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야사 Jul 20. 2022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생각한다.

백 걸음 중 한 걸음만 움직인 것이라고 해도


요즘 들어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가 있다. 아마 모두가 예상하고 있을 바로 그 화제의 드라마. 평균 시청률이 1% 미만이었다던 신생 케이블 채널 ENA에서 무려 시청률 10%를 돌파하고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말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스퍼거 증후군와 초인적인 암기력을 가진 주인공 우영우. 우영우는 자폐성 장애 판정을 받은 다섯 살 때 아버지 우광호가 가지고 있던 법학 책을 모조리 외우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봤던 모든 책 내용을 전부 기억하며, 서울대학교와 대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된 인물이다. 아마 우영우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이었다면 천재도 그런 천재가 없다며 크게 감탄했을 것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화제성만큼이나 이런저런 말에 휩싸인 드라마이기도 하다. 특히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핵심 주제이기도 한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관한 대중의 반응은 고작 서너 가지 유형으로는 나눌 수 없을 만큼 다양한데, 이 역시도 대중매체에 아주 흔하게 노출되어 사는 우리가 고민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비자폐인이고, 가족과 친구 중에서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은 없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엔 너무나도 무지하다. 그렇기에 어떤 말이든 함부로 내뱉을 수가 없다. 단순히 자폐 스펙트럼 장애뿐만 아니라 지체 장애, 발달 장애, 정신적 질환, 성(姓), 종교, 법, 정치, 전통 등 많은 분야에서 그렇다. 내 생각이 정답인 것마냥 떠벌일 수 없다. 이야기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러므로 이 글은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미있게 시청하는 어떤 사람이,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관하여 생각하고 혼자 끄적이는 글이다. 결코 정답도 오답도 없다.





Chapter 1 _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른 존재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처음인 것은 아니다. 특히 영화와 드라마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2005년에 개봉한 영화 <말아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마라토너 '윤초원'과 그의 어머니 '경숙'의 이야기를 담았고, 2013년에 방영한 드라마 <굿 닥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와 서번트 증후군을 가진 의사 '박시온'의 이야기를 담은 의학 드라마이다.


집에서 드라마 <굿 닥터>를 열심히 시청하긴 했지만 워낙 어렸을 때라서 기억에 나는 장면은 몇 없다. 상당히 큰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였으니, 주인공 박시온이 가진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향한 관심이 전보다는 수면에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자폐성 장애인, 지적 장애인 등 사회적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사람을 향한 시선은 차갑고 싸늘하다.


솔직히 나 또한 그렇다. 유년 시절이든 학창 시절이든 그랬다. 나는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른 타인을 이해할 수 없었고,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고,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해할 마음도 생각할 힘도 없었다. 어차피 나와 어울리지 않을 아이에 대해서는 구태여 알고 싶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시한 것이다. 어차피 쟤는 나랑 다르니까. 우리랑 친하게 지낼 수 없으니까. 나는 '다름'이라는 것을 마주하면 '저 사람은 왜 나랑 다를까?' 같은 호기심보다는 두려움과 반감을 가장 먼저 느끼는 인간인가 보다. '저 사람은 나랑 다르네. 엮이면 귀찮아질 것 같아. 피해야지.' 이런 느낌으로.


그래서 이제 와 생각하게 된다. 그 아이는 왜 그랬을까? 왜 수업 시간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을까. 왜 같은 반 아이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을까. 왜 아이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 행동을 반복했던 걸까. 그것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범주였는지, 그 아이의 불안이나 두려움이었는지, 그저 그 아이의 성향과 성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본질적인 마음을 향해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서울아산병원 의료정보에 따르면 '아동기에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애, 언어성 및 비언어성 의사소통의 장애, 상동적인 행동, 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질환'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든 문장 한두 줄로 완벽하게 설명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물며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을 자폐인, 자폐성 장애인 등 어떤 이름으로 칭해야 하는지도 고민이 드는데, 우선 이 글에서는 자폐인이라고 칭하도록 하겠다. 혹시 비하성 표현이나 틀린 말이 있다면 아시는 분께서 정정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자폐는 병이나 질환으로 분류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고―그래서 자폐를 '앓는다'거나 '치료한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고 한다.― 애초에 '자폐(自閉)'라는 표현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말도 있다. 자폐가 아닌 '신경 다양성'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글을 보기도 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자폐와 관련된 장애를 아우르는 말이라 사람에 따라서 말도 행동도 성격도 전부 다르다. 어렵다. 나는 앞으로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확하게 분류하고 정의할 수 있는 공식이나 학문 같은 게 아니니까. 말과 행동과 성격이 제각기 다른 건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을 넘어서 수많은 동물과 곤충들에게까지 적용되지 않는가. 아마 외계인들도 행동과 성격이 똑같지는 않으리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둘러싼 수많은 말과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 것 하나 완전히 맞는 말도, 완전히 틀린 이야기도 없다. 그러다 보면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일까 고민하게 된다. '나'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마음인데도 그토록 어렵다. 자연스럽게 '우리'라는 울타리를 만드는 순간 편견과 멸시가 시작된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랬으니까.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를 만들었던 시간이 너무 길다.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른 존재. 비단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향하는 불공정한 생각이 아니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렇기에 나와 무언가 다른 존재라면 그 대상이 누구든 거부감을 가진다. 나와 의견 또는 사상이 조금만 다른 사람을 만나도 괜히 저 사람은 이래서 별로고 저래서 별로다,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리고 부정할 이유만 찾고 있으니.


