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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야사 May 14. 2022

꿀리지 말고 살아라.

쭈그러지고 우그러지고 구겨지더라도


"열 받으면 그냥 에이 씨, 그만두렵니다 하고 살아. 참고 살지 말아. 그게 중요한 거야. 어떤 상황에서도 꿀리지 말아야 해. 네가 너 스스로를 챙기는 게 중요해."




글을 쓰기 시작한 날짜 2022년 5월 11일 수요일. 기분 탓인지 아닌지, 상당히 오랜만에 집에서 보는 듯한 아버지가 좁은 저녁 상에서 나에게 건넨 말.


어차피 익명의 공간이니 개인사나 가정사를 얼핏 언급할 수 있다. 빈말로도 아버지와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어렸을 때부터 제대로 편안한 유대감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있고, 워낙 무뚝뚝한 성격에 자주 욱하는 성질의 아버지는 자상하고 친근한 부모가 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버지 당신도 자신의 성격이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은 편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셨는데, 아버지도 세상에 태어나 인생을 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라 달리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의외로 나는 마음의 문을 잘 닫는 편이다. 마음을 내준 사람에게는 어떻게든 마음을 더 주려고 하고, 손을 거둔 사람에게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한 번 마음이 떨어지고 시선이 멀어지기 시작하면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구태여 따뜻한 마음을 품지는 않는다. 쉽게 말하자면, 나 역시 자식으로서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란 뜻이다. 자식으로서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나 역시 깊게 생각한 적이 없지만서도.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뜨거운 불 같았던 아버지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반복되는 일상과 나아질 기미가 쉬이 보이지 않는 세상살이에 지친 것인지, 사람 자체의 기력이 약해진 게 눈에 보이곤 한다. 아버지의 삶은 꼭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터에서는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타지에서 혼자 몸을 누이며 지내다가 어쩌다 한 번 집에 돌아와도 있는 건 사이가 점점 소원해지는 배우자와 시선조차 외면하는 못난 자식뿐이다. 하물며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집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기도 했으니, 아버지에게 진정한 집은 이미 어머니와 내가 있는 이 공간이 아닐 것이다.


아빠는 가족임에도 나에게는 너무 멀어진 관계이기에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했지만, 그와 동시에 아빠의 인생 역시 풍족함과 사랑이 가득하지 못했다는 걸 안다. 부모와 자식으로서는 어디서부턴가 뒤틀렸더라도, 사람과 사람으로서는 나름대로의 동질감이나 연민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 이 또한 이해의 방식 중 하나라 믿으려 한다. 이게 올바른 방향인지 나만의 생각인지는, 앞으로도 계속 알지 못한 채로 살아갈 듯하다.




그런 아버지가 오랜만에 나와 마주 앉은 저녁상에서 하신 말씀이 저것이다. 꿀리지 말고 살라는 말. 그저 아버지가 '자존심과 군대 이야기를 빼면 인형'라고 하는, 전형적인 기성세대 어른―가끔은 꼰대로 느껴지기도 하는―이기에 저런 말을 한 건 아닐 테다.


세상을 편하게 살아갈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난 자식. 살갑지 않고, 예민하지만 무신경하고, 하루 걸러 하루를 변덕과 불안 속에서 사는 사람을 자식으로 둔 이들의 고됨도 생각해 볼 만하다. 좀 살만하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시큰둥하게 "별로."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아버지는 나를 앞에 두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인 당신이 무능하다면 어쩔 수 없이 참고 직장을 다녀야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힘들고 열 받을 때는 그냥 관두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라고. 절대 내가 스스로 나를 굽혀서는 안 된다고.


사실 현실보다는 이상에 가까운 말이다. 대책 없는 선택, 지나치게 극단적인 결단은 되려 나의 앞길에 독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나의 삶이 이 세상에서 불편하게 흐르지 않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자세. 부모가 자식에게 쏟아내는 훈계가 아니라 생을 30년 더 많이 산 인생 선배가 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꿀리지 말고 살기. 그렇다면 아빠는 그동안 살아오며 누구에게 무릎을 꿇었을까. 소문에 따르면 나의 외조부모님이 나의 어머니, 그러니까 당신들의 딸이 어린 나이에 결혼하는 걸 반대했을 때 어머니의 집에 찾아온 아버지가 외조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태어나기 수년 전의 이야기라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사실이라면 제법 신선하다. 애석하게도 부모님의 자식으로 살면서 부모님이 서로 사랑한다는 걸 느껴본 적이 결코 많지 않기 때문에. 아예 없을지도 모르겠다.


꿀리지 말고 살아라. 어제 쭈그러졌고, 오늘 우그러지고, 내일 구겨질지라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다. 야생화처럼 시들시들 죽다가도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살아나는 존재. 어느 땅에 심어져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는 사람. 파릇파릇한 풀숲 사이에서 꽃잎을 당당하게 내밀고 있는 이름 모를 작은 풀꽃.


아직 마모되지 않은 나의 모습. 내가 아는 나를 지킬 수 있는 순간. 시간은 참 아이러니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알던 나는 점점 깎여가는데, 닳고 닳은 그 모습은 지금보다 덜한 고통을 느끼고 더한 안정감을 느낄 것이라고 믿는다. 빨리 나이를 먹고 빨리 아픔에 익숙해지고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나는 나의 무릎을 거친 땅바닥에 꿇게 만들고 나 자신을 꿀리게 살아가게 한다.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통해서.




누군가는 나의 많은 것을 핀잔한다. 앞에서든 뒤에서든 누군가는 나를 깎아내리고 비웃는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생존할 때까지 변하지 않을 일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의 많은 것을 이해할 것이고, 나를 세심히 관찰하고 좋아할 것이다. 그건 내가 죽고 나를 기억하는 이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변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누군가'가 어디에 있는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래서 꿀리지 말고 살기로 했다.


쭈그러지고 우그러지고 구겨진 나를, 구태여 내가 밟으며 살 필요는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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