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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Oct 30. 2024

감정, 기억, 존재, 사유의 기록

신유진 著, <열다섯 번의 밤> [산문]


- 제목 : 열다섯 번의 밤

- 저자 : 신유진

- 출판사 : 1984books



작가는 프랑스 파리 8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여러 작품을 번역한 소설가 겸 수필가. 나는 외국에서 살면서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자신의 색깔과 한글의 묘미를 지켜내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외국에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모국어보다 그 나라의 언어를 훨씬 많이 사용하면서 살지 않는가. 타국 생활이 길어질수록 예전에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사용하던 모국어의 정취와 깊은 맛을 보다 섬세하게 느끼게 되는 것일까. 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 어쩌면 발음도 문법도 전혀 다른 언어가 생활을 지배하는 만큼 모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건지도 모른다.


산문집은 높은 자유도를 가진 만큼 '어떤 책이다'라고 정의하기 모호한 구석이 있다. 다만 주제는 다양하더라도 한 권의 책에 실린 글에는 대체로 공통적인 정서가 흐른다. 외로움이나 고독감, 사랑이나 원망 같은 감정 혹은 어떤 시절에 머무르는 기억과 감각들. 이 책의 작가는 감정과 사유를 책에 고스란히 담아냄과 동시에 철저히 절제한다. 타인의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듯하면서 자신의 기억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분명하게 전한다. 그것이 작가 특유의 매력이라고 느꼈다. 초연함과 축축함을 동시에 지닌, 건조하면서도 물기가 어린 문체. 이런 것들을 좋아한다. 내가 지니고 있지 않은 것들을 지닌 사람들을 향한 동경이랄까.


결이 깊게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 기질이 예민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무던해 보여도 속으로는 수많은 생각과 감각을 느끼는 사람들. 대다수 사람들이 큰 감흥 없이 지나가는 일에 오랫동안 감정이 머무르는 섬세한 사람들. 그런 사람이 쓴 고독과 사유의 책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이방인으로서의 삶은 매일 이어진다


작가는 한국인이다. 현재는 어디에서 거주하는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 책을 집필하던 시점에는 프랑스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혼자 타지에 간 적도 없는 내게 혼자 타국으로 떠나는 일은 두려움 그 자체다. 공항으로 향하는 순간부터 불안과 긴장에 잔뜩 휩싸여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굉장히 고독할 것이다. 내가 태어난 이 나라에서도 외로운데 하물며 나와 다른 외모, 다른 정서, 다른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이 주인인 나라에서는 불안과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만큼 자유로운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초점은 힘겨운 타국살이가 아니다. 낯선 나라에서 만난 낯선 사람들, 낯설었다가 익숙해진 사람들, 익숙했지만 어느새 조금 낯설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유년시절, 자괴감, 시간, 파괴와 삶처럼 머릿속 어딘가에 눅눅하게 들러붙은 평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태어나고 자란 나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도 역사도 공기도 다른 땅을 밟고 살아가는 동안 환경은 인간에게 알게 모르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자신이 '이방인'임을 인식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며 보내는 하루가 그럴 것이다.


단순히 타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해서 모두 이방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고국을 떠나지 않고 산다고 해서 무조건 소속감을 느끼며 사는 것도 아니다. 익숙한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사무실에서도, 은행이나 마트나 카페나 식당에서도 우리는 별안간 언제든지 외로울 수 있고 세상을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다. 익숙한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이방인으로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건 우리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생각하고 느끼며 사는 생물이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방인으로서의 감각은 자기 자신이 이지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기분과 비슷할 것이다. 작가의 고독과 고뇌는 비단 기괴한 것만이 아니다. 나 자신이 세상과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결이 달라서 자꾸 동떨어지는 존재라는 기분은 나 역시 드물지 않게 느끼는 것이기에. 나는 작가가 세상과 삶과 기억에 품은 애정, 그리고 증오와 연민의 냄새를 희미하게 맡았다. 이제 진짜 냄새가 맞나 의아할 정도로 어렴풋하게. 그것은 내가 나의 고국을 사랑함과 동시에 그 속에 머무르는 사회를 미워하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나간 시절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 옷깃을 붙잡으며 혼자 남은 어둠 속에서 촛불에 비추어 조각 너머 장면을 들여다보는 일은 그저 그리움만이 아니다. 기억해야 할 일은 그렇게 기억이 된다. 이 책에 쓰인 모든 문장은 기억하고픈 동시에 망각하고 싶은, 외로운 사람의 편지이지 일기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수집한 문장


