소리와 채운, 지우와 채운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연결되어 서로의 비밀과 슬픔을 알아간다. 문득 슬픔을 나누면 어떻게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슬픔이 반이 되거나 슬픈 사람이 둘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슬픈 사람은 세 사람이 되고 슬픔은 세 조각이 된다. 소리에게는 아버지 '호민'이 있고, 지우에게는 어머니의 애인이자 유일한 보호자인 '선호'가 있고, 채운에게는 저에게 "이제 나는 네가 골목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울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편지를 전한 어머니 태선이 있다. 아픔과 외로움이 존재하는 만큼 애정과 온기 역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아이들은 혼자이면서도 혼자가 아니다. 곁에 누군가가 있고 때로는 자기 자신이 있다. 마음이 존재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했던 존재가 있고,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산다.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니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할 것이다. 살아갈 것이다. 그 사실을 다행이라고 여겼다.
문장 수집
140p
있지, 사람들 가슴속에서는 어느 정도 남의 불행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몰랐으면 하는, 그런데 모를 리 없는 저열함 같은 게.
인간은 저열하고 간사한 마음을 품은 존재라는 것을 자주 상기한다. 나도 그렇고, 나의 부모님과 형제들도 그렇고, 나의 친구들도 물론 그럴 것이며, 이름도 나이도 목소리도 모르고 하루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우연히 마주쳤다가 한순간에 멀어지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럴 테다.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고 안쓰럽게 여기면서도 자신의 불행이 저만큼 커다랗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할 것이다. 때로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통쾌하고 후련한 마음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설령 먼 사람이 아니더라도. 나와 상당히 가까운 사람이더라도…. 아무래도 그건 너무 섬뜩한 본능이다. 나는 남의 불행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141p
'피는 한 사람에 대해 혹은 그 가계에 대해 무얼 얼마만큼 말해주나?'
핏줄, 집안 같은 출신 성분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해방 욕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이거나 본질적인 감정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은 사회적 활동을 위해 소속감을 갈구하도록 진화했고, 가족이나 가정은 한 사람이 태어나자마자 가장 먼저 접하는 만큼 가장 단단하게 형성되는 집단이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로 인해 자주 착각을 한다. 어떤 사람의 출신이나 가족을 안다면 그 사람에 대해 대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라는 착각. 부모와 무서우리만큼 닮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부모와 정반대로 자라나는 사람도 있다. 이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다.
170p
'그러니 다른 사람들 삶에는 또 얼마나 많은 기만이 있을까?'
가끔 망각한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무언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며 산다는 것을.
182p
눈앞에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온 힘을 다해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니까.
어쩌면 이 문장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사람들은 이따금 제자리에서 뒷걸음질치거나 뒤돌아 달려가는 사람을 겁쟁이나 도망자라고 조롱하곤 하지만, 두려움은 나를 때로 안전한 곳으로 옮겨다 주는 감정이고 도망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느껴 도망치는 사람은, 다르게 말하면 다른 방법과 선택지를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그럴 마음이 없었더라도.
다른 선택지를 찾는 건 도망이 아니라 기도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다. 전지전능한 신에게 평화와 안녕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뛰어가는 것이다. 언젠가 그 내달림은 도망이 아니라 의지가 될지도 모른다.
196p
그 빛은 마치 옛 화가들이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 끝에 묻힌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았다.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
아주 적은 양이지만 영혼을 표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 우리에게 그것은 무엇일까. 나의 영혼을 위해 아주 적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202p
거기 대단한 폭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곧 커다란 폭력이기도 했다. (…) 세상에서 사람들이 권력 놀이만큼 좋아하는 것도 없으니까.
인간의 서열 정리와 권력 다툼은 날렵한 맹수들의 세계보다도 험난하고 비열하다. 힘을 가진 존재는 우위가 되고, 힘이 없는 존재는 뒤로 밀려나고, 어딘가 다른 존재는 소외되거나 따돌려진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똑같은 것이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하는 순간 인간의 마음은 바닥까지 투명하게 드러난다. 나는 그 마음을 안다. 그곳에 속하지 않은 방관자로서의 안전감과 만족감, 그것을 만끽하는 이중적이고 졸렬한 감정을 안다.
