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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Nov 25. 2021

2년 6개월의 노력과 결과는 의외로 무관계했다.

부담감에 짓눌려 나를 잃고 싶지 않았다


지나온 시간에 붙들려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에서 주저앉지 않기를.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과 수석으로 장학생이 되어 장학금을 받았다. 중학교 졸업 내신이 180점대로 과에서 가장 높았다.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다. 시험공부를 한 기억도 없고, 시험 점수가 별로 높은 것도 아니었는데. 타 중학교에 비해 수행평가 점수 비중이 컸고, 나는 지필평가보다 수행평가에 훨씬 매달렸던 덕분이 아니었을까 예상할 뿐이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우등생이 되었고, 마지막 학창 시절은 열심히 보내자는 마음으로 최대한 열심히 성실한 학생으로 지냈다.


1학년 때부터 3학년이 된 지금까지 금융 동아리 학생이었다. 고민한다면 더 나은 선택지를 찾을 수 있을까?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실 처음에는 금융이 뭔지도 몰랐다. 상업 고등학교를 나온 형제가 일찍 취업했기에 '저 동아리는 취업하는 동아리인가?' 하는 마음에 담임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지. 전교 엘리트 학생을 죄다 모아둔 것 같았던 동아리는 당시 전교에서 은행, 대기업 등 가장 우수한 취업처에 학생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동아리였다. 그 속에서 무려 10명이 넘는 3학년 선배를 두었던 햇병아리는 눈칫밥 먹으며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학생들보다 몇십 분은 일찍 등교해서 모였던 동아리실. 아침마다 경제 기사를 읽고 나누었던 회의. 교복을 입고 단체로 갔던 금융사 박물관. 멋진 아우라를 풍기던 선배 언니들. 이제 막 고등학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니던 나는 모든 게 무서웠다. 한없이 작은 나에 비해 모든 게 지나치게 거대했다.


진짜 문제는 2학년이 되면서 조금씩 다가왔다. 담당 선생님의 압박이 파도처럼 내 발치까지 쓸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님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소 강압적이고 결과를 중시하는 성향이 나와 맞지 않았을 뿐, 선생님은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하셨다. 하나같이 우등생으로 통하는 금융 동아리 부원들을 금융이나 대기업에 취업시키는 것. 선생님이 이루려고 하신 것은 단지 그뿐이었다. 학생들을 괴롭게 할 의도는 없었으리라…고 믿는다.




함부로 최선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는 힘들다. 그래도 2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했다고는 생각한다. 12년 학생 인생을 통틀어 가장 학교에 오래 남았다. 학교가 문을 닫는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동아리실에서 나오기도 했다. 현재 정시 퇴근 시간인 오후 6시보다 무려 3시간이나 더 늦은 시간이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 시간 동안 학교에 남아있었던 걸까. 사실 공부하는 척 딴짓을 했던 시간이 훨씬 많긴 하다. 공부하는 척 연기하며 무의미하게 보낸 시간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 굳이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지.


가장 많이 공부하기도 했고, 가장 진지한 태도로 임하기도 했다. 70여 명의 과 학생 중에서 시험 성적도 매번 10등 안에 들었다. 모 신문사의 학생기자로 활동하면서 전국 최우수 기자상을 받기도 했다.―다만 이건 다른 기자들이 기사를 많이 쓰지 않아 내가 쓴 기사가 자주 기재될 수밖에 없었다.― 무려 240만 원의 외부 장학금을 받기도 했고, 교내 자격증 취득 우수학생으로 선정되었고, 3년 동안 교내외에서 이런저런 상도 많이 받았다. 교감 선생님께 "너는 성실하고 올바른 학생이니 너를 믿는다"라는 말까지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누군가의 커다란 기대주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이상했다.


하지만 기대치는 지나치게 높은 곳에 있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에 올라가기 위해 꾸역꾸역 준비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과정이 어떻든 아무 소용없다는 말. 모든 게 당연한 것이 되고 무의미한 과정으로 길바닥에 떨어지는 모습.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인해 억지로 달리는 길. 내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광경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부담감에 짓눌려 몸이 점점 휘어지는 걸 느꼈다. 이 상태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망설임 끝에 일어났다.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라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내가 갈 수 있는 길에서 시작해 천천히 과정을 밟아가는 게 중요한 것이었다. 도전의 실패는 내 삶의 실패를 뜻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는 모두 스스로가 원하는 답을 안다. 다만 그것을 찾기까지 힘든 시간과 갈등을 겪어야 하기에 답을 찾아가는 길을 두려워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믿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찾아내려 했고 그건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예정이다. 밑바닥에 침잠한 자신감과 희망을 긁어 모아 힘껏 끌어안았다. 어차피 모든 순간은 새로운 시작이고 상상한 것 이상으로 괴로울 테니까. 지금까지의 노력이 아깝다며 낡은 밧줄을 억지로 붙잡고 있는 건 나를 괴로운 늪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걸 열아홉이 된 후에 깨달았다.




당장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1년 후에는 지금의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막연한 상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내가 향하는 길만이 나의 길이 되고 인생이 되더라. 살아온 인생은 짧지만, 그 미미한 시간을 살면서도 느꼈다. 갑자기 멋진 헬리콥터가 나타나 오솔길을 걷던 나를 도시 번화가 한복판으로 데려다 주지는 않는다는 걸. 어떻게든 모든 길이 서로 이어져 있으니 나는 천천히 길을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느낀 후로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2년 6개월의 노력과 결과는 의외로 무관계했다. 누군가는 그동안 나의 노력이 아깝지 않느냐 했지만, 나로선 그다지 아쉬울 것도 없다. 어쨌든 그 힘든 시간을 거쳤기에 지금의 내가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었을 테니까. 괴로운 세상에서도 배울 점은 분명히 존재하고 성장할 기회도 있다. 그러나 부담과 압박에 짓눌려 거짓된 모습으로 살고 싶진 않았다.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는 반드시 벗어나야겠다는 걸 느꼈다.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을 거친 누군가가 분명 존재하리라 확신한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과 정성을 들인 것에 애정과 의심을 가지기 마련이니까. 그만큼 포기하기 힘든 게 있다. 만약 나의 소중한 사람이 어느 순간 너무 커져버린 노력에 잡아먹힌다면, 나는 그걸 부여잡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노력과 결과는 의외로 무관할 때가 많고, 냉정하리만큼 고요한 결과는 성공과 실패의 결정을 내리지 않으니까. 결과는 지금의 나를 예전의 나보다 더 단단하고 유연한 존재로 만들어 줄 테니, 지나온 시간에 붙들려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외면하고 주저앉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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