혼자서는 절대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존재. 그렇기에 억지로 '보편적인 일반 집단'을 만들고 그 속에 '정상적인 나'를 넣으려 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런 생각도 편파적이고 무지한 생각일 수 있겠다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고 있으면 그런 감상이 머릿속을 부유한다. 우영우가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과 세상 역시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기에 이상하고 힘겨울 것이라고.





Chapter 2 _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생각한 것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드라마로서의 화제와 인기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로 타오르는 것에는 역시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가진 주인공 우영우는 다른 사람에 비해 말하는 톤이 높고 말투가 특이하며, 사람과 눈을 쉽게 마주치지 못해서 매번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한다. 식사는 오로지 김밥으로만 해결하고―자폐인은 감각기관이 민감한 경우가 많은데, 김밥은 재료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예상 밖의 식감이나 맛에 놀랄 일이 없다고 한다.― 고래를 무척 좋아하여 거의 박사 수준의 방대한 지식을 가졌다. 또한 1화에서 처음 로펌으로 출근할 때 아버지가 선물로 준비한 정장을 발견한 우영우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웃는다. 아버지가 정면으로 찍은 다양한 표정 사진 중 '행복'이라고 적힌 사진을 따라서.


우영우는 자연스럽게 감정을 따라 표정을 드러내는 대신 학습하는 것처럼 표정과 감정을 연결한다. 웃으면 행복이나 기쁨, 찡그리면 불만이나 분노. 이는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과 감정 상태를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자폐인이 사용하는 방법 중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드라마 속 우영우도 어린 시절 아버지가 레고를 밟아 바닥에 쓰러지면서 "영우야, 아빠 아파."라고 말해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이내 아버지가 눈물을 흘려도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의 우영우처럼 '자폐인은 무감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며 그보다는 '타인의 감정에 큰 관심이 없고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이 있다'에 가깝다고 한다. 자폐인도 당연히 기쁨, 슬픔, 불만, 불안, 두려움 등 복잡하고 복합적인 감정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 그것을 표현하고 타인과 나누는 것이 서투를 뿐. 당장 드라마를 보아도 어른이 된 우영우는 매 화마다 다양한 감정 표현을 보이고, 의뢰인의 상황과 감정에 깊게 공감하여 열정적으로 사건 해결을 위해 뛰어다닌다. 자폐냐 비자폐냐를 떠나서 훌륭한 변호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드라마 속 우영우를 자세히 관찰하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사람의 특징과 양상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을 문제라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우영우의 행동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자폐는 다 저런 거구나!'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워낙 고지능 자폐인이 대중매체에 많이 나오는 탓에 자폐인은 모두 천재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흔하다고 한다. 하지만 <굿 닥터>의 박시온이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는 '원래 천재인데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것'이지, 자폐인이기에 천재인 것이 아니다.


나는 우영우의 조금은 어색한 말투, 불안한 시선, 한 가지에 아주 깊게 들어가는 관심사를 비롯한 여러 행동과 습관은 '자폐는 이렇다!' 같은 일반화가 아니라 그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수많은 특징 중 하나를 표현한 것이라고 느낀다. 3화 <펭수로 하겠습니다>에 나오는 또 다른 자폐인 '김정훈'은 우영우와 달리 6~10세 정도의 정신 연령을 가지고 있으며, 같은 자폐 스펙트럼이라도 우영우와 전혀 다른 행동 양상을 보인다. 또한 드라마 중간에 김정훈의 아버지 '김진평'이 우영우에게 "그래 봤자 너도 자폐잖아!"라며 무례하게 소리치는 장면이 있는데, 김정훈의 어머니 '정경희'가 사과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들 김정훈과 같은 자폐 스펙트럼인데도 사회생활을 하고 변호사까지 된 우영우를 향한 부러움과 열등감, 의대생이었던 큰아들 김상훈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막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같은 자폐인이라고 말하지만, 우영우와 김정훈은 좋아하는 것도, 직업도, 정신 연령도 다르기에 당연히 같지 않은 것이다.


