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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Dec 12. 2021

냄새에서 삶을 느끼곤 한다.

향은 기억을 마음에 새기는 흔적이 아닐까


나의 어린 시절을 책임졌던 많은 애니메이션 중 하나. <짱구는 못말려>라는 만화가 있다. 아마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 어린 자녀를 두었던 어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렸을 때 나에겐 스마트폰이라는 현대 사회 최고의 문물이 없었기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늦게까지 TV로 만화를 보곤 했다. 그중 하나가 짱구였다. 당연히 극장판도 많이 봤다. 정말 많은 극장판을 재미있게 봤지만,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짱구 극장판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 있다. 바로 2008년에 한국에서 방영한 9기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이다.


보통 만화라고 하면 마냥 유치하고 어린아이들을 위해서만 만들어진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내용을 자세히 뜯어보면 어린아이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어른만이 알 수 있는 메시지가 숨겨져 있는 경우도 많다. 어른제국의 역습 또한 '어른을 위한 만화'로 유명하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날 갑자기 어른들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부모는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직장인은 회사에 나가지 않고, 마치 아이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부모님 세대 어른들이 즐겨했던 깡통차기, 고무줄놀이부터 나도 어린 시절에 신나게 했었던 술래잡기, 숨바꼭질, 딱지치기 등등. 당연히 주인공 짱구를 비롯한 아이들은 갑자기 변해가는 부모님과 어른들의 모습을 무서워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수십 대의 트럭이 나타난다. 그리고 마을 어른들은 모두 신난 아이처럼 달려가 트럭 짐칸에 올라탄다. 기본적으로 코믹한 만화이기에 밝은 분위기로 묘사되었으나, 모든 어른이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의 아이들처럼 해맑게 웃으며 떠나가는 장면은 제법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모든 어른'이 사라진 마을에 남은 아이들은 하염없이 부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역시 주인공 짱구와 친구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직접 부모님을 찾아가기로 한다. 어른들이 떠나가 버린 '20세기 박물관'으로.


그렇게 아이들과 주인공 짱구 가족은 이런저런 위기를 넘기고 많은 사건을 겪는다. 역시 결말은 해피 엔딩이다. 세상을 20세기로 돌려놓으려 했던 악당들은 작전을 포기하고,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이 살아가던 현재로 돌아온다.


얼핏 보면 흔한 스토리다. 악당으로 인해 세상이 위험에 처하고, 주인공은 갖은 고난 끝에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은 평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어른제국의 역습은 이런 보편적인 만화 스토리를 아주 탄탄하게 구성했다. 주제부터 스토리 전개, 연출과 캐릭터, 현실 고찰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았다. 특히 '행복과 희망을 기대했었던 과거와 불행하고 삭막한 현재'를 초점으로 맞춘 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마음을 빼앗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어른제국의 역습에서는 모든 어른의 정신이 순수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데, 그 원인은 바로 '냄새'다. 그 시절에만 존재했던 정겨운 냄새를 맡고 마음이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들지만, 만화적 설정이기도 하고 단순히 냄새만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기에 이 점은 가볍게 넘어가도록 하겠다.


냄새는 이 극장판에서 수시로 나오는 요소다. 어른들이 옛 시절 기억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도 냄새, 그들이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이유도 냄새다. 짱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아버지의 정신을 되돌려 놓은 방법도 지독하기로 유명한 아버지의 발냄새를 다시 맡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나온 노래와 장면이 그 유명한 '히로시―짱구 아빠 신형만의 일본 원작 이름―의 회상'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학생 시절, 성인이 되어 회사를 다니고 지금의 아내를 만나 자식들이 태어날 때까지. 과거의 냄새를 맡아 과거로 돌아갔던 것처럼, 현재의 냄새를 맡아 현재의 기억을 떠올리고 현재로 돌아온 신형만이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끌어안는 장면은 저절로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냄새'에 관해 자주 생각했었다. 그저 후각 세포와 반응하여 편안함이나 불쾌감 같은 감정을 일으키는 자극만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냄새는 어느 특정한 시간이나 순간, 공간, 시절, 찰나의 기억을 마음에 새기는 흔적이 아닐까 싶다. 머리로 떠올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는 아주 깊은 무의식처럼.


다들 한 번쯤은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익숙한 멜로디에 '어, 이 노래 어디에서 들어봤더라?' 하며 고민한 경험. 아니면 오랜만에 들은 노래에 저절로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른 경험. 나에게는 냄새도 그렇다. 분명 맡아봤던 냄새인데 언제 어디에서 느낀 향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따금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히곤 한다. 평생 잊은 채 살아왔던 어느 소중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듯이.


출근길 지하철, 평소처럼 6호선에 올라탔는데 갑자기 몹시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쳐 순식간에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처음에는 에프킬라 냄새인가 싶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몇 초 지나니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께서 쓰시던 향수 향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종국에는 지나치게 상냥하고 신선한 비누 냄새가 되어 내 곁을 맴돌았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사무쳤다. 어렸을 때 이종사촌 형제자매들과 신나게 뛰놀던 외조부모님 댁의 마당과 넓은 운동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처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속 어딘가에서 아른거렸다.


나에게 냄새란 기억을 새기는 메시지 같다. 좋은 기억 속에 머무르는 냄새는 언제 어디에서든 나를 감싸주고, 나쁜 기억 속에 머무르는 냄새는 갑자기 불쑥 나타나 나를 사정없이 찌르고 사라진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만 가지의 냄새는 짧은 순간이 모여 만들어진 나의 삶을 길목마다 표시해주는 흔적이 바로 냄새가 아닐까.


아주 길지만 결국 한순간에 지나지 않을 인생이 흐를 동안, 수많은 생애 길목마다 좋은 냄새를 남겨두고 싶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한 가지 향을 따뜻하고 좋은 냄새라고 기억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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