요즘 독서하면서 즐기는 것은 문장을 수집하는 일이다. 독서 감상문을 쓸 때도 인상 깊었던 구절을 필사하며 느낀 점을 적어두는데, 아무래도 공책에 손으로 쓰는 글은 체력과 귀찮음의 한계에 부딪혀서 짙은 마음이 비교적 가볍고 짧게 담기는 경우가 많다. 빠르고 간편한 타이핑이라면 조금 더 많은 문장을 남길 수 있다.


이따금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가치관이나 사고방식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진짜 작가가 듣는다면 썩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치고는 생각도 깊지 않고 시야가 넓지도 않아서, 나만의 주관이 있다기보다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내가 평소에 하던 생각이랑 비슷하네?' 싶은 문장을 몇 개 찾아냈다. 비슷한 결이 하나라도 있는 사람들은, 생애의 일부분이나 평소에 종종 떠올리는 생각을 떼어서 비교하면 의외의 면에서 흡사한 파편을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훌륭하신 작가님들께서는 무지하고 어리석고 어리숙한 나의 말을 너무 불쾌하게만 받아들이시지 말라. 나는 80억 명의 사람들 중에서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면, 그가 안타깝고 애처로우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그토록 깊은 동질감과 반가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1p

누군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고 말하기에, 그저 그런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인생은 다 그런 것'이란 말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 아무도 인생을 그런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 아닌가.

한국이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한지는 모르겠으나, 한국이 유독 그런 경향이 강한 편이라는 생각도 한다. 인생에 '올바른 과정'이 정해져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 극단적으로 축약한다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서 일하거나 직업인이 되고, 매달 일정한 수입을 받으면서 적당한 저축과 투자를 하고, 때가 되면 좋은 연인을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는, 사실 모습만 조금 다를 뿐이지 어느 나라를 가도 비슷한 과정을 '모범적인 인생'으로 삼고 있는 분위기 말이다.


많은 선택지를 누린 적이 없다. 사회는 늘 지나치게 적은 선택지를 주고 그곳에서 정답을 고르라는 식으로 우리를 키워왔다. 어떤 이들은 명문대 학생, 대기업 직원,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이름이 특별한 권력을 가졌다고 착각한다. 일종의 선민의식인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삶을 모든 사람이 동경하는 줄 아는 것이다! 물론 부와 명예가 있다면 대단히 훌륭한 삶이지만, 부와 명예가 없다고 대단하지도 훌륭하지도 않은 삶이라 단정하는 건 너무 섣부르고 편협한 판단이다.


고학력자와 고소득자가 인생의 성공이고 승리라고 말하는 세상 속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보면서 배운 게 그것밖에 없다면 아이들 역시 책임감보다 욕심이 많은 어른으로 성장하지 않겠는가. 살면서 얻은 지혜보다는 입증된 지식이 우월하고, 공부할 시간에 미래를 고민하는 건 멍청한 일이고, 성공이 아닌 다른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말은 쓸데없는 입발림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삶을 잃은 아이들은 마음을 잃은 어른이 된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다.


그게 죄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것이나 야망을 가지는 그렇게 큰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다. 나는 심판자도 아니고 성현도 아니다. 누가 어떻게 살아가든 그 역시 하나의 인생이고, 무수한 삶의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죄라면 지금 나의 삶도 죄가 되지 않겠는가. 등단도 못 한 무명작가로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한 직장인. 그러면서도 독서와 집필을 포기하지 못하는 멍청한 사람. 이런 나의 삶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잣대를 내릴 수 있는가.


