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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Sep 12. 2022

하늘 아래 태어난 어린 개의 삶이여

너희도 자유로울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겠지.


시골집에 가면 대문에서부터 사람을 반기거나 경계하는 존재. 귀를 세우거나 꼬리를 흔들거나 거칠게 짖어대는 개는 어느 집을 가든 마당마다 반드시 살고 있다.


하지만 간혹 보기 안쓰러운 개들이 있다. 지저분한 털에 숨이 막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강하게 조여진 목줄을 하고선, 집도 없고 차가운 철창에서 갇혀 사는 개들. 많은 이들이 '가축'이라고 여기는 소나 돼지나 닭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가족이고 반려인 것처럼, 예로부터 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료였다는 개 또한 어딘가에서는 그저 가축이거나 상품이다. 물론 인간이라는 이유로 어느 생명의 무게와 가치를 함부로 매길 자격도 없지만.


애석하게도 시골 동네에는 개를 반려동물이자 가족으로 여기는 마음이 그리 강하지는 않은 듯하다. 그저 오래전부터 개를 키워왔으니 나이가 들어도 필수적으로, 또는 별다른 생각 없이 마당이 개를 한 마리씩 들이는 집이 많은 느낌이다. 나의 외조부모님 댁에도 그동안 마당에서 머물렀던 개의 역사가 있고, 어머니와 이모님들이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도 집집마다 컹컹 짖는 개들이 많다. 그들도 모두 천근의 생명과 자유로울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을 테지.


집 마당에 있는 강아지를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 이 마당에서 생을 살고 죽음을 맞이한 여러 개들이 떠오른다. 내가 머리를 쓰다듬고 이름을 불러주었던 강아지들. 사람을 보면 꼬리를 흔들고 혀를 내밀며 헥헥거리던 그 맑은 눈동자들이 말이다.





그 마당에 있던 강아지들


어렸을 때는 마당에 '방울'이라는 강아지가 있었다. 흔히 '시고르자브종'이라 불리는 진돗개나 풍산개의 생김새와는 사뭇 다른 아이였다. 작은 몸집과 복슬복슬한 털이 포메라니안과 비슷한 강아지였고, 대문 앞에 집이 있었다. 사람이 다가오면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반기던 강아지. 어린 사촌동생들과 다가가면 매번 머리를 쓰다듬어줬는데,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방울이가 죽기 전에 그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에서 눈물 한 방울을 툭 흘렸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한다. 방울이는 그렇게 눈물방울 흘린 채 방울방울 떠났다.


방울이가 떠난 후에 마당으로 들어온 두 마리의 개는 모두 진돗개 또는 풍산개처럼 보였다. 쫑긋 솟은 귀에 기다란 주둥이와 커다란 몸집. 갈색 털을 가진 수컷의 이름은 '진돌'이 흰색 털을 가진 암컷의 이름은 '진순'이었는데, 어느 날 진돌이가 개장수의 손에 이끌려 사라진 후―나의 외조부모님 댁 동네에는 아직 개장수가 종종 돌아다닌다.― 진순이는 한동안 잔뜩 겁에 질려 집안에서 나오질 않았었다. 사촌동생들과 진순이 집 앞에서 이름을 불러도 안쪽에 바짝 붙어 덜덜 떨기만 했다.


몇 년이 지난 뒤 진순이는 조금씩 활기를 되찾았고, 그 뒤로 새끼를 두 번이나 낳았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세 번이라고 하지만 내가 너무 어렸을 때였는지 첫 번째로 낳은 새끼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낳은 새끼들은 각자 흰색 털, 까만색 털, 갈색 털을 가진 다채로운 강아지들이었고 세 번째로 낳은 새끼들은 모두 흰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태어나 털이 조금씩 자라고 낑낑거리며 기어 다니고 눈을 뜨기 시작할 때가 어찌나 귀여운지. 외조부모님 댁에서 머물렀던 그 며칠 동안 진순이의 새끼들은 내 핸드폰 갤러리에 잔뜩 담겼고, 갓 태어났을 때부터 사람 손을 탔다.


