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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Nov 21. 2021

고민한다면 더 나은 선택지를 찾을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은 인생을 살 필요가 있으니까


겁이 많다. 두려움에 민감하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다. 선천적으로 이렇게 태어났는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키워낸 세상과 환경이 이렇게 만들었는지.


솔직하지 못한 겁쟁이에게는 특징이 있다.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고, 감정에 늘 기복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 과정과 결과는 좋지 않은 게 뻔히 보이는데 원인은 보이지 않으니 우선 나를 자책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채워 넣을 생각은 하지 않고 긁어내기만 한다. 그러면 속이 더 편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 더 나은 선택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처럼.


나는 언제나 고민했으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언가를 선택하려면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포기가 두려웠다. 포기해야 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서, 포기하고 싶은 것도 포기하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았다. 이 얼마나 바보 같은 악순환인가. 포기하지 못하는 건 욕심이 아니었다. 모든 걸 가지고 싶은 욕심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다. 나는 포기함으로써 나에게 오는 악영향이 두려웠다.




한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언젠가 브런치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나는 금융 동아리 소속이었다. 학교의 엘리트라고 불리는 학생들―나를 제외한 대부분 학생들이 정말 학교 최고 우등생이었다.―이 모인 동아리. 그만큼 부담감은 클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나는 딱히 금융업계를 희망하지도 않는 사람이었기에 더욱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3학년이 되고 나서는 압박감이 심해졌다. 동아리 담당 선생님께서는 늘 학생들에게 은행에 취업해야 한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에게는 무조건 대기업에 가야 한다며 수없이 당부하셨다. 그것을 위해 학교 수업이 끝나고도 저녁 9시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목표 의식이 강렬하지도 않고 어떤 일이든 미적지근하게 대하는 나에게 대기업 입사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나보다 수십 배를 노력하는 우수한 인재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은데. 합격은 고사하고 필기시험을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느끼던 나였다. 설령 대기업에 들어갔다고 한들 나의 그릇과 맞지 않는 책임감이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능력을 비하하거나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짓은 아니다. 객관적인 상황이나 내가 원하는 삶의 방향을 고려했을 때, 누구나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은 애당초 내가 열정을 불태울 정도로 간절하지 않았을 뿐이다.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건 돈도 명예도 안정적인 직장생활도 아닌 '성장'과 '선택'이다. 내가 스스로 갈림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삶. 그렇기에 사람으로서, 사회인으로서, 친구로서, 형제로서, 자식으로서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삶. 나라는 사람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는 그것이었다.


하지만 현실 속 세상은 나의 꿈과 목표를 이루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 당시 내 눈앞에 놓였던 문제는 '어떻게 해야 이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였다. 원래 삶이란 내 마음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정답 따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도 감당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건 너무 심하다는 감각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때의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포기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미약하게나마 누구나 부러워하는 연봉 좋고 복지 좋은 대기업 사원이라는 이름―하지만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내 꼴을 보니, 천운으로 대기업에 입사했다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이었고, 두 번째는 동아리 담당 선생님의 분노와 실망이었다. 두려움에 쫓겨 도전 한 번 못하고 도망치는 나를 향한 괴로움도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님께 '대기업 채용에 지원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라는 메시지 한 번 보내기가 그렇게 두려웠다. 마치 회사 대표에게 퇴사 의지를 밝히는 것처럼. 그러나 몇 개월이나 고민하며 끙끙 앓던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채용 연계를 통해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실습생으로 들어온 사실을 선생님께 메시지로 알리자, 돌아온 답변은 '그래. 합격 축하한다. 열심히 해라.' 정도의 싱거운 텍스트였다. 이럴 거면 뭐하러 그렇게 고민하고 괴로워하고 두려워했던가. 후련함과 허탈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어쨌든 이미 선택의 끈은 내 손을 떠난 뒤였다.




'다른 애들은 다 잘 버티고 있는데 왜 나만 이러지?', '이 정도도 못 버티고 떨어져 나가면 나중에 무언가를 위해 도전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매일 둥실둥실 떠다녔다. 불안을 안고 책을 펼치거나 SNS에 들어가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어릴 때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후회하기 전에 도전해야 한다. 생각이 길수록 용기는 사라질 뿐이다. 누구에게도 정답은 없다. 나에게도 정답은 없었다. 반드시 감당해야 하는 일도 없었다. 원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 원하지 않는 고난을 겪어야 했을 뿐.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원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은 것을 어설프게 쥐고 괴로워할 바에는, 차라리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고. 그래서 가지게 된 이름이 '중소기업 말단 고졸 사원'이다. 사실 아직 정직원으로 전환되지도 않았으니 '중소기업 말단 현장 실습생'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 더 나은 선택지를 찾고 있다. 나는 지금 막 시작점에서 발을 뗀 사람이고, 어떤 압박과 두려움도 내 곁에 평생 머무르지는 못한다. 끊어내고 싶다면 끊어낼 수 있다. 이미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곳은 아무리 나아진다고 한들 근본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학교든 회사든 가정이든, 어떤 무리든 마찬가지다. 같은 조직이라도 결국 제각자의 인생을 사는 타인이므로. 타인을 위해 나를 희생하는 일은 세상을 구하는 영웅과 세상을 바꾸는 천재들에게 비겁하게 떠넘기겠다. 나는 나를 위해 선택하고 타인을 포기하기로 했다.


고민만 해서는 더 나은 선택지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조금씩 느낀다. 지금 당장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어도, 지금 이 자리에 책임감을 가지는 동시에 다음 그 자리를 위한 준비를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언젠가 나를 위한 선택을 실행할 수 있을 테지. 월급이나 돈을 조금씩 모아 자본을 마련하거나, 공부를 통해 다른 분야로 나아갈 준비를 하거나, 꾸준한 운동으로 체력과 근력을 키우거나,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거나. 뭐든 정답은 없으니 말이다.


어떤 가정에서 어떤 성격으로 태어나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랐든, 이왕 태어났다면 최대한 나를 위한 삶을 만들어야 좋지 않을까. 내가 태어난 이유는 없지만 내가 행복해야 할 이유는 있다. 불행하면 하루하루가 너무 아파서. 후회가 없을 수 없는 인생이라도 태어남을 후회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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