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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Aug 07. 2022

꿈을 꾸고 싶다.

헛된 생각으로 버려진다고 해도


꿈.

참 아이러니한 단어 같다.


꿈은 매일 밤 나와 함께 한다. 무의식에 빠진 나는 온몸의 근육이 풀리고 정신이 완전히 물속으로 잠기는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보고 듣고 느낀다.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 괴물이 시간을 잡아먹은 것처럼. 꿈의 마지막은 오늘 처음 태어난 하루의 시작이다. 나는 항상 꿈을 꾸는 편이다. 다만 연결고리와 단면을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꿈을 선명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를 살아가게 하면서도 좌절시키고, 어느 날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가 어느 날에는 불현듯 텅 빈 백지였던 마음을 온갖 무늬와 색깔로 물들이는 존재. 언제부턴가 꿈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꿈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상과 낭만을 향한 강요 또는 헛된 희망으로 치부하는 분위기도 강해졌다. 꿈은 거창해야 하는 것도 소박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꿈이 있든 없든 삶은 이어지고, 모두 각자가 주인공이자 화자이자 작가이자 해설가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어릴 때는 꿈이라는 재료가 직업이라는 요리로만 탄생했었다. 수업시간마다 꿈을 적어보라고 하면 의사, 과학자, 만화가 등의 단어를 적었기에 자연스럽게 뇌리에 박힌 공식이었다. 나의 궁극적인 꿈을 직업으로 친다면 아마 작가(作家)일 것이다. 어설픈 솜씨로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며 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작가 말이다. 실용·실질·실리적인 현실에는 도저히 재미를 붙일 수가 없다. 경제에 관심이라곤 하나도 없는 내가 고등학교 3년 내내 금융 관련 동아리에서 활동한 게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사실 활동했다기보다는 동아리에서 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해 어영부영 끌려다니거나 버텼다는 표현이 훨씬 적절하겠지만.


정확하게는 '예술가'가 꿈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과자 부스러기만도 못한 재능과 열정을 긁어 모아 경제적 독립과 금전적 여유를 팔고 진정한 삶의 방향과 이야기를 찾는 꿈―이라고 쓰긴 했지만, 이런 표현 자체가 어설픈 낭만이 덕지덕지 붙은 말이다.―은 '나'라는 사람을 이루는 물질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물론 돈 많이 벌고 이름 유명한 작가도 많이 존재한다. 그곳에 내 이름이 없을 확률이 거의 99.9%에 다다를 뿐이지. 작가라는 단어를 넓게 본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작가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하루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자신만의 것을 창작하며 사는 게 사람이니까.


작가와 예술가와 창작가. 직업으로 한정했을 때의 꿈은 모호한 경계를 넘나들며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요즘 초등학생의 1등 꿈이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말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나이, 성별, 인종, 출신 등에 제약이 없고 자유로운 창작과 수익 창출이 가능한 직업이라는 걸 생각하면 초등학생을 비롯한 어린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나이 상당히 먹은 성인들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 목록 중 하나로 우뚝 설 만하다.


나는 꿈을 꾸고 싶었고, 언제나 꿈을 꾸고 있다. 어떤 하루에는 아무런 꿈이 없다가도 어떤 날에는 두 손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꿈이 비눗방울처럼 퐁퐁 피어난다.


찬란한 미래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20살 어린 청춘.

나는 꿈도 낭만도 참 많다.





20살의 내가 쓰는 꿈 목록


꿈이란 건 이루고 싶은 소원이고 소망이다. 필수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나 이루고 싶은 것이나 목표 또는 목적으로 두는 무언가가 아무것도 없으면 인생을 항해하는 길이 제법 험난해질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사람의 삶에 방황과 배회가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아주 사소하거나 거창한 일이라도 꿈은 누구에게나 존재할 수 있고 또한 누구든 가질 수 있으니까.


지금 나에게 늦은 꿈은 뽀로로 성우와 아동복 전용 모델밖에 없다.




첫 번째 꿈, 책 출간하기.


작가를 꿈으로 삼은 사람이니, 한 권의 책이라도 출판사를 통해 정식 출간하는 것이 곧 꿈이다. 본명을 달고 책을 출판하기에는 부끄러운 점이 많지만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살아온 나의 세 글자 이름이 책 표지에 박혀있지 않는다면 허전한 마음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책이든 상관은 없다. 시집, 소설책, 산문집, 에세이 등등. 브런치 작가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는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도 있으니 마냥 멀기만 한 꿈은 아니다.