작중에서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은 유형이 천차만별이라 자신도 다른 자폐인을 잘 알지 못한다고 직접 대사로 언급하는 만큼, 드라마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다양한 양상과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우영우와 다른 양상의 자폐인 김정훈을 등장시킨 이유도 없을 것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라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교육과 훈련을 받아 흔히 알려진 자폐인의 특성이 겉으로 전혀 드러나지 않기도 하고, 의학적으로 자폐 스펙트럼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정작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한다. 이 사실은 처음 알았다. 우영우는 모든 자폐인을 통틀어 만들어낸 캐릭터가 아니라 그저 수많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 유형 중 하나를 나타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저 사람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고? 거짓말 아니야? 천재도 아니고 우영우랑 완전 다른데?" 같은 무례하고 무지한 발언은 절대 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말은 언제나 신중해야 하는 거니까.


3화가 끝나갈 무렵에는 멀어지는 김정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우영우의 독백이 나온다. 대다수 사람들이 비자폐, 비장애, 또는 '보편적이고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어느 사회를 가만히 관통하듯이.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나치의 관점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장애인, 불치병 환자, 자폐를 포함한 정신 질환자 등이었습니다. 80년 전까지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병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나와 김정훈 씨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 우영우, 3화 <펭수로 하겠습니다> 독백 中 -




사회는 효율과 능률을 극도로 추구한다. 먼 옛날부터 같은 사람에게도 효과와 능력을 부여하여 가치를 매겼던 문화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의대생이 자폐인보다 효과적이고 유능한 인재라는 것. 그 현실은 의대생과 자폐인의 중요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사람이 사람의 쓸모를 좌우하는 기준이 된다. 장애의 유무, 나이와 성별, 학력과 학벌, 부모의 유무와 그들의 직업, 사회적인 위치와 경제적 능력, 키와 외모 같은 것들. 그 모든 것들이 편견과 차별과 등급의 시작점이 된다.


이 드라마의 화제성과 파급력에 결코 긍정적인 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의 기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장난 삼아 우영우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며 '자폐인 흉내'라고 하거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향한 관심이 전혀 없기도 하고, 우영우라는 인물 자체의 귀여운 모습과 연기에만 집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의미를 생각하보다는 드라마 자체의 재미를 즐기는 사람도 많다. 어쩌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종영까지도 크고 작은 비판―무분별한 비난과는 다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고 있으면 이 드라마가 흥행함으로써 자폐 스펙트럼 장애는 이렇다더라 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낼 우려는 있어도―사실 그건 드라마 자체가 아니라 드라마를 시청하는 우리에게 달린 일이지만―, 자폐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인권, 자유, 행동을 무의미하게 만든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오히려 그동안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비롯한 수많은 편견에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우리에게 조금 더 많은 궁금증과 깨달음을, 나아가 올바른 이해와 공정을 고민하게 하는 효과도 있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조금씩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놀림과 괴롭힘과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졌던 장애인,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휠체어를 탄 사람과 시각장애인 지팡이로 길을 찾는 사람, 어른에게 모든 의견과 상상을 무시당하는 아이, 반대로 어린 사람에게 시들어가는 뿌리 취급을 받는 중년과 노년, 혼자 자식을 키우는 부모 또는 보호자, 부모와 가족 없이 스스로 어른이 된 사람, 국적이 없거나 자신의 혈통을 알 수 없어 고민하는 사람, 나와 다르고 우리와 다르지만 여전히 나와 같고 우리와 같은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에 대해서. 내가 외면하는 나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앞으로도 많은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





Chapter 3 _ 자폐에만 초점을 맞추면 핵심을 볼 수 없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우영우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극복하거나 이겨내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 아니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우영우에게 자폐 스펙트럼은 삶을 망치는 장애물이나 역경이 아니니까.


