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지 않았었다. 그 책도 김영민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단문집으로 먼저 작가를 만났다. 아무래도 '단문(短文)'이라는 단어가 매력적이었다. 대학교수를 역임했던 연구자가 쓴 인생의 허무보다는, 그가 살면서 끄적이듯 남긴 단상과 감상이 보다 익숙하고 부드럽게 다가오지 않는가. 물론 언젠가 전자의 책도 읽어볼 생각이다. 나는 인문학과 철학에 상당히 관심이 있다. 관심이 있는 것에 비해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아서 무관심과 마찬가지일 뿐.
글을 쓰면서 종종 느끼는 것인데, 작정하고 긴 글을 쓸 때보다는 그냥저냥 가벼운 마음으로 짧은 글을 쓰자고 생각했을 때 되레 마음에서 말이 제대로 우러나오는 편이다. 글쓰기를 향한 부담이 한결 덜하기 때문이다. 부담이 없기에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분열한 자아들이 모여 산으로 향하기에, 생각을 오랫동안 거치지 않고 쓴 글에서 종종 나의 놀라운 진심과 표현력을 목격하곤 한다. 물론 매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단문집도 작가의 투명하고 담백한 마음이 많이 실렸다고 느낀다.
무게는 가볍고 밀도는 높은 삶
무거운 삶, 허술한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가 택할 수 있는 것은 가볍지만 속은 꽉 차 있는 삶이다. 실속이 있고 허장성세하지 않는 삶. 나의 인생을 만드는 가장 주체적인 존재는 나 자신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외부 환경과 세상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뼈대를 만들고 집을 짓는 사람이 나라면, 땅을 흔들거나 비를 뿌리거나 온종일 뙤약볕만 쏟아내는 존재가 타인이고 세상인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땅을 흔들고 비를 뿌리고 뙤약볕을 쏟아내는 얄미운 타인이 될 테다.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읽으면서 '삶을 가볍되 엉성하지 않게 만들어야겠구나'라는 감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밴드 혁오와 코미디언 정형돈이 부른 노래 <멋진 헛간>의 주인공은 평생 자기만 잘난 줄 알고 살다가, 뒤늦게 자신이 덧없는 시간을 보내왔음을 깨닫는 탕자이다. 노래를 들으며 많은 이들의 삶이 이런 식으로 흐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중한 존재가 소중한 줄도 모르고 살다가 너무 늦게 뒤돌아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방식의 삶. 분명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죄책감은 해맑게 웃으며 나의 등에 힘차게 업혀 신난 아이처럼 다리를 바동거리는 것이다. 등에 업힌 아이를 내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죄책감을 업고 다시 천천히 길을 걸어갈 수밖에.
책의 제목처럼 양심과 죄책감을 토해내는 무거운 글은 없다. 인생의 허무와 불안을 털어놓는 고해성사도 없다. 착가의 가벼운 일상이 만들어진 삶 곳곳의 크고 작은 깨달음과 감정과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떤 글은 한 문장이고 어떤 글은 짤막한 일기다. 가볍지만 텅 비어 있지는 않다. 작지만 실속이 있다. 나는 이런 글을 꽤 좋아한다. 책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친구에게 추천하기도 좋다.
가벼운 삶을 산다는 건 중요한 책임과 현실을 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책임져야 할 일에는 확실히 책임을 지고, 현실을 살아야 할 때는 분명히 현실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마음과 영혼을 가장 가볍게 만들 수 있는 일 중 하나이다.밀도가 높은 삶을 산다는 건 책임과 현실만을 보며 악착같이 달려가겠다는 말이 아니다. 이 또한 반대이다. 세상을 돌아보고, 나를 되짚어 보고, 걷는 속도를 늦추고,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고, 건물의 밝은 불빛 대신 밤하늘의 작은 별빛 하나를 찾아보는 것이다. 성찰과 반성을 급하지 않게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마음에 나의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무게는 가볍고 밀도 있는 삶은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완벽하게 맞춰가는 삶인 것이다. 오전 9시까지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하는 대한민국에서 워라밸이란 얼마나 찾기 어려운 존재인가. 퇴근 후 잠들기 전까지 대여섯 시간 만에 모든 일을 끝내야 한다. 저녁 식사, 집안일, 독서, 운동, 공부, 가족이나 친구나 연인과 연락하기 등등. 우리는 이미 가장 어려운 난이도의 워크라이프 밸런스를 찾으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쉬운 단계에서 넘쳐나는 자유시간을 끌어안고 살다가 온 사람은 며칠 버티지 못하고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 애초에 그런 사람이 한국에 와서 지옥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되어 살 일은 무척 희박하겠지만. ―
문장 수집
22p
인간은 필멸자必滅者다. 따라서 인생의 목표는 승리가 아니다. 우아한 패배다.