그러나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안쓰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정답을 찾기 위해 매일 괴로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안쓰럽다. 쉬는 방법을 몰라서 쉬지 못하고 온몸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뛰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반대로 걸어가는 방법조차 잊어버려 창백한 얼굴로 허공만 응시하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어른들의 욕심이 날개가 되어 아이들의 자유로운 날개를 절개하는 현실이 안쓰럽다. 그건 정말 슬프고,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내 인생은 나의 인생. 네 인생은 너의 인생. 엄마 인생은 엄마의 인생. 누구의 삶은 누군가의 인생. 그러니까 삶에 올바른 길 같은 것은 없다. 내가 가는 길이 삶이고, 내가 보는 것이 나의 세상이 된다.



65p

절망하는 사람, 아픈 사람, 비극의 경계에 있는 사람 앞에서는 무심코 나오는 말에 빗장을 걸어 잠가야 한다.

어딘가에서 본 말이 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 어떤 위인이 남긴 격언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말을 하려면 그 말이 침묵보다 나은 것이어야 한다"


말해야 할 상황인데 말하지 않는다. 말을 아껴야 할 상황인데 너무 많은 말을 한다.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말이다. 너를 위한 충고라고 했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나를 위한 푸념이다. 듣는 사람은 불편하고 말한 사람은 후련해지는 기이한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걱정하는 척하면서 타인의 불행을 교묘히 즐거워하는 졸렬한 마음, 그곳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을 할 바에는 침묵을 지킨다. 철저히 말을 아낀다. 세간에서 뜻하는 '눈치'란 얼마나 빠릿빠릿하게 잘 움직이느냐, 타인의 말에 담긴 저의를 얼마나 잘 이해하느냐가 주요지만 내가 생각하는 눈치는 그런 게 아니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능력이야말로 어른이고 성장하는 인간이라면 진정 갖추어야 할 눈치다.


입술이 쉽게 벌어지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빗장을 걸어 잠근 사람이 될 것이다. 그저 과묵한 것만이 아니라 내가 해도 될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정확하게 구분하여 시의적절하게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45~146p

이래저래 후회가 많은 것은 천성이라고 해 두자. 자기개발서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인간과 거리가 먼 사람이기 때문인가. 여하튼 나는 이렇게 살았고, 살던 대로 살 것이다.

자기개발서에 등장하는 이상적인 인간! 나 역시 이런 인간상과 거리가 멀다.


사실 자기개발서 혹은 계발서를 많이 읽은 적은 없다. 그렇지만 나의 삶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분명 그런 책에서 지향하는 '이렇게 할 것',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을 충실히 지키며 살지는 않으리라. 활동성도 없고 의욕도 없고 잡생각만 많은 우울한 인간.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이런 사람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이런 성질을 천성으로 가지고 태어났기에 변화하기가 정말 어렵다. 너무 어렵다.


문제점을 조금씩 고치며 변할 수는 있겠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으므로 나는 십수 년 후에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 전혀 다른 성격이 되었다면 그만큼 커다란 정신적 충격이나 외부적인 사건이 있었을 테지. 그것까지는 지금의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니, 그저 가만히 기다리겠다. 기다리면서 나는 지금의 내 인생을 살겠다. 누구도 속이지 않고 솔직하되 예의는 철저히 지키며 살아가겠다.



212p

왜 살아야 하냐는 물음 없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목표 없이,

그냥 삶이니까. 삶의 명제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니까.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을 세밀하게 살펴보자면 자잘한 행복, 불행, 괴로움, 슬픔, 기쁨, 우울, 자괴감, 수치, 성취감, 즐거움이 잔뜩 섞여 있다. 찰리 채플린의 말을 빌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에 가깝기도 하다.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하루가 많았다. 어린 시절에도 마음이 문드러지게 아픈 감각을 느끼며 이불을 뒤집어쓰거나 어두운 방구석을 응시하는 날이 무수히 있었다.