< 코멘터리 북 >
- 담당 편집자가 쓴 '애란 관념사전' 中 -
22p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에서)
입장은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나를 자꾸 무지한 사람으로 만든다. 어떤 세상에서 나의 모든 조건이 불리하게 작용된다면, 그만큼 어딘가에서는 내가 가장 유리한 사람이라는 점도 자각해야 하는 것이다. 유리한 조건을 가진 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을 나뿐만이 아닌 모든 사람이 공평하고 동등하게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잘못이다.
22p
그러니 '희망'이란 순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용기 있는 사람들이 발명해내는 것인지도 모르리라.
(「물속 골리앗」'작가노트'에서)
희망을 버렸다는 것은 무언가를 기대하며 나아갈 자신감과 의지를 잃었다는 말과도 같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걸음을 자꾸 붙잡으며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세상에서도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는 힘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므로, 나는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지금보다 조금 더 잘 될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 에세이 '그랬다고 적었다' 中 -
75p
인간은 대체로 빤하고 진부하지만 가만 보면 참 다채롭게 진부하고 제가끔 빤하다는 걸, 우리 삶과 노동이, 사랑과 일상이 얼마나 놀라운 구체성으로 이뤄졌는지 이해하고 살펴야 한다.
다양한 모습으로 진부하고, 저마다 따로따로 빤한 것이 삶이라니 참 적절한 비유가 아닌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는 전부 다른 사람이니까. 오늘 나의 하루가 수천 일을 보내며 산 결과물이자 미래의 내가 보낼 하루의 재료라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나의 존재가 과거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헷갈리곤 한다. 어쨌든 인생은 흘러가고 나는 살아 있으며 모두가 마찬가지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건 그 자체로도 신기하다.
76p
'언젠가 나도 저렇게 자신도 모르는 냄새를 풍기며 작아지겠지' 생각했다. '살아온 이력과 상관없이, 인품이나 개성과도 전혀 상관없이 그리되겠지' 예감했다.
부모님은 늙어가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던가. 엄마 말에 따르면 외할머니께서는 팔순을 넘기셨는데도 성인용 보행기 ― 흔히 '실버카'라고 부르기도 하는 ― 를 절대 끌고 다니지 않으신단다. 늙은이 같다면서 싫어하신다나. 무릎이 아파 가까운 거리도 잘 가지 못하면서 그런 고집을 부리신다며 엄마는 속상해했다. 엄마는 막 세수하고 나온 나를 보거나 엄마 무릎을 베고 누운 내 이마를 쓰다듬을 때마다 "우리 아무개는 피부도 뽀얗고 보송보송하고 좋네!"라고 말한다. 엄마도 한때는 이렇게 탱탱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도 함께 붙는다.
사람들이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는 이유가 단순히 온몸에 생기는 주름이나 축축 처지는 살갗, 모든 신체 및 인지 기능이 쇠퇴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늙음은 몸과 마음이 마모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건강하고 활발했던 어떤 시절이 완전히 저물고 점점 기울어지는 시간만 남았다고 생각하기에 줄곧 젊은 시절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무엇보다 늙은 육체에서 풍기는 특유의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구릿한 홀아비 냄새라거나 나이 든 몸에서 풍기는 퀴퀴한 체취, 치아 사이사이와 식도와 위장을 타고 나오는 묵은 구취나 향수를 뿌려도 주름진 살냄새에 금방 묻히고 마는 것들.
하지만 아무리 축복받은 유전자와 꾸준한 관리를 거쳐도 세월을 통과한 육신의 냄새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이 한 번 샤워를 해도 온몸에서 부드럽고 어린 샴푸향과 신선한 비누 냄새가 풍기듯이, 세포는 서서히 신선한 것들을 놓아버리고 황혼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길이고 누구든 들어가야만 하는 길이다. 본능적인 거부감은 어쩔 수 없더라도 늙음 그 자체를 기피할 대상으로 삼는다면 어느 누가 행복한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 텐가.
마지막 정리
책을 읽으며 소리, 지우, 채운 세 사람을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들이 저마다 크고 작은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고 생각했다. 평범한 사춘기 청소년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부모나 보호자들까지도. 매 순간이 혼란이고 자기 자신과의 갈등이며 사랑하는 존재와의 이별을 맞이한다. 제가끔 상실을 겪고 상처도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결말은 분명 희망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며 살아갈 것이라는 희망. 시간이 줄곧 흐르는 것처럼 그 속에 머물렀던 사랑과 애정 또한 사라지지 않고 뿌리를 내려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이야기를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