우영우는 모든 재판 자료와 법 조항을 사진처럼 또렷하게 기억하면서도 정작 회전문 하나 제대로 지나지 못하는 자신을 꽃처럼 예쁜 복덩이 영우(英禑)가 아닌 영리하고 어리석은 영우(怜愚)라고 말한다. 자신이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가 아니라고 말하고는 무단결근을 하면서까지 변호사를 그만두려고 했지만, 우영우는 다시 법무법인 한바다의 변호사로 돌아온다. 만약 우영우가 변호사가 아니면… 이 드라마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아니라 <이상한 우영우>가 되는 건데! 혼자 그런 엉뚱한 생각도 해보았다.


사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참맛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보다도, 변호사 우영우가 의뢰인을 위해 열심히 재판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있다. 1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우영우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민법 제1004조 제1호에 의한 피고인의 상속 결격'에 대한 쟁점을 잡아내어 선배이자 상사인 변호사 '정명석'에게 예리한 판단력과 변호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6화 <내가 고래였다면...>에서는 탈북하여 홀로 딸아이를 키우는 피고인 '계향심'을 위해 투지에 타올라 동료 변호사 '최수연'과 함께 북한 법까지 가져오는 등 변호사로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물론 너무 열정에 끓은 탓인지, 계향심이 초범이고 자수를 했다는 기본적인 감형 사유를 까맣게 잊어버리긴 했지만.


특히 권모술수 권민우가 많은 욕을 먹었던 5회 <우당탕탕 VS 권모술수>에서는 우영우가 정직한 변호사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과정을 잘 나타냈는데, 마침 이 화에서 우영우가 로스쿨 동기 최수연에게 '봄날의 햇살'이라는 따뜻한 별명을 붙여주기까지 해서 더욱 인상이 깊다.


5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ATM을 만드는 두 회사가 나오고, 우영우는 두 회사 중에서 권민우 변호사와 함께 원고 회사의 변호를 맡는데, 원고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재판에서 이기고 싶다는 욕심에 정직하지 못한 변호를 통해 원고를 승소로 이끈다. 하지만 추후 원고 회사가 계약을 독점하기 위해 일부러 피고측 회사에 누명을 씌워 가처분 신청 소송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우영우는, 자신이 정직과 정의를 버리고 변호사로서의 승리와 욕심만을 좇았다는 사실에 큰 자괴감과 죄책감을 느낀다. 그리고 우영우는 원고 측 회사 담당자가 돈이 들어오는 그림이라며 걸어주고 간 해바라기 그림을 벽에서 내리고, 그곳에 피고 측 회사 대표가 보낸 손편지를 붙인다.


변호사님은 소송만을 이기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아니면, 진실을 밝히는 훌륭한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 오진종, 5화 <우당탕탕 VS 권모술수> 中 -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변호사가 장애를 이겨내거나 극복하는―이런 표현 자체도 틀린 말일 수 있겠지만― 이야기가 아니다. 자폐를 가진 자신을 향한 편견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맞닥뜨리고, 변호사 우영우와 사람 우영우 사이 존재하는 딜레마에서 갈등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고 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향한 논란에만 집중하면 핵심을 놓칠 수 있다. 마치 고래 퀴즈처럼. 몸무게가 22톤인 암컷 향고래가 500kg에 달하는 대왕 오징어를 먹고 6시간 뒤 1.3톤짜리 알을 낳았다면 이 암컷 향고래의 몸무게는 얼마일까? 정답은 '고래는 어류가 아닌 포유류이므로 알을 낳을 수 없다'이다.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채 두렵고 낯설지만 그만큼 흥미롭고 따뜻한 세상을 천천히 살아가는 우영우와, 그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다채롭고 다양한 모습에 눈길을 줄 필요도 있다.


작중에는 우영우의 자폐 스펙트럼 하나만으로 평가하거나 남들과 다른 모습에 의심 또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지만, 자폐 스펙트럼과는 상관없이 사람 우영우를 대하는 사람도 존재한다. 정명석 변호사는 초반에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가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후 우영우를 온전히 동료이자 후배 변호사로서 대한다. 동료 최수연 변호사는 '어설픈 모습이 신경 쓰여서 도와주면 정작 매번 1등은 우영우가 하고 나는 뒤쳐지더라'며 우영우의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에 내심 질투심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로스쿨 시절부터 매번 우영우를 챙겨주고 진심으로 생각해 준 사람이다. 자폐 스펙트럼은 누군가의 비난을 받을 필요도 동정을 받을 이유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소소하지만 작은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또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느끼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폐인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2화 <흘러내린 웨딩드레스>에 나오는 동성애자 '김화영'과 그의 연인은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한 어려운 현실을 보여준다. 김화영 씨는 연인과 만난 세월이 대략 10년이나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아버지에 의해 억지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까지 할 지경에 이르니까. 다행히 파혼 후 김화영은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법정을 나선다.