다만 나 스스로도 내가 어떤 글을 써야 좋을지, 어떤 책을 내고 싶은지 정확한 생각이나 마땅한 계획이 없어 지금 당장 실현시킬 수 있는 꿈은 아니다. 만약 지금 당장 책을 만들어 판매할 수 있다고 해도, 어설픈 글로 어영부영 책을 낸다면 오히려 수치스러울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내가 쓴 글을 잘 읽지 못한다. 작가라는 꿈을 가졌으면서 정작 나의 작품을 제대로 분석하거나 감상조차 하지 못한다니. 아주 치명적인 단점이다. 책을 출간하기 전에 내가 나의 글에 조금 더 확신을 가지고 사랑할 준비가 먼저 필요하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단순히 '글을 쓰고 싶다'나 '책을 팔아서 돈을 벌고 싶다' 정도의 단면적인 이유에서 그치지 않는다. 글을 쓰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구도 있지만, 나는 글이라는 매개체가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안다. 몇 마디 문장과 몇 장의 글. 그것을 통해 우리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삶 일부분을, 그 사람이 간직하며 살고 있는 가치관과 사상을, 그 사람이 느끼는 수많은 감정과 복합적인 생각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고 듣고 만지고 공유할 수 있다. 당장 이 글만 해도 그렇다. 이 글을 쓰는 나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서로 이름도 얼굴도 사는 곳도 모를뿐더러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럼에도 각자의 삶에 존재하는 감상과 사연과 기억을 나눌 수 있다.


책과 글을 읽는 순간에는, 내가 모르고 살았던 어떤 사람의 마음에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처음 보는 모양과 색깔을 가진 문에 살며시 노크를 한다. 어떤 방은 나의 방과 상당히 비슷한 분위기를 가졌고, 그다음 방은 나의 방과 인테리어부터 가구 배치까지 모든 게 다르다. 방 하나하나를 살피고 글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건 언제든 떨리고 설레는 일이다.


방은 그 사람의 마음을 나타내는 일부분이다.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한다는 건 나의 방을 깨끗하게 정리한 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일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는 내면의 가장 깊은 곳부터 어둡고 밝은 곳, 어지러운 곳과 깨끗하고 차분한 곳을 긁어 모아 담아낸 책을 아주 소심하고 쓰라리게 세상에 던지고 싶다.




두 번째 꿈, 작은 텃밭 가꾸기.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에게 농사나 밭일은 상당히 거리가 먼 일이다. 드넓은 논과 밭은 차를 타고 몇 시간을 달려야 다다르는 시골집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고,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산이나 들판보다는 놀이터와 학교 운동장에서 뛰놀던 기억이 많다. 농작물을 가까이에서 보고 키울 기회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농작물을 키워본 경험은 중학교 때 필수 과목으로 배웠던 과학 시간과 기술·가정―이하 기가― 시간이다. 아마 중학교 1학년 때는 텃밭 시간이 과학 시간의 일부분이었다가 2학년 때 기가 시간으로 넘어왔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게 오래된 과거가 아닌데도 영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텃밭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모두 체육복 바지를 입고 목장갑을 낀 채 운동장 구석에 있는 텃밭으로 향했다. 농작물에 물을 주고, 북주기를 하고, 곁순을 따고, 익은 열매는 썩기 전에 따서 가져오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우리 반 텃밭은 그늘이 드리우지 않는 곳이었기에 한여름이면 살벌한 땡볕 아래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농작물을 돌봐야 했다.


텃밭이라고 해봤자 조별로 나누어진 면적은 작았다. 그만큼 심어진 농작물도 기껏해야 상추, 감자, 고추, 방울토마토 정도가 전부였는데, 당시에는 그 작은 텃밭조차 제대로 가꾸기가 힘들었다. 작물을 정성스럽게 돌보고 싶다는 마음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다. 억지로 하는 수업이었으니 재미도 없었다. 텃밭 활동이 끝나면 일지를 써서 내야 하는 것도 싫었다. 지금 텃밭 가꾸기를 시작한다면 나는 알아서 농작물에 관해 공부할 것이고, 알아서 성장 일지를 쓰고 매일 날씨와 바람을 확인하겠지. 선생님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수업 시간이 아니니까.


아주 작게나마 텃밭을 가꾸는 게 어느 순간 꿈이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방울토마토를 심어서 직접 키우고 싶다. 공간이 남는다면 감자나 상추를 심어서 훗날 토실토실 자란 작물을 부모님께 드려도 좋겠다. 움직이지 않고 말하지 않는 식물이라도, 하나를 제대로 키워내려면 많은 정성과 관심이 필요하다. 중학교 시절 키우던 작물이 여럿 죽는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키만큼 자라나는 잡초를 뽑아내며 느꼈던 점이다.


