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집에는 '영혼'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특히 조연정 문학평론가가 쓴 해설 [개기일식이 끝나갈 때]에서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익숙하게 마주친다.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다양한 상황에서 조금씩 다른 결을 지닌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도 그렇지만,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실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감정의 발화와 인간성의 개화도 마찬가지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고, 인간성의 근원은 설명할 수 없지만 모든 것이 실존한다. 장기처럼 몸에 들어 있지 않다면 영혼이 품고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영혼이 좋고 마음이 좋다. 그것들의 성질도 좋고 그저 단어만으로도 좋은 것이다.
이 시집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라면 '영혼으로 쓰인 일기'라고 말하겠다. 나는 온 세상에 흔전만전하고 한없이 나태한 문인에 불과하지만, 종종 영혼의 존재와 그것의 특질에 관해 생각하곤 한다. 문과의 기본 덕목이 실생활에 하등 쓸모없는 공상과 단편적인 생각을 마치 귀중한 양식처럼 곱씹어 음미하듯 먹는 것이라면, 나는 아주 나태하며 문장력도 통찰력도 밑바닥인 꼴통이지만 어쨌든 굶지는 않겠다. 글과 말과 언어와 생각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집어 먹을 것이다.
시집이라는 건 비슷한 결을 지닌 양상의 이야기가 묶여 있으면서도 작품 하나하나의 기승전결과 호흡과 목소리가 모두 달라서, 도무지 이것들을 어떻게 이어야 하나의 이야기가 나올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시는 애초에 통합이 불가능하도록 쓰였다. 그럼에도 이 책을 영혼으로 쓰인 일기라고 말한 이유는, 모든 작품에 제일 먼저 어떤 인간의 영혼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세상도 사랑도 마음도 장면도 아닌 영혼이라면 도대체 그건 무엇일까. 아무래도 영혼은 인간으로서의 모든 넋과 마음이 한꺼번에 응축되어 있는 존재 같다. 이 시집에 실린 작품에는 모두 기억이 담겨 있고, 무언가를 말하고자 의도하기 전에 이미 삶을 살아오며 수많은 기억과 감정을 축적하고 습득한 영혼이 자연스럽게 숨결을 내뱉듯이 쓰인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지만 정말 그렇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다. 이 시집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주 조금은 이 말에 공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 덧없는 희망과 착각을 붙잡으며 나는 시인이 쓴 아픔과 고독과 괴로움과 열망의 일기를 읽고 상상하고 느끼다가 조심스럽게 나의 공허한 마음속 서랍 구석진 곳에 밀어 넣었다.
34p
나도 모르게 팔 뻗어 줍고 싶었지
그때 알았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때 처음 아팠네
그러려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
「파란 돌」의 일부
나는 삶 자체가 수많은 고통과 고독을 기반으로 한 축복과 저주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사람인지라,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팠다는 시의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어설프게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사람인 탓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다 못해 책만 읽고 글에는 흥미가 없었다면 이렇게까지 무언가를 심연으로 들여다보거나 그러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마음에 대해, 세상에 대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사랑하고 열망하면서도 끔찍하게 증오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굉장히 음침하고 비관적이고 지나치게 자아비판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런 편이지만, 놀랍게도 이렇게 음침하고 비관적이고 자아비판적인 생각은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 길이나 사무실 정수기 앞에서 물을 받을 때, 서류를 정리하거나 거래처와의 통화를 끊었을 때,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나 방금까지 보던 예능 프로그램 영상을 끄고 책상에 앉았을 때 등등. 나를 아는 사람 중 누구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이 시처럼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않겠다는 생각, 그와 동시에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
115p
비 내리는 동물원
철창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거울 저편의 겨울11」의 전문
이 시는 어디에서 쓰였을까, 궁금했다. 어린 자식이 허망하고도 무고하게 떠난 세상에 남겨진 어머니의 심정을 차마 상상한 적이 없다. 십수 년 전에 커다란 배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을 때, 나는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며 단체로 삭발하는 어머니들을 뉴스에서 보았다.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눈물에 젖은 얼굴이 보였다. 몸의 절반을 떼어다 준 아이를 인재로 영영 떠나보내고도 온전히 슬퍼할 시간도 없이 싸워야 하는 이들의 마음을, 나는 결코 가늠하지도 못한다.
빈자리는 내내 겨울이다. 돌아보기만 해도 차가운 서리가 맺히고 입김이 나올 것이다. 빈자리에도 비로소 봄볕이 들고 새싹이 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믿지만, 내게 아주 큰 빈자리가 찾아와도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구멍이란 것은 그렇다. 배에 뚫린 구멍보다도 마음에 난 구멍이 아물기까지 훨씬 오래 걸리는 것. 어쩌면 죽을 때까지 완전히 메워지지 못하고 그대로 바람의 통로가 된 채로 지나버리는 것이 마음의 구멍. 생애 귀퉁이에 생긴 빈자리. 빗줄기 너머 고라니의 눈동자는 어땠을까. 실제로 고라니의 눈은 본 적이 없지만, 살아 있는 것들의 마음이 흘러나오는 눈동자는 그 자체로 생명력일 것이다.