그러다가 진순이마저 개장수의 손에 사라지고―당시 외할머니를 향한 이모님들의 반발이 엄청났었다.― 혼자 남겨진 진순이의 자식 '진선'이는 강아지보다는 개에 가까워진 모습을 하고 한동안 사라진 엄마를 찾으며 낑낑거렸다. 지금은 불과 1년 전보다 10배는 더 커진 몸집으로 힘차게 뛰어다니며 제 엄마와 똑 닮은 모습을 하고 있다. 아직 어려서 기운이 펄펄 넘치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부터 보고 돌본 아이여서 그런지 유독 정이 가는 강아지다.


하지만 이따금 안쓰럽다. 온전한 사랑을 받으며 매일 산책을 가고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다른 반려견들과 달리, 진선이는 매일 좁은 울타리와 개집에 갇혀 하루의 대부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진선이도 날 때부터 곁에 있었던 엄마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해할까?


진선이는 커다란 몸집과 넘치는 힘과 천방지축 성격 때문에 할머니께서 매일 산책을 하실 수도 없고, 혹여나 밖에서 새끼라도 배고 올까 불안해서 자주 풀어주지도 못하고―이따금 문을 열어주면 마당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가족들이 캠핑을 떠나거나 외출할 때도 진선이는 통제하기 어려운 만큼 함께 갈 수 없다. 답답하게 옥죄는 목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이 다가올 때마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면서 놀아달라, 나가게 해 달라 보채는 소리를 내는 어린 강아지가 어찌 안쓰럽지 않을 수 있을까.


외조부모님 댁의 집 마당은 지금껏 이 마당에 머물렀던 많은 강아지들의 터였고, 흔적과 냄새가 여전히 남은 곳이다. 어쩌면 한 자리에 머무르는 강아지들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선택할 수 없는 삶의 최선


인간은 지구상 먹이 사슬 최상위권에 군림하는 고지능과 지성체 동물이고, 나 또한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이것은 자의로 선택하고 결정한 일이 아니다. 외조부모님 댁 앞마당을 지켜주었던 방울이, 진돌이와 진순이, 진선이와 진선이의 형제자매들 역시 개로 태어나고 싶어서 개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그렇다. 눈을 떠보니 그저 그렇게 태어났고, 그래서 태어난 대로 살아간다.


인간인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개, 특히 태어났을 때부터 봤던 앞마당 진선이는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진순이는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고 얌전한 성격이었다고 하지만, 진선이는 워낙 쾌활한 성격에 사람이 다가오면 혹여 울타리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이리저리 날뛴다. 문이 열리고 마당으로 나오면 얼마나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는지 알기 때문이겠지. 진선이는 흙과 풀 냄새를 맡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람 앞을 알짱거리며 놀아달라 보챈다. 여느 반려견처럼 산책을 나가고 다른 강아지를 만나 놀 수도 있다면 진선이의 견생은 훨씬 윤택하고 행복해질 텐데.


그러나 이런 얄팍한 연민과 동정심은 인간인 나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일 뿐이다. 진선이를 책임질 수도 없고, 매일 예뻐하며 산책을 나가지도 못하는 나는 감히 다른 존재의 삶을 마음대로 단정 지을 자격이 없다. 사람을 좋아하고 장난치기를 즐기고 활력이 넘치는 진선이는 그저 태어난 대로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어쩌면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고단한 나보다도 훨씬 좋은 생을 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늘 아래 태어난 강아지와 어린 개들. 부드러운 털과 버둥거리는 팔다리와 숨을 쉴 때마다 쉬지 않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를 가지고 태어난 수많은 생명들. 나는 그저 태어난 자신의 생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사는 진선이와 다른 강아지들이 나의 삶보다 낫다고 느낀다.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은 끝내 최선을 다해서 살 수밖에 없으니까. 다만 그 '최선'이 아등바등 틈 없이 빽빽하게 사는 삶을 뜻하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여유로운 속력으로, 남들보다 몇 걸음은 뒤에서 걸어가는 느린 삶을 살고 싶다.


하늘 아래에서 형제들과 함께 태어난 강아지들. 언젠가 늠름한 개로 장성할 그 아이들도 누구나처럼 자유로울 자유를 가지고 태어났겠지.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 자유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할 따름이다.


아니다. 애초에 나 자신의 삶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인간으로서의 죄책감이니 뭐니,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오만이겠구나. 이 세상 모든 생명체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책임감조차 버거워 자꾸만 휘청거린다. 부끄럽다.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에게 사랑받고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잠들었던 진선이가 행복하기만을 바란다.




천사가 따로 없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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