무언가를 돌보는 건 좋은 일이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쏟고 신경을 쓰는 것만으로도 거센 파도처럼 일렁이던 속이 차분해진다. 살아있는 생명이 나로 인해 성장하고, 스스로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괜히 마음이 간질간질하다. 사는 것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이따금 생명력을 다른 존재에게 전달한다. 나도 모르는 새에 길거리에 피어난 꽃을 봐도 그렇다. 언제 이렇게 꽃봉오리를 맺었지? 벌써 봄이 왔구나.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구나. 그런 것들을 알 수 있다.


작지만 정성스럽게 가꾼 텃밭에서 재배한 작물을 가까운 이들에게 대접하는 것도 하나의 꿈이다. 그만큼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을 다해 대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도 행운이니까.




세 번째 꿈, 언제든 산책할 수 있는 삶을 살기.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직장이나 돈에 얽매이지 않고 사는 인생. 하지만 나는 돈 많은 부모님을 두지 않았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만큼 막대한 유산도 없다. 죽기 직전까지도 경제적인 문제와 한계에 허덕이며 살아갈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런 현실 앞에서 안정적인 직장과 막대한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을 찾고, 누군가는 어차피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니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겠다며 과감하게 짐을 버리고 두 다리만으로 달려가기도 한다.


자유라고 하면 뭐랄까 해방이나 독립 같은 큰 규모의 단어가 떠오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갑자기 해외여행을 떠난다거나 연락을 모두 끊고 잠수를 타는 등의 과감한 행동보다는 한층 가볍다. 그저 주말이나 휴일에 천천히 공원이나 산책로를 걸을 수 있는 것. 언제든 생각을 비우고 길가에 핀 풀꽃을 보고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나에게는 진정 자유로운 삶일 것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이루기는 어렵다. 언제든 산책할 수 있다는 건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는 직장이 없어야 하니까. 프리랜서로 살거나 귀농이라도 하지 않으면 시간적 자유를 얻어내지 못한다. 많은 직장인들이 퇴사 후 창업을 꿈꾼다. 나 또한 현실을 빼고 낭만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작은 가게를 하나 차리고 싶다. 카페와 엽서 가게를 겸하는 독립 서점은 어떨까. 정말 이상적인 창업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에게는 사업 자금도, 경영 능력도, 커피를 잘 만드는 솜씨도 없다. 만약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이리라.


그렇기에 꿈이라는 것이다. 나의 하나뿐인 삶의 수많은 시간 속 언젠가는 이루고 싶은 꿈. 공원에서 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벤치에 앉아 하늘과 거리와 꽃과 풀을 사진으로 남기고 길거리에서 이따금 떠오르는 시를 끄적이고. 때로는 깊은 바다를 옆에 두고 파도를 친구 삼아 홀로 걷기도 하고.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목적지 없이 허둥거리는 발걸음이 아닌, 누구보다 여유롭고 편안한 걸음으로 세상을 걷고 싶다.


여유로운 삶. 자연과 함께하는 일상.

나의 인생이 한여름 나무처럼 푸르게 물들었으면 좋겠다.





꿈을 가지고 산다는 건


열심히 글을 썼지만 꿈은 고작 세 가지 이야기로 함축할 수 없다. 수채화 작품 하나 이상 완성하기, 피아노로 <Summer> 완곡하기, 카카오톡 이모티콘 만들기, 오로라 보기, 은하수 보기, 국내 여행 떠나기―유명한 관광지보다는 독립 서점, 독립 카페, 골목길, 자연환경 투어 위주로―나와 가치관이 비슷한 이들을 찾아 이야기 모임 만들기, 어머니와 전시회 가기, 진정한 낭만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고양이 돌보기 등등.


하고 싶은 일과 이루고 싶은 건 끝없이 증식한다. 한계 없는 욕심을 가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당장 성취할 수 있는 꿈은 많지 않다. 현실적인 상황과 나의 능력이 따라주지 않는 기준에 존재하는 꿈은 닿지 못하는 나무 열매처럼 눈앞에만 아른거린다. 너무 간절하지만 도저히 이루지 못하는 꿈은 오히려 나에게 절망과 실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꿈을 가지고 산다는 건 그만큼 삶을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일 수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꿈은 경우에 따라 무거운 짐처럼 어깨를 짓누르기도 하고, 발목에 채워진 족쇄처럼 도리어 목을 죄어오기도 한다. '나는 왜 꿈이 없을까?', '나는 어떤 꿈을 가져야 하지?', 어떤 꿈을 꾸어야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지?' 그런 걱정이 들기 시작하면 감정은 곧 자괴감으로 변질되어 내가 나 자신을 폄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간단하게, 단순하게 결정해도 된다. 꿈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없다면 하고 싶은 일을 천천히 찾아가는 게 꿈이 될 수도 있다. 크고 작은 꿈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겨나고 다시 사라진다. 어쨌든 나의 마음은 내가 가장 잘 알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진정을 바라는 '모든 것'이 꿈이 될 수 있어.