그런 시간을 겪으며 나는 자라났다. 살아오는 동안 죽지 않았고, 그렇게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많다고 생각하면 걸음 옮기기가 두렵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야 하기에 나는 산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 내가 거쳐온 모든 경험이 나를 키워준 만큼 산다. 내가 누군가를 키워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잃지 않고 소중한 존재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삶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나의 탄생에 어떠한 계시가 있던 것도 아니다. 삶의 목표는 각자 만드는 것이고, 꿈이 있든 없든 살아가는 사람은 살아간다. 산다는 건 비바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비바람을 뚫고, 그 속에서 춤을 추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213~214p

시간은 성장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사람은 저절로 자라나지 않는다.

나이만 먹고 생각이 통 자라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몇십 년 동안 살면서 이런저런 경험도 많이 했을 것이고, 그만큼 생각도 많이 했을 것 같은데, 조그마한 마을에서 한 발자국 나가지 않은 채 평생을 산 것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와 좁은 시야를 가진 어른들. 어린 시절의 미숙한 배려심, 얇아서 자주 구멍이 났던 마음을 갈아 끼우지 못하고 그대로 자라난 사람들. 많은 나이가 반드시 지혜와 연륜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부딪히면서 깨닫는다. 고민하고 반성하며 성장한다. 인간이라면 자기 자신에게 한 번쯤은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맞는 걸까?', '내 생각에 틀린 부분이 있지는 않을까?' 어느 정도의 반성과 검열과 성찰을 거쳐야 비로소 마음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데, 나이만 먹었다고 자신을 '어른'이라고 착각하는 어른들이 많아서 어른의 세상 안으로 들어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다만 어른이라고 아이와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다. 부모님마저도 불완전한 인간이고 허점 많은 사람들이다. 모두가 이상적인 모습으로 자랄 수는 없다. 어쩌면 어른들도 어떻게 더 성장해야 하는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건지도. 닫힌 성장판처럼 마음도 더 자라날 구석이 없어서, 그렇다기엔 자신의 마음이 너무 좁고 누추해서 공허감과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혜와 총명을 갖추지는 않았더라도 무례한 어른으로 자라서는 안 되는 법.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때에 맞춰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아주 어려운 일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성장하지는 않고, 인간은 혼자서 자랄 수 없으니, 결국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지주대가 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키우고 자라게 한다. 그러면 조금은 세상을 덜 미워할 수 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들도 어린 나무처럼 생각할 수 있다. 지금도 크는 중이구나. 아주 느리더라도 조금씩.



233p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 살아서 잔을 들고 공연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이를 마주하며 웃고 있는 이 시간, 삶은 축제가 아니던가.

2015년 11월 파리 테러는 프랑스 전역은 물론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안겼던 대규모 테러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이들이 가족과 친구와 연인을 잃었다. 일상을 잃고 평화를 빼앗겼다. 그 속에서 작가는 말한다. 어째서 그들이 죽어야 했는가. 테러리스트들이 말하는 '신'은 끔찍한 대학살과 테러조차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포용할 만큼 자애로운 존재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을 믿지 않겠다고. 테러의 후유증과 불안과 두려움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래도 작가는 언젠가 활짝 갠 맑은 날이 밤을 이기고 올 것이라 믿는다.


평온이 깨지고 일상이 무너지는 사건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와 거대한 태풍처럼 모든 것을 휩쓸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유유히 사라진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원망스러울 정도로 화창하다. 멀쩡한 낯빛을 내보이며 나약한 인간들을 농락하는 듯하다. 살아남은 이들은 하늘을 원망하는 대신 남은 생을 마저 살아야 한다. 전쟁터에서도 민간인들이 총격을 피해 살아가듯이. 혼돈으로 뒤집어진 거리에서도 폭격을 피해 달려가듯이.


여전히 시간은 흐르고, 목숨은 붙어 있고, 마음은 남아 있다. 삶은 계속 이어져야 하니까. 살기 힘겨워지는 날이면 조용히 말해야겠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의 삶은 아직,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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