이 외에도 돈을 향한 욕심 때문에 뒤틀려 버린 가족과 친구, 우영우에게 왜 경쟁자와 정보를 공유해야 하냐며 혼자 의뢰인과 친밀감을 쌓는 권모술수 동료 변호사 권민우, 병역을 이행하지 않은 우영우가 공감할 수 없는 군대 관련 이야기가 원고와 변호사들 오가며 우영우가 소외되는 장면, 탈북민을 향한 편파적인 사상을 가진 의사 '권병길'이 등장하는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과 평소에도 겪는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장면 하나하나를 곱씹고 있노라면 마음이 조금 씁쓸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는 흑백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다. 수많은 색채와 빛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온종일 눈을 비비며 살고 있다.





Last Chapter _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의문이 든다. 왜 사람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같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들고, 나를 비롯한 세상이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걸 너무 쉽게 망각하는 걸까. 반드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아니더라도 전 세계에 '다름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공존과 공생과 공정의 첫걸음이다'라는 메시지가 담긴 대중매체는 수백 개가 있을 텐데. 당장 몇 걸음만 걸어가도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수없이 볼 수 있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데.


의외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 역시도 그랬고, 사실은 지금 이 순간도 그렇다. 결국 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사람을 무신경하게 만든다. 지금 당장 내가 감당해야 할 문제가 이렇게나 많은데. 구태여 나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것까지 신경 쓸 여유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정의하는 잣대가 정답이라고 외치는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괜히 몸을 웅크리게 된다.


인간은 만들어진 순간부터 이기적인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태어났을 때부터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따르며 살았고,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무시하거나 미워했고, 집단에 소속되지 못한 자를 패배자라고 부르며 끊임없이 자신의 자리를 더듬는 불안과 경쟁 속에서 살았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고 있으면 이제 그런 악순환의 고리는 조금 끊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욕심과 잔혹함을 토대로 눈부시게 발전했다고 하지만 끊임없이 발전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것이 닳았고,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망가지고 있다.


무엇 하나 포기한다고 해서 삶이 무너지나.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비난 섞인 돌멩이까지 던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미워하고 싶다면 마음으로만 미워해도 충분히 지친다. 욕망과 증오만을 바라보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만들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아주 오랜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이상론은 좋아하지 않지만, 사실 논리 하나 없는 이상론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유토피아(Utopia)―인간이 생각할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와 디스토피아(Dystopia)―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단화한 암울한 미래상―가 같은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이 공존하고 공생하고 공정하게 세상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걸 생각만 해주더라도, 나와 타인은 지극히 다른 존재라는 걸 조금만 알고 있더라도 좋을 텐데. 세상은 절대 급변할 수 없는 거대한 생태계와 같아서 서서히, 아주 천천히, 작은 발걸음이라도 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정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던 과거에 비하면―인간성을 버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그런 취급을 당했던― 사람들의 인식과 사회적 분위기는 많이 좋아졌다. 그러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던 시절은 결코 먼 과거가 아니기에 우리는 아직도 그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자꾸 선을 긋고, 급을 매기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마치 고기의 품질이라도 정하는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세상으로는 어떻게 나아갈 수 있을지. 백 걸음 중에서 이제 겨우 한 걸음을 떼었다 하더라도, 시작점에서 출발했다면 나머지 아흔아홉 걸음을 채워나갈 과정은 수십억 명의 '나'에게 달린 일이겠지. 마음 아프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뒤집어엎을 힘이, 능력이, 의지와 용기가 없다. 드라마 하나에서 시작된 글이 이렇게 장황하게 허우적허우적 길어지는 것도 품고 있는 생각이 많다는 걸 나도 모르는 사이 여실히 드러내는 과정인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 결론짓기도 어렵다. 이토록 넓은 세상을 사회적 약자와 소외자, 다수의 중간자, 사회적 강자 따위의 파벌로 나누어서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누구는 이렇고 어떤 집단은 당연히 이렇게 살아간다는 생각 자체가 편파적인 시선을 만들어낼 테니까. 그저 세상에 태어난 한 사람이 온전한 사람으로서 보호받고, 성장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될 필요가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람은 바람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것을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리고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매거진의 이전글 꿀리지 말고 살아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