큰 꿈을 가져야 한다고? 도대체 누가 어떤 기준으로 사람의 꿈을 훌륭하고 보잘것없는 것으로 나눌 수 있겠어? 원대한 꿈을 가지면 물론 훌륭하지만, 그것이 꼭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고 할 수 없고, 소소한 꿈은 쉽게 느껴지지만, 보잘것없다고 말할 순 없어.

「꿈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고 말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해.

누구든 살아오면서 꿈은 있었어. 다만 삶에 지쳐 잠시 그 열정을 잊어버렸을 뿐이지.

- 웹툰 <방울토마토> 72화 '큰 꿈을 가져라' 中 -




꿈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뿐인 삶을 나 스스로가 얼마나 색칠하고 가꿀 수 있을지를 향한 고민이다. 인생을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윤활제이자 나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들. 만약 누군가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문장으로 당신의 궁극적인 꿈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연탄처럼 뜨거운 사람이 되어, 따스한 삶을 사는 게 꿈입니다."




뭉근하게 하루하루를 데우는 온기. 때로는 열기에 타올라 하얗게 잿더미가 되기도 하는 사람. 눈이 뒤덮은 세상을 가르는 매서운 칼바람 속에서도 편안하게 호흡하며 방바닥을 덥히는 것들. 사소한 꿈 하나하나가 모여서 나의 오늘을 만들고 내일을 만들어 간다.


별다른 미사여구 붙이지 않아도 그렇게 된다. 꿈을 가지고 산다는 건 그런 것이다. 굳이 아름답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것. 그저 삶을 꾸준히 이어나갈 원동력이 되어주는 세상의 수많은 모습과, 소원과, 소망들이다.





마음껏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을 꾼다는 것 자체가 힘겨울 때도 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 하는 일이 우선시되는 세상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해야 하는 일을 먼저 끝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밀려오는 숙제를 감당하다 보니 어느 순간 하고 싶었던 일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많이 늦어있을 때도 있다. 그때 밀려오는 후회와 허망한 두려움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 감정인가. 잃어버린 꿈을 누가 나에게 돌려주나. 결국 선택한 사람은 나라는 결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인데.


모든 꿈을 이루지는 못하겠지만, 꿈은 마음껏 가져도 되는 것이다. 꿈이라도 마음껏 꾸지 못한다면 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가질 수 있는 게 없다. 세상은 빈손으로 와서 살아온 시간만을 손에 쥐고 떠나는 곳이니까. 살아온 시간 동안 나는 꿈을 꾸고, 꿈을 이루고, 꿈을 찾으면서 뭉근하게 달아올라 겨울밤의 추위를 훈훈하게 데웠던 기억과 추억을 만들 것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계신 분이 있다면, 어떤 꿈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하다. 내일 당장이라도 이룰 수 있는 꿈도 있을 것이고,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야 겨우 이룰까 말까 한 꿈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떤 꿈이든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꿈을 가지고 살았던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으면 한다.


나는 많은 인생을 살며 연륜을 쌓은 사람도 아니고, 온갖 역경과 고난을 뚫어 태풍을 이겨낸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중언부언 이상한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을 읽음으로써 누군가는 '얼굴 한 번 마주친 적도 없는 사람의 꿈'을 알았고, 자신의 꿈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글은 충분히 의미를 가졌다. 내게 소중한 가치가 되었다. 글을 쓰는 건 아주 괴롭고 행복한 일이다. 앞으로도 끄적끄적 글을 쓰면서 살 것 같다.




저는 마음껏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꿈을 꾸는 건 그다지 아름다운 일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꿈을 한가득 안고 메마른 사막을 걷고 싶어요.


그러면 언젠가 갈증이 날 때 꿈을 열고 달콤한 물을 마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평생 이룰 수 없을 꿈이라도 괜찮아요.


꿈을 가진 것만으로도 저는 나름대로 행복했으니까요.


헛된 생각으로 치부되어 길바닥에 버려진다고 해도.


꿈을 꾸었던 나는 조금 더 다채로운 사람이 되어 있겠죠.




2021년 8월 21일 전라북도 어느 마을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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