산다는 일은 그냥 사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수혜자이자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삶이란 사태를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읽고 쓴다.
모든 삶에는 '죽음'이라는 공평한 운명의 말로가 있다. 부유한 자는 죽을 때까지 배가 부르고 병에 걸려도 오랫동안 살 수 있다는 점, 가난한 자는 죽을 때까지 배를 곪고 백신 한 번에 치료할 수 있는 병에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평생 좁혀지지 않을 불공평이 존재한다. 다만 죽음 그 자체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구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인간이라도 신체의 모든 액체를 빼내어 냉동시키지 않는 이상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애초에 냉동인간도 일종의 죽음이 아닌가 싶지만.
길고 긴 낮이 다 지나고 비로소 서서히 해가 저물며 죽음이라는 밤의 시간이 찾아올 때, 나의 세상을 가득 뒤덮을 노을빛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온몸으로 만끽하며 ― 이왕이면 여유롭게 감상까지 하면서 ― 태양과 함께 저물고 싶다. 밤을 향한 두려움이 지나간 낮을 향한 애정을 넘을 수 없도록. 남은 회한과 미련까지 노을이 모조리 삼켜 완전히 저물 때까지 말이다.
29p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 기다리는 동안 하는 일이 달라지고, 기다리는 동안 하는 일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람 인생이 달라진다. 가장 한심한 것은 남을 흠잡고 싶어서 남이 잘못하기를 기다리며 사는 인생이다.
39p
삶의 질을 측정하고 싶다면, 행복의 정도를 알고 싶다면, 근심 없이 아침 산책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라.
나는 아직 불가능하다. 삶의 질은 여전히 곱지 못하다.
45p
누가 마음속 말을 다 할 수 있는가. 하지 못한 말들은 내장 속에서 고이 썩다가 마침내 사리舍利가 된다.
51p
주말인데도 엉망으로 사는 데 실패해서 우울한 저녁.
주말이지만 독서도 하고, 운동도 하고, 영어공부도 하고, 필사도 하고,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새로운 지식을 얻어야만 속이 후련해지는 나는 언제부터 '주말을 엉망으로 살 자유'를 잃었을까?
71p
냉장고는 음식이 가장 썩기 좋은 곳이다. 거기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썩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90p
많은 순간이 고통스럽지만, 그간 열심히 고쳐왔다고 생각하던 자기 단점을 다시 발견할 때 특히 그렇다.
116p
비판적인 것과 시니컬한 것은 다르다. 얼마든지 삶을 비판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노예가 족쇄를 사랑하듯 삶을 사랑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늘 긍정일 수 없고, 어찌 보면 그리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때로는 발칙하고 야비하다. 삶을 비판적으로 사랑할 수도 있겠구나. 아름답고 순수한 면만 찾으며 바라보는 것이 사랑의 정석은 아니겠구나. 나의 삶에는 고통과 괴로움이 무수하고, 나는 그 속에서도 삶을 줄곧 사랑하고 경멸한다. 그 자체도 애틋함이 될 수 있을까?
119p
세상에는 엉터리가 많고, 생을 유한하며, 마음은 가난하다. 그래도 가야 할 길을 가는 것이다.
157p
많은 이가 자의적 판단을 사려 깊은 판단이라고 착각한다.
182p
다들 강해지고 싶어 하지 않나. 강해지는 좋은 방법은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다. 강해진 다음에 상대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용서함으로써 강해진다.
나는 '용서는 최고의 복수다'와 '복수는 최고의 용서다' 사이에서 줄넘기를 하며 산다.
214p
여행이란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다는 마음과,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낳은 자식이다.
지금의 나는 독신주의이므로, 그곳까지 가서 형체도 말도 없는 자식을 만나고 오겠다.
246p
육체적 폐활량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신적 폐활량도 그만큼 중요하다.
내가 남기는 가벼운 고백
나와 마음의 결이 너무나도 다른 사람은 때로 당혹스럽다. 이를 테면 사람은 퍼즐 조각이다. 맞지 않은 사람과는 어떻게 해도 같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