131~132p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서시」의 일부
운명이란 '그런 게 어디 있어?' 싶다가도 '정말 있나?' 싶다. 간절할 때면 기도하는 사람처럼 그저 간사한 마음인지, 운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품은 힘인지는 잘 모르겠다. 둘 다일 가능성이 가장 크긴 하다.
나는 운명을 어느 정도 믿으면서도 그것에 구태여 연연하지는 않는 편이다. 운명처럼 만나는 사랑을 향한 낭만이나 환상 따위도 없다. 인생이 모두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니 얼마나 지루한 말인가. 다만 어쨌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삶에는 어느 정도의 운수나 팔자가 존재할 테고, 그에 따라 생애의 전반과 마음의 일부까지도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면 운명이라는 존재를 그저 허황된 망상이라고 여기고 넘길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운명이 내게 찾아온다면 조용히 끌어안고 있을 거라는 문장이 마음을 톡톡 건드렸다. 나의 운명이 나를 찾아온다면, 얼마나 애틋하고도 안쓰러울까. 아니면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원망스러울까. 나의 모든 것을 알고, 나의 모든 것을 느끼면서 함께 성장하고 흘러온 존재에게는 필연 애증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운명을 거스르며 살다가도 이것도 결국 운명으로 정해진 일인가… 생각하다 보면 종국에는 생각을 끊어버리게 된다. 운명이니 뭐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어쨌든 하루하루 살아내며 또 살아가는 것이 인생일 뿐이지.
나의 운명은 아마도 나와 같은 낯빛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취향이나 식성이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운명을 의인화한다면 그렇다. 불쌍하고 안쓰럽지만 그렇기에 밉고 그만큼 정다운 존재.
나의 영혼들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
시집을 읽고 나서 생각했다. 내가 아는 이면과 내가 모르는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집에 있을 때, 회사에 있을 때,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내가 전부 다르듯이 나의 인격에도 조금씩 미묘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페르소나를 만든다. 비단 표정이나 태도만이 아니라 내면의 영혼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을 나 자신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해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어째서 시집을 읽고 영혼의 페르소나 따위의 말을 떠올렸느냐면, 문득 시의 연(聯) 하나하나가 생애 주기처럼 모여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람은 언제부터 거짓말을 할까, 욕심은 언제부터 생겨날까, 성장하는 대가로 잃어버리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언제부터 영혼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지. 시적인 삶은 아니더라도 시를 잊어버리지 않는 삶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147p
삶 자체를 놓아버리지 않으려고 누군가는 안간힘을 쓰며 삶을 향해 가까스로 손을 내밀겠지만,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다시 산산조각 내버리고 마는 잔인함이 우리의 삶 안에 내장되어 있기도 하다.
조연정 문학평론가의 해설에 실린 문장이다. 나는 이런 글에서 이따금 정체 모를 위로를 받는다. 괜찮다는 말보다 우리가 괜찮을 수 없는 이유를 듣는 게 오히려 편안하달까. 인생은 어째서 힘들고 외롭고 아플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글을 읽으면 '그래도 어쨌든 나는 나로서 살아야 하는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곤 한다.
사람이든 세상이든, 사랑하고 싶다고 내게 사랑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손을 뻗어도 그 손을 차갑게 내치고 떠나버리는 삶의 야속한 순간을 한두 번 마주친 게 아니기에. 이 시집은 이렇다 할 희망이나 안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마음에 든다. 밑도 끝도 없이 절망적이지도 않다. 그저 투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으로서의 슬픔, 아픔, 외로움, 절망, 그리움, 허망함을 이야기한다. 마치 내면의 내가 쓴 일기처럼.
나의 영혼들도 아주 많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그중 무엇도 진짜 나이거나 가짜 나가 아니라 나의 모든 모습이라는 점은, 때로 미약한 안위가 된다. 그리고 나보다 훨씬 깊은 마음으로 삶을 유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글은 좋은 이정표가 된다. 시는 늘 어렵지만 어렵기에 궁금하고, 그래서 더욱 알고 싶다. 비단 육체만이 허기와 갈증을 느끼지는 않을 테니.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시집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문장 하나하나를 더 잘게 씹으며 천천히 음미하고 싶었는데, 그건 역시 인식의 차이일 것이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조금이나마 몰래 들여다본 기분이기도 하다. 내계의 냄새와 체온이 잔뜩 묻어난 글이 좋다. 이 시집은 그런 책이다. 맨 뒤에 실린 해설 역시 읽기 좋은 글이었다. 영혼을 짊어지고 사는 삶에 대한 조언을 얻은 기분이다. 물론 그래 봤자 나는 인생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어린